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제귀환록-19화 (19/282)

19화

깡!

두꺼운 거도가 튕겨 나왔다.

놀라운 것은 거도를 맥없이 차단한 검이 나뭇가지처럼 얇은 협봉검이라는 사실이었다.

칼의 무게도, 칼을 쥔 팔의 근력도 모두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던 철정엽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기껏해야 화살 따위나 막아낼 위력인 줄 알았더니.’

춤을 추듯 내지르는 일 초식 하나하나가 그의 공격을 완벽히 막아내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도와 검이 닿을 때마다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로 충격이 전해졌다.

흡사 벽을 때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맹공을 퍼붓다 답답한 나머지 쌍도를 한 번에 힘껏 내려치며 버럭 소리 질렀다.

"금강석으로 칼을 만들었냐! 중원의 검객들은 아주 돈 지랄을 하는구만!"

반 바퀴 몸을 회전시키며 쌍도를 쳐낸 상아가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리고 숨을 고르며 말했다.

"네 공격이 보잘것없는 것을 왜 검에서 이유를 찾지? 생긴 것만큼 하찮은 실력이구나."

여유로운 척 지껄였지만 사실 상아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마적두목 따위가 보기보다 실력이 대단했다.

심지어 검세가 올곧고 정순한 면도 있으니 범상치 않은 무공이었다.

그가 지닌 내공의 양이나 타고난 근력도 상아의 예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만약 철정엽이 내공을 좀 더 섬세하게 다룰 줄 알았다면 위험해 처할 뻔했다.

위로 일급부터 하위 팔 급까지 나뉘는 마두의 등급으로 보자면 정철엽은 이급에 해당될 정도의 고수였다.

칼솜씨 하나로 혈루마인에 버금가는 마두라는 의미였다.

특히 한 번의 공격을 막아내도 곧바로 다음 공격을 이어오는 연환도법의 특성상 그녀의 진신절기인 협려장을 사용할 틈과 거리가 나오지 않았다.

상성이 몹시 좋지 않았다.

상아는 눈동자만 살짝 굴려 적화의 상황을 살폈다.

내심 그녀를 혼자 두고 머리를 치러온 것이 마음에 걸렸던 까닭이었다.

적화 역시 열 명 정도의 마적에게 포위되어 힘겹게 공격을 막아내기만 하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이대론 위험해.’

자신이 성급했던 걸까?

마른 침을 삼킨 그녀는 아직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수레 너머의 표사들을 생각했다.

‘맹 대인. 부디 대의를 위한 결정을 내려주시길.’

그들에게 강요할 순 없었지만, 만약 저 안에 있는 수십 명의 표사들이 가세한다면 적화를 포위한 마적들을 제압하고 적화와의 합공으로 정철엽을 끝장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상아는 이 모든 상황을 단번에 정리해 줄 수 있는 존재를 떠올린다.

‘도제시여!’

* * *

"마적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두 여협께서 벌써 열이 넘게 쓰러트렸어요."

"화살도 멎은 것 같으니 우리가 나서면 쉽게 끝낼 수 있습니다!"

표사들의 간절한 목소리에 공 표두가 동의하며 맹강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맹강의 뜻도 다르지 않았다.

이미 철전을 집어 던질 때부터 안전을 도모하는 길은 글러 먹었었다.

그러나 아까부터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건 희생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맹강은 아직도 가만히 침묵 중인 노 검객을 쳐다보았다.

지금 이곳을 지휘하며 중심이 되는 사람은 상단주가 아닌 남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상단원들이 재촉하는 눈으로 간절히 적을 바라보자 줄곧 닫혀있던 입이 드디어 열렸다.

"기다리게,"

적은 바람의 냄새를 맡고, 귀에 내공을 실어 청력을 돋구었다.

아직,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방벽에 몸을 숨기고 있게나. 아직 때가 아니야."

남궁적의 말에 공 행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적에게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원망을 담아 말했다.

"노 선배님. 지금 두 여협이 생사의 고비를 넘는 중입니다. 저 아이들은 노 선배님의 후배이며 손녀이지 않습니까? 어찌 그리 매정하십니까?"

"두 아이들은 아직 괜찮네."

"이제 곧 괜찮지 않게 될지도 모릅니다!"

씩씩거리며 아직 전투가 한창인 바깥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가 말했다.

"저는 장사치라 협의인지 강호의 도리인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 두 사람이 여기서 죽어선 안 될 사람인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젊고,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노 선배님. 제가 노 선배님의 고견을 알지 못하겠으나 부디 절 막지 마십시오."

