16화
"중원이 아니라 다시는 이승을 못 밟게 해야 합니다."
살벌한 한마디에 바쁘게 움직이던 쟁자수와 표사들이 잠시 일을 멈추고 상아를 돌아보았다.
적화가 그들을 향해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저어 보이자 그들은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
맹강은 남궁적에게 피해를 최소화하며 마적들을 잡아낼 방법을 물었고, 남궁적은 그의 경험을 살려 답을 내어주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적들의 화살로부터 몸을 숨기는 것이었다.
수레를 이용해 벽을 쌓고 상단의 사람들은 그 뒤로 몸을 숨긴다.
그리고 적과 적화, 상아가 활 질을 포기하고 표물을 빼앗으러 접근하는 마적들을 소탕하는 것이 남궁적의 계획이었다.
덕분에 상단사람들은 표물을 실은 수레를 둥글게 배치하고 그사이에 주위에서 구한 바위나 나무 따위를 쌓아 틈을 메꾸고 있었다.
상아는 이렇게 방어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당장 놈들을 찾아내어 도륙 내고 오겠습니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상아에 적은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안전이 먼저다. 내가 처리할 테니 너희는 상단사람들을 보호하는 데 집중하거라."
"하지만 어찌 어르신께 그런 잡다한 일을 맡기겠습니까? 부디 이 후배에게 모두 맡겨주십시오."
뜻을 굽히지 않으려는 그녀의 태도에 콧바람을 길게 내쉬었다.
"놈들은 북적의 잔당이라 하였다."
"정 불안하시다면 맹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소녀의 이름을 걸고 완전히 박멸시키겠습니다."
"아니,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어찌 후배들을 두고…."
"상아야."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부른 적이 다시 말했다.
"내가 40년 전에 완전히 마무리 짓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러니 나의 책임이다."
흥분해있던 상아는 그제야 자신이 누구에게 항명하며 목대를 세웠는지 깨달았다.
사색이 되어 머리를 조아리는 그녀를 뒤로한 적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놈들은 치밀하며 빠르다. 이미 자리를 잡았다면 이미 도시에 사람을 심어놨을 게다. 그리고 맹의 지원이 도착했을 땐 세외로 도망친 후가 되겠지. 그리고 경공술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말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진다면 대부분을 놓치게 되어 쫓지 않느니만 못하게 된다. 습격을 가할 땐 뭉치고 흩어질 땐 팔방으로 나누어지는 용병술을 사용하는 자들이다. 놈들을 평범한 산적이나 마적들과 같이 취급하지 말거라. 그들은 삶이 훈련이며 놀이가 병법인 정예 군병들이다. 더구나 동적이라면 무림인에 대한 사정도 밝을 터, 무림인을 상대할 줄 아는 동적은 북적보다 훨씬 더 두려운 존재들이다."
"가르침에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만 고개를 들거라."
적은 주춤주춤 몸을 일으키는 상아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타이르듯이 어루만져 주었다.
"무엇이 너를 그리 분노하게 만드는 것이냐?"
"분노가 아닙니다. 그저, 저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구나. 상아야. 사명을 쫓는 것은 좋은 일이다. 허나, 네가 정한 사명에 사로잡히진 말거라. 나는 스스로 정한 사명에 잡아 먹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사내를 알고 있다. 네가 그와 같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구나."
"또한, 명심하겠습니다."
명심한다고 대답했지만 듣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남궁적 그 또한 듣지 않았기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적은 상아를 더 설득하지 않았다.
그저, 하루라도 빨리 스스로 깨닫길 바랐다.
한편 적화는 못마땅한 눈으로 상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듣던 대로 마두와 관련되면 사람을 못 죽여 안달이시네요."
"그것이 협객이 할 일입니다."
"제가 배워온 협객은 마두를 죽여 이름값을 올리려는 자들이 아니에요."
적화가 상아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듯했다.
표독스런 얼굴이 된 상아가 매섭게 적화를 쏘아보았다.
"입 다무세요. 당신이 협객에 대해 뭘 알죠?"
"정말 어째서 당신이 대협객이 아니라 협나찰로 불리는지 알지 못하세요?"
