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약속은 하루 반 시진이었지만 조홍은 매일 아침 한 시진씩 아이들의 무공을 봐주었다.
사실 반 시진은 무공수련을 하고 반 시진은 아이들과 놀아주는 꼴이었으나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조홍은 그렇게 한 씨 무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보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여느 때처럼 두 사내아이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마보를 시키고 있던 참이었다.
뒷짐을 진 조홍이 엄중한 목소리로 가르침을 전했다.
"무릇 하체란 모든 초식의 뿌리가 된다. 뿌리가 튼튼해야 상체가 무너지지 않으며, 그리하여 검이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다. 마보라고 소홀히 하지 말고 똑바로 자세를 잡고 버티어라."
진짜 훈련이 진행되는 반 시진 만큼은 아이들 역시 딴청을 부리지 않고 진지하게 임했다.
흠잡을 곳 없는 아이들의 태도에 조홍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아이들의 연무장 겸 놀이터인 정원의 구석에서 그네를 타던 상아가 쪼르르 달려와서는 말했다.
"저도 배울래요."
막내인 상아만 아침 훈련에 열외가 된 건 너무 어려서이기도 했지만, 한 가주는 세 아이 중 두 아이에게 가전 무공을 잇게 하고 여아인 상아는 무림과 관련 없는 삶을 살길 바랐다.
보통 자식을 많이 둔 무가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상아가 자기도 무공을 배우겠다며 보채어 온 것은 오늘만이 아니었다.
조홍은 늘 함께하던 두 오라비가 훈련시간마다 놀아주지 못하니 심통이 난 까닭이라고 여겼다.
마음은 이해가 되었으나 조홍이 상아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말은 언제나 같았다.
"상아야. 넌 무공을 배우기엔 아직 너무 어리단다. 조금 후에, 네 키가 오라비들만큼 크거든 배우자꾸나."
상아의 입장에서는 매번 똑같은 소리로 거절당하자 뿔이 났는지 입술을 앙물었다.
콧등까지 씰룩이는 게 오늘은 단단 삐졌나보다.
"어제도 어제의 어제도, 또 어제도 똑같은 말. 상아는 어제의 오빠들만큼 자랐어요. 그런데 왜 안돼요?"
난감해진 조홍은 상아를 다루는데 익숙한 종훈과 시우에게 눈짓했다.
하지만 두 사내아이는 마보에 열심인 척 딴청을 부렸다.
영리한 아이들은 저만큼 삐진 상아를 달래는 것보다 마보를 하는 게 더 낫다고 결론을 내린 후였다.
조홍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지만 계속 꾸물거리다간 귀여운 막내 아가씨에게 단단히 미움을 받을까 목마를 태워주려 손을 뻗었다.
조홍이 목마를 태우는 일은 상아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였다.
하지만 상아는 평소와 달리 매몰차게 소리쳤다.
"싫어요! 목마 말고 무공 배울래요. 나도 할 수 있어요."
오라비들 옆으로 가 똑같이 마보자세를 취해본다.
그럴싸했지만 자세를 낮추자마자 다리가 떨리기 시작하는 것이 몹시 불안해 보였다.
후.
한숨을 내쉰 조홍이 힘들어 눈을 꼭 감고 있는 상아를 불쑥 들어 마보를 풀어주며 말했다.
"하룻밤이 아니라 내년에. 그러니까…."
큰오빠인 종훈이 조홍을 향해 손가락 두 개를 펴주었다.
"두 해가 지나면 배우자. 잠깐 해봐도 힘들지? 그때가 되면 네 오라비들처럼 할 수 있을 거야. 지금은 하려고 해도 힘들지 않니?"
상아는 조홍의 양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머뭇거리다 말했다.
"두 해가 지나면 홍 아저씨가 없잖아요."
"응?"
"저도 홍 아저씨한테 배우고 싶단 말예요. 아빠가 말했어요. 홍 아저씨는 엄청 훌륭한 사람이래요. 협객이요. 저도 홍 아저씨처럼 협객이 될래요. 그러니까 홍 아저씨한테 배워야 해요."
"협객이 되기 위해 꼭 내게 배울 필요는 없단다."