표국이든 상단이든 가장 무력이 뛰어난 사람이 깃발을 드는 것이 상인들의 관례였다.

공 행수, 그는 상단의 깃발을 달고 행렬의 맨 앞에서는 기수였다.

상단의 주인은 엄연히 맹강이었지만 상단의 무사들을 대표하는 사람은 공 행수라는 의미였다.

그를 따라 상단의 무인들은 모두 무기를 꼬나 쥐고 의지를 다졌다.

의로운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공 행수는 상인의 길을 걷기 전엔 무림의 협객을 꿈꾸던 청년이었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남궁적은 그의 의기와는 별개로 그들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적은 수레를 넘어가기 위해 발을 올리는 그를 향해 말했다.

"멈추게."

이젠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수레 위로 반쯤 몸을 올렸다.

하는 수 없지.

눈을 감았다 뜬 남궁적의 동공에 금색의 안광이 어렸다.

"멈추라 했다."

공 행수를 비롯한 무사들의 행동이 일시에 멎었다.

왜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중압감이 그들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처음부터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남궁적을 보고 있던 맹강은 경악했다.

남궁적의 한마디에 그의 뒤로 모여 있던 말들도 땅바닥에 배를 깔고 고개를 박고 있었다.

‘진정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무림엔 절대 고수라는 자들이 존재한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허공을 걸어 다니며 칼질 한 번에 단단한 철검을 잘라내는 경지의 천외 존재들.

맹강은 남궁적이 바로 그런 존재 중 한 사람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저 멀리 초원 너머부터 엄청난 먼지구름을 발견했다.

이윽고 말들의 거친 발굽 소리가 땅을 울리기 시작했다.

남궁적이 말했다.

"왔군."

그는 다시 표사들을 향해 엄중히 경고했다.

"수레 뒤에서 나오지 마시게들. 이번이 마지막 경고일세."

* * *

상아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얼핏 보아도 백여 명이 넘는 숫자였다.

그녀는 저들이 자신들을 구원하러 온 군병이거나 정도맹의 무인들일 거라 생각지 않았다.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털옷과 곡도. 그리고 화살을 맨 백여 명의 마적들이 주위를 에워쌌다.

큰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도는 철풍단의 본대.

그들의 등장에 철정엽은 광소를 터트렸다.

"흐하하! 어리석은 놈들아. 우리가 겨우 스무 명 규모의 마적단인 줄 알았더냐? 처음부터 매를 띄워놓았었다. 고얀 년. 아까 내게 뭐라고 했지? 자결하거나 목을 내밀어? 네년에게 그대로 돌려주마. 항복은 받지 않겠다. 얌전히 목을 내밀어라."

상아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철정엽은 그런 상아의 반응에 더 짙은 미소를 짓더니 칼을 휘저으며 명령했다.

"하타르가 죽었다. 형제의 원수를 갚아라! 전리품은 필요 없으니 모두 태우고 죽여라!"

항상 기름을 지니고 다니는 마적이 말 위에서 기름 항아리 안에 불을 지폈다.

작은 불씨에도 기름에 옮겨붙어 금세 활활 타오르는 항아리를 바닥에 던지자 불이 번져 오른다.

마적들은 빙글빙글 돌아가며 기름을 묻힌 천을 두른 화살 끝에 불씨를 붙였다.

수레로 만든 방진과 그 안에 있는 상단원들을 통째로 불태워 버리려는 속셈이었다.

그들의 목적을 눈치챈 상아가 소리쳤다.

"안돼!"

그러나 이미 쏘아진 불화살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기름을 잔뜩 먹인 불화살이 무려 백여 발이었다.

위기의 순간. 바람이 멎었다.

수레를 잡아먹기 위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화살 위의 불씨들이 모조리 사그라든다.

기름 먹인 천으로 끝이 뭉뚝한 화살들만이 힘없이 방진 위로 떨어졌다.

"무슨 상황이지? 또 괴상한 술수를 부렸구나!"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상아가 저 많은 불화살들을 막으러 가기엔 수레의 벽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곧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뿐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굳게 닫혀있던 성문이 열리듯이 안에 있던 사람들이 두 개의 마차를 밀어 공간을 만들었다.

그 사이로 외날의 도를 길게 늘어트린 노인이 걸어 나왔다.

저벅, 저벅.

천천히 걸어 나오는 남궁적.

