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밤이 되기 전에 한 씨 무가로 돌아온 조홍은 곧장 한 가주를 찾았다.
그는 안채의 안쪽 정원이 보이는 긴 마루에서 한 가주와 늦은 술상을 차리고 사천 무림에 곧 닥쳐올 위기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강조하며 당부했다.
"사후는 의롭고 영리한 친구입니다. 그 친구가 무림령을 발호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지만, 만약에 무림령이 발효된다 하여도 가주님은 응하지 마십시오."
무림령이란 맹주의 권한으로 정도맹에 소속된 모든 문파와 무가를 소집하는 행사였다.
무림의 위기를 대비하기 위하여 초대 맹주인 검제가 마련한 것이니, 원래는 칠제만이 행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하지만 칠제가 강호의 일선에서 물러나며 그 권한은 검제의 신검 백야를 넘겨받은 정도맹주에게 남아있었다.
즉, 무림령은 칠제의 이름으로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신성한 의무였다.
응하지 않는다면 한 씨 무가는 평생 불명예를 안고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무림령에 응해 천산신교에 칼을 겨눈다면 죽게 될 것이다.
한 가주는 고민에 잠겼다.
그러자 조홍이 다시 강조했다.
"협의가 없는 싸움이 될 겁니다. 가주님, 정도맹에 모든 정의가 있지 않습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온 무림을 떠돌다 보니 저는 염제를 뵌 적이 있습니다. 의로우시며, 호탕하신 분이셨지요. 제가 염제께 설명하겠습니다. 한 씨 무가는 안전할 겁니다."
그의 설득 끝에 고민을 마친 한 가주가 입을 열었다.
"걱정해주셔서 고맙소, 조 대협. 나 역시 젊은 시절 그대와 같이 협객을 꿈꾸던 몸.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조홍은 안심했다.
일주일 후 맹주 이사후가 무림령을 선포했다는 소식이 온 사천 무림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사천에 있는 정도맹 소속의 모든 무인들은 성도에 집결하여 사천을 향해 진격해오는 신교와 맞서 싸우라는 명령이었다.
전쟁이 벌어졌다.
조홍은 믿었던 친우를 원망했고, 유일하게 이 사태를 막을 수 있었던 검제를 또 원망했다.
그리고 이튿날, 그는 또 한 사람을 원망하게 되었다.
죽으러 가는 것이었다.
천산의 절기인 태양신공을 익힌 화령단이 오천에 염제께서 직접 이끄는 청화 수호대는 한명 한명이 군병 천명을 몰살시킬 수 있다는 실력을 가진 절정의 고수들이었다.
도저히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정도맹에서 낭인을 비롯한 사천의 정도 무인들을 일만 가까이 모았다 하지만 결국 계란으로 바위를 후려치는 격이었다.
그러나 한 가주를 비롯한 한 씨 무가 무인들은 그들의 남은 가족들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의미 없는 전쟁입니다. 결정을 거두어 주십시오. 아이들은 어찌하시려고 가시는 겁니까?"
무가의 모든 무인들을 데리고 성도로 떠나기 전, 한 가주는 자신이 타고 있는 준마의 콧등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이들을 위해 가는 겁니다."
한 가주는 저 멀리 안채의 창문 앞에 모여 서성이는 세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무림령을 거절한다면 조부 때부터 쌓아온 가문의 명예가 더럽혀질 겁니다."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족을 잃게 될 아이들의 고통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입니다."
한 가주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하지만 동시에 부정했다.
"그리고 아이들의 미래에 낙인이 찍히겠지요. 비겁자의 아들이며 딸이라고 말입니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찍힐 낙인이 두렵습니다."
조홍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완전한 협객이고자 했기에 일부러 가정을 이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조홍이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을 짐작할 수 없었다.
한 가주가 말에 올라탔다.
이어서 한 씨 무가의 검수들이 각자의 말에 올랐다.
가산을 털어 마련한 준마들은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않고자 하는 그들의 다짐과 같았다.
"조 대협. 제게 염제와 인연이 있다고 말씀하신 걸 기억합니다."
조홍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고 대답했다.
당신이 직접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고 수없이 소리쳤다.
그러나 꽉 막힌 목구멍은 도무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염치없지만 아이들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스무 필의 기마는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성도를 향해 힘차게 달렸다.
조홍의 시선은 이제 창문가에 있는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이미 사정을 알고 울먹이는 두 사내아이와는 달리 상아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말했다.
"홍 아저씨. 아빠는 나쁜 사람들을 혼내주러 가는 거죠?"