"제가 벤 마두의 목이 부족해서죠. 내가 어떤 협행을 하든 남궁소저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그렇네요. 괜히 참견해서 미안해요."
두 여인 사이의 공기는 서리가 생길 것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위기를 험악하게 만드는 둘을 따끔하게 한마디 하여 혼내줄까 싶기도 했으나 곧 마음을 돌렸다.
지금 중요한 건 저 두 아이가 아니라 아까부터 저 멀리서 그들을 주시하는 한 쌍의 눈동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초인의 경지에 이른 남궁적의 감각은 이미 그의 감시를 간파하고 있었다.
습격을 대비하는 동안 감도는 알싸한 공기.
침묵에 눌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는 남궁적에게 무척 익숙한 것들이었다.
적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가 북적들의 군대와 맞서 처음으로 전투다운 전투를 치렀던 날을 떠올렸다.
그래, 일곱 중 셋이 모여 있었고, 넷이 되던 날이었다.
-저기 보게, 동방에서 가져온 조공들이야. 어마어마하군. 여기 보게 그 영민하다는 동방의 해동청도 있어. 아직 새끼 매인가?
-저기. 여인들도 보이는 거 같은데?
-몰랐나? 천곽, 놈들은 조공으로 처녀들을 받아 노예로 삼는다네. 우리 천산에도 백 명이 넘는 아이들을 조공으로 보냈어. 더럽고 탐욕스러운 놈들이야.
-사람을 조공으로 요구하다니. 천륜을 어기는 왜적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보게 친구들, 나는 참을 수 없네. 저기 조공으로 보내진 여인들만이라도 구하고 싶어.
-와하하! 이보게 도사 친구. 자네 나랑 뜻이 통했잖나? 저 아리따운 여인들을 괘씸한 북적 놈들한테 보낼 수 없지!
언제나 의로운 벗들은 의로운 일 앞에서는 남궁적보다 무모할 때가 있었다.
‘내가 무어라 했더라. 그래, 천곽과 강을 나무랐지. 내 복수에 방해가 되는 일이라고 말이야.’
-저들을 구한다고 북적들의 경계를 산다고? 너희들끼리 하지. 나는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산에서 내려온 온 게 아니야. 죽이러 왔지.
-저 복수에 눈이 돌아간 녀석이 남궁의 마지막 협객이라고? 누가 그래?
결과적으로 그들은 조공을 운송 중인 북적들을 기습하기로 결정했다.
적은 끝내 왜 자신이 복수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이런 쓸모없는 일에 동참해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두 친구는 만약 자신들이 북적들에게 붙잡히면 자네의 이름도 불어버리겠다고 협박하는 탓에 어쩔 수 없이 공물을 옮기는 무리를 미행하며 따라붙었다.
‘그리고 그곳에 그녀가 있었지.’
창살이 달린 수레에 갇혀 옹기종기 모여 있던 다른 여인들과 달리 홀로 한 개의 수레 감옥에 격리되어 앉아 있던 여인.
멀리서 지켜보는데도 온전히 느껴지는 그녀의 품위와 단아한 자태에 단리강은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바로 지금 궁제라 불리는 신혜였다.
공물을 운반하는 북적들을 물리치고 여인들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감옥에서 풀려난 신혜는 유창한 중원의 말로 세 남자를 향해 경고했다.
-도망쳐요. 곧 망구다이들이 올 거예요.
그녀는 이제 막 북적들과 싸우려 마음먹은 자신들과 달리 이미 북적들과 수없이 전투를 치러 왔다고 말했다.
신혜는 자신의 경험에 따라 그들을 위해 알려주었지만,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적과 친우들은 듣지 않았다.
-이보시오 동방에서 오신 아리따운 소저. 망구다이라 하셨소? 알려줘서 고맙지만 우리는 두렵지 않소. 아무리 잘 훈련된 군마라도 천산의 불꽃을 보면 뛰어넘을 엄두도 내지 못한다오. 여기 화산의 도사님은 중원 제일의 천재 검객이시지. 그리고 이 친구, 여기 인상 나쁜 친구의 절기인 삭풍은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오.