"그래도요! 저는 홍 아저씨한테 배울래요. 홍 아저씨가 떠나기 전에요."
조홍은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이렇게 어여쁠 수가."
조홍은 일찍 혼인했다면 딱 상아만 한 딸아이를 낳았을 나이였다.
협행을 하는데 정신이 팔려 가정을 이루지 못한 것이 지금보다 후회된 적은 없었다.
그는 결국 상아에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어 버렸다.
"약속하마. 두 해가 지나면 꼭 네게 무공을 가르치러 돌아올게. 상아야, 그러면 참을 수 있지?"
다시 오겠다는 조홍의 말에 상아는 환히 웃는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우고 새침하게 고개를 팩 돌리며 말했다.
"노력해볼게요. 그러니까 홍 아저씨도 꼭 노력하셔야 해요."
"하하! 그래, 노력해보마."
‘이번엔 이년만 돌아다니다 돌아오게 생겼구나.’ 그 또한 나쁘지 않지.
정도맹을 나온 후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게 된 조홍이었다.
내친김에 몇 년간 성도에 머물며 여비나 벌어둘까.
중간중간 이곳에 들러 아이들을 가르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 중이었다.
그리고 익숙한 호통 소리가 정원과 연결된 안채 쪽에서 들려왔다.
"상아야, 조 대협께 응석을 부려선 안 된다 하지 않았느냐!"
히끅, 딸꾹질한 상아가 조홍의 목에서 내려가기 위해 발버둥 쳤다.
조홍은 괜찮다며 붙잡고 있던 상아의 다리를 다독여 주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원해서 태워준 것이니 염려치 마십시오."
"하지만 대협."
"아이를 목에 태우고 있는 것도 수련이 아니겠습니까?"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한 가주는 안심하는 한편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
어미 없이 자란 아이들이라 엄하게 키운다는 것이 아비가 받아주지 못한 어리광을 조홍에게 부리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던 탓이다.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수련시간에는 절대 정원 쪽으로 오지 않던 그가 발걸음을 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조홍이 물었다.
한 가주는 훈련시간에 폐를 끼치게 되어 미안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한번 숙이더니 그에게 다가와 소매 속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조홍에게 건네주었다.
"조 대협 앞으로 온 서찰입니다. 훈련이 끝나고 전해드리려 했으나 보내신 분이 심상치 않아서 무례를 무릎 쓰고 가져왔습니다."
"심상치 않은 분이요?"
남궁대모님이 보내셨나?
종종 안휘에서 서찰로 안부를 묻곤 하시던 무림의 큰 어른을 먼저 떠올린 조홍이 대수롭지 않게 서찰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의외인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다.
"사후가?"
정도맹주 이사후.
서찰을 둘러싼 고급스러운 천엔 친우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천을 풀어 꺼내어 서찰을 펼치자 머리 위에 있던 상아도 궁금증에 머리를 내밀었다.
한 가주가 재빨리 다가와 상아를 조홍의 목마에서 내려놓는다.
정도맹주가 보낸 서찰이라니, 한 가주도 두 형제도 조홍이 서찰을 다 읽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마침내 서찰을 모두 읽은 조홍이 입을 열었다.
"이럴 수가."
"혹시 무림에 큰일이라도 있습니까?"
한 가주가 묻자 조홍은 서찰을 다시 고이 접어 품 안에 깊숙이 여민 후 말했다.
"이 친구가 저를 보러 성도까지 왔다는군요. 잠시 성도에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맹주님이 조홍을 보기 위해 호북의 악양에서 사천까지 오셨다고?
두 사람의 우정이 각별하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왔지만 보고도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소식이었다.
"맹주님이라면 무림에서 제일 바쁘신 분일 텐데, 과연 두 분은 둘도 없는 벗인가 봅니다. 저는 대협의 인덕이 부럽기만 합니다. 허허."
"유별나긴 하지요. 공사가 다망한 친구니 제가 서둘러야겠습니다. 종훈아 시후야. 미안하지만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하자꾸나."
"옙!"