조홍은 짧게 대답했다.
"그래."
상아는 신이 난 얼굴로 침울한 오라비들에게 으스대었다.
"내 말이 맞지? 아빠가 어제 나쁜 사람들을 혼내주고 돌아온다고 약속했는걸? 어라. 그러면 아빠도 홍 아저씨처럼 협객이 되는 거야?"
조홍은 상아에게 들리지 않도록 홀로 조용히 읊조렸다.
"…상아야 네 아버지는 이미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대협이란다."
염제가 사천 정도맹지부를 직접 불태워버렸다는 소식이 들려온 건 그로부터 3일이 지난 후였다.
염제를 막기 위해 모인 정도맹의 시체 역시 그곳에서 함께 태워졌다는 소식도 함께였다.
비록 신교의 분노를 막지는 못했지만,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누구 한 명도 포기하지 않고 싸웠다 했다.
그럼에도 사천은 천산신교의 손에 떨어졌다.
제의 분노를 감당할 방법도 없으면서 무엇을 위한 무림령이었단 말인가?
조홍은 정도맹을 떠난 후 손대지 않던 담뱃대를 물었다.
그날 밤 조홍은 자신의 검을 들고 한 씨 무가의 정원에서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협이란 무엇인지, 협객이란 무엇이지.
천중일협이라 불리는 자신이 사실 얼마나 한심한 사내였는지.
수많은 자책과 고뇌가 담긴 칼끝이 무거웠다.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상아만이 정원의 그네에 앉아 조홍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조홍의 곁에서 머물던 소녀의 눈이 사르르 감겼다.
조홍은 그네 위에서 고개를 꾸벅거리며 잠이든 상아를 안아 방으로 옮겨주었다.
방안에는 울다 지친 사내아이들이 먼저 잠이 들어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말없이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협의를 찾았다.
그렇게 밤이 저물었다.
* * *
계절이 한번 바뀌었을 때 신교가 선포했다.
-원수의 핏줄과는 같은 하늘 아래서 살아갈 수 없다.
그동안 장원을 관리하고 아이들을 돌보며 지내던 조홍에게 성도에 있던 청로의 후배가 가져온 소식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신교는 그들의 율법대로 사천에 남아있는 정도맹 소속의 무가들을 완전히 제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신교는 오래전부터 그들에게 적의를 가진 원수는 물론 원수의 핏줄들을 살려두지 않았다.
그래도 조홍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혹시나 염제께서 일말의 자비를 베푸실까 기대했다.
"너무 걱정 말거라 얘들아. 염제께서는 의로운 사람이다. 무고한 너희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으실 거야."
두 사내아이에게는 그리 일렀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상아에게겐 설명하기 너무 잔인한 이야기라 두 오라비가 알아서 모른 척해주었다.
아이들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척했지만, 조홍은 초조하기 그지없는 마음으로 다시 며칠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성도의 정도맹 소속 무가들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얼굴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조홍은 한 가장의 안채에서 소식과 함께 조홍을 한 가장에서 데려가기 위해 온 두 협객과 마주 앉아 있었다.
팔다리가 통나무만 한 거한의 사내는 조홍보다 두어 살 나이가 많은 여대였고, 허름한 도복을 입은 사내는 청송의 제자인 강중이었다.
두 사람 모두 조홍이 다시 야협이 되고 난 후 줄곧 함께 다닌 동료이자 전우였다.
오늘이야말로 기필코 조홍을 청로로 데려가겠다고 다짐한 여대가 곧바로 말했다.
"너 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야."
독각 여대.
저 두꺼운 다리로 지독한 각법을 사용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미 몇 번이나 거절당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조홍을 찾아온 사람 중 하나였다.
그들은 다시 조홍을 설득했다.
어째서 야협인 네가 정도맹과 신교의 일에 끼어드냐고, 특히 네가 하려는 일이 칠중염제에게 저지르는 반역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천중일협이라 칭송받는 대협객이 손가락질받는 꼴을 두고 볼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요지였다.
"남이 나를 어떻게 부르건 상관하지 않아."
"멍청한 놈!"
흥분한 여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분노한 그의 목소리가 방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네가 진정한 협객이라 생각하고 따랐다. 그런데 이제 보니 무림의 정치놀음에 놀아나는 얼간이였군!"
그리고는 홀연히 떠나 버렸다.
강중이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이미 사라진 후였다.
대문파의 제자임에도 사문을 등지고 야협이 된 강중은 조홍이 가장 아끼는 후배였다.
그는 씁쓸한 