강의 휘황찬란한 소개에 신혜는 오히려 한심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구해낸 고려의 여인들과 도망칠 테니 잘난 실력으로 망구다이들을 막아 달라 부탁하곤 일절 무시해버렸다.
그리고 떠나려는 그녀를 향해 적이 말했다.
-그들을 물리치려면 우리가 어떡해야 하오?
-잘나신 실력으로 최선을 다하시면 되겠네요.
-나는 당신이 말한 망구다이들에게 가족을 잃었소. 그들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들인지 충분히 알고 있소. 우리가 그들에게 맞서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시오.
-…좋아요. 단, 제일 먼저 저들에게 활을 뺏어 제게 주세요.
그리고 그녀는 고려의 저항군들이 북적과 싸우는 법을 알려주었다.
무공 외에는 병법이나 전술에 무지했던 셋은 그 날 우연히 조공의 운반하는 북적들을 지나쳐 신혜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일곱이 모이기도 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신혜의 전투경험과 북적들에 대한 사소한 정보들은 창제 조현을 만나기 전까지 일행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지금 맹강의 상단이 수레와 말을 이용해 만들고 있는 방진도 신혜가 알려주었던 것이다.
전쟁이 아닌 약탈을 하는 북적들은 절대 말을 쏘지 않는다.
"쟁자수들은 말을 모아놓은 곳 주변에 붙어 있게. 놀란 말발굽 질에 치이는 게 화살을 맞는 것보다 나을걸세."
"예! 노 선배님."
그들에게 말이란 금은보화보다 더 값어치 있는 약탈품이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수레와 마차로 벽을 두르고 가운데 말을 모아놓으면 그들은 안쪽을 향해 쉽사리 활을 쏘지 못하게 된다.
공 행수가 쟁자수들을 모아 전투가 일어났을 때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적의 조언과 맹강의 의견이 더해진 결과 중앙에 마차 하나를 넣고 그 안에 숨어있기로 했다.
적은 준비가 끝나가는 상단의 인원들을 둘러보고는 다시 그들을 감시하고 있는 자를 살폈다,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북적이 아닌 동적이라 그런가, 그것도 아니라면 저들도 우리의 방법을 기억하고 있기엔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난 까닭인 건가.’
망구다이들이었다면 결코 방진이 완성되도록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밤은 안전할 테니, 지금 충분히 자 두어라."
북적은 야간기습을 좋아하지 않았다.
활을 쏘기에도, 말의 시야를 확보하기에도 밤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마 습격을 해온다면 내일 아침일 터.
상아는 자신들은 자라고 말하며 본인은 전혀 쉴 생각이 없어 보이는 적에게 말했다.
"저희가 망을 보겠습니다."
"되었다. 나는 원래 잠이 없는 편이니 신경 쓰지 말거라."
"하지만."
"얼마 만에 느껴보는 전운인지. 옛 생각이 나기도 하고, 몸이 근질거리니 젊은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나는 저들을 기억하지만, 저들은 나를 기억할지 궁금하구나."
적의 말처럼 그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두려움도 걱정도 보이지 않았다.
북적의 잔당이라 하면 아직도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것이 중원의 현실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기대에 차 있는 적을 보자 과연 칠제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어르신께서 계시다는 걸 알았다면 천 리 밖으로 도망쳤을 겁니다. 다행인 일이 아닙니까? 그렇기에 저 악랄한 잔당들을 잡아 죽일 기회가 생겼으니 말입니다."
"하하! 그것도 그렇구나."
상아의 말처럼 남궁적이 혈귀라 불리기 시작했을 때는 북적의 장군들이 직접 이끄는 군대가 아니라면 그의 이름만 들어도 도망치는 일이 잦긴 했다.
"‘그것’을 쓰실 생각이십니까?"
상아가 말하는 그것이란 삭풍이었다.
적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삭풍을 꺼내 상단사람들에게 정체를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그는 마차로 만든 방벽 안에서 각자 쉬고 있는 상단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체력을 비축하려 잠깐 눈을 붙이는 이들도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전투를 대비해 곁에 무기를 두고 있었다.
아무리 거친 상행을 업으로 삼는 비단상인이라 하여도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전투를 앞두고 있으니 긴장을 놓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전운이 감도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