아이들의 각 잡힌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조홍은 한 가주를 향해 말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마 성도에서 식사를 할 듯하니 기다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서 다녀오시오, 조 대협. 조 대협을 위해 먼 길을 찾아오셨을 텐데 제가 붙잡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럼."
한 씨 무가의 정문을 나선 조홍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한 가주와 아이들의 앞에서와는 달리 그의 얼굴은 딱딱히 굳어있었다.
* * *
"자네는 왜 이 지경이 되도록 방관했단 말인가!"
"일이 그렇게 되었네."
탁자를 엎어 버릴 것처럼 성이 난 조홍의 모습에 사후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손을 쓸 틈도 없이 일어나버렸어. 설마 섬서로 향하던 신교의 소교주가 악양에 나타나고 시비가 걸릴 줄 알았겠나."
"애초에 자격도 없는 자들이 악양에서 행패를 부리고 다니니 일어난 일이잖나."
"변명의 여지가 없네. 자네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모든 게 내가 부족했던 탓이야."
사후의 자조 어린 어조에 조홍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섬서에 있는 암제의 쌍룡성으로 친선 교류차 방문행렬을 하던 소교주가 악양호에서 백도검문의 제자들과 시비가 붙었다.
그리고 소교주는 실종되었고, 바로 한 달 전에 시체로 발견되었다.
백여 구의 정파 무인들의 시체와 함께.
"천산의 염제께서 이미 소교주의 복수를 위해 율법을 집행하기로 선포하셨어. 조홍.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어."
"전쟁이라니, 누구와? 정도맹이 염제와 전쟁을 한 단말인가? 이 친구야. 그건 전쟁이 아니라 염제에 대한 반역이야."
"알고 있어. 그래도 어쩔 수 없네. 믿기진 않겠지만 신교의 흑랑대주가 홀로 화산과 공동의 검수 일백을 베었어. 어떠한 이유로 그런 참극이 일어났는지, 또 어떻게 그가 홀로 백 명의 검수들을 베었는지 모르겠으나 도가 문파의 자존심이 무너졌다네. 물러날 기세가 없어."
"그깟 자존심이라니! 검제께서는? 검제께서는 중재하지 않으시는가?"
"아무것도. 이번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지."
"강호가 어찌 되려고…!"
조홍은 퀭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친우의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아마 정도맹은 지금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상황일 것이다.
참모들은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 짜내는 중일 테고 각 무력단의 단주들은 무림에 흩어져있는 맹의 무사들을 불러들이고 있겠지.
그런 와중에 맹주나 되는 사람이 사천에 있는 그를 찾아온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도와주게."
간절한 외침에도 조홍은 친우의 시선을 외면한다.
"자네가 함께해준다면 협객들이 동참해줄 거야. 그러면 염제께서도 쉽게 나서시지 못하겠지."
"자네의 예상처럼 그분의 의로움이 전쟁을 막을지도 몰라. 하지만 천산의 일에는 양보하지 않으시는 분이지. 많은 협객들이 죽을 거야. 나는 할 수 없네. 협객들을 이런 의미 없는 사건에 휘말리게 할 수 없어."
"조홍, 대의를 생각해주게. 이미 염제께서는 천산의 정예들을 이끌고 사천으로 오고 있으시다네. 이대로라면 사천에 있는 정도맹 소속의 무가들이 잿더미가 될 거야."
"자네가 현명한 결정을 내린다면 일어지 않을 일이지."
"조홍. 염제께 정도맹이 칼을 꺼내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듯, 정도 무림이 천산신교에 굴복하는 일 역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야.
"그럼 이번 일에는 어떠한 협도 없군. 나는 협객이야. 정도맹이 아닌 협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일세. 이만 가보겠네."
그리고 조홍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마지막 한 가닥의 희망도 잃어버린 사후는 그의 허리에 걸린 새하얀 검 자루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미안하네, 홍. 이미 엎질러졌어."
사고였다.
그러나 사고로 인해 터트려버린 둑에서 쏟아질 것은 물이 아니라 피가 될 것이다.
천산신교와 정도맹.
두 세력이 공존할 수 없게 되었다면 맹주인 그가 할 수 있는 일 하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