심상치 않은 그의 기세에 멈추지 않고 주위를 돌던 마적들이 일제히 활을 겨누었다.

남궁적은 그들의 위협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시끄러운 발굽 소리에 살짝 인상을 찌푸린 그가 나직이 말했다.

"시끄럽구나."

이히히힝-!

그의 한마디에 마적들이 타고 있던 말들이 울부짖으며 멈췄다.

겁에 질린 듯 남궁적으로부터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숙이는 말들에 당황한 마적들이 고삐를 당겼다.

하지만 말들은 뒷걸음질 칠뿐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남궁적은 계속 걸었다.

그가 가고 있는 방향 끝엔 상아와 철정엽이 있었다.

정확히 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에게서 공포를 느낀 철정엽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는 자신의 말을 찾았다.

하지만 사람을 태우지 않고 있던 그의 말은 남궁적이 등장하자마자 달아난 후였다.

절망으로 물든 철정엽이 떨리는 목소리로 뇌까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저 노인네는 도대체 뭐고. 다들 뭐 하고 있어? 저 영감을 죽여. 철풍단의 전사들은 들어라! 죽여! 겨우 늙은이 하나잖아."

그러나 백 명의 마적들 중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넋을 놓고 그들의 두목과 가까워지는 노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봐. 가까이 오지 마. 거기 멈춰. 더 다가오면 다시 불화살을 쏘라고 명령할 거야."

적은 멈추지 않았다.

철정엽은 악을 쓰며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다시 불화살을 쏴라. 모두 잿더미로 만들어 버려!"

상아가 적에게 길을 비켜주며 옆으로 물러났다.

그녀를 지나친 남궁적과 철정엽의 거리는 어느새 열 걸음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

"쓸모없는 놈들. 오냐, 와라. 내가 직접 죽여주마."

이윽고 검격의 거리까지 들어온 남궁적을 향해 쌍수도를 휘두르려던 찰나였다.

남궁적이 입을 열었다.

"성가시게 하지 말고."

적의 눈동자 속에 일어난 금빛 섬광을 본 철정엽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그가 이어 말했다.

"가만히 있어라."

그리고 남궁적은 검을 들어 가볍게 그어 내렸다.

툭.

북적의 앞잡이로 북적의 시대에 권세를 누리고, 신강의 악명 높은 마적단을 호령했던 철가의 후예.

그는 이름 없는 길목에서 남궁적의 손에 허무한 최후를 맞이한다.

철정엽의 죽음과 함께 돌아선 남궁적의 동공에도 금색의 빛도 사라진 상태였다.

그가 마적들을 향해 말했다.

"꺼져라."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말들이 정신을 차렸다.

마적들은 황급히 말을 몰아 도주했다.

마찬가지로 남궁적이 행한 일에 정신이 팔려있던 상아도 말들이 움직이며 일어난 소란에 깨어났다.

그녀는 적에게 달려와 급히 아뢰었다.

"저들을 보내면 다시 도적질을 할 겁니다. 모두 잡아 죽여야만 합니다."

"도망친 도적을 잡는 건 군관이 할 일이다."

"북적의 편에 섰던 동적이기도 합니다."

"북적?"

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기억하던 북적이라기엔 너무 보잘것없었다. 머리를 베었으니 저들은 지리절멸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마적들을 쫓아다닐 만큼 한가하지 않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여기있는 상단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상아야."

조용히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상아는 자신의 결례를 깨닫는다.

적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내려보며 질책했다.

"나는 네게 방진 안에서 기다리라 말했다. 헌데, 왜 서둘렀느냐."

"그건, 맹 대인이 마적 무리들과 타협하려…."

그는 그녀의 변명은 듣지 않겠다는 듯이 계속 쏘아붙였다.

"만약, 네가 마적들의 척후병에 잡혀있는 사이 기다리고 있던 내가 화공을 막지 않았더라면, 맹 아우와 상단원들은 그들이 서역에서부터 가져온 모든 짐들을 잃고 목숨마저 위험해 처했을 게다."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되었다면 네 협의가 이루어진 것이었느냐?"

남궁적은 벙어리가 된 상아를 두고 지쳐 주저앉아 있는 적화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사람들은 나를 두고 마지막 협객이라 말했지만, 사실 나는 협의가 뭔지 잘 모른다. 허나, 조급한 네가 이룰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구나."

이어지는 그의 마지막 한마디가 비수처럼 날아와 상아의 가슴에 꽂힌다.

"스스로 쫓기는 자는 베풀 수 없는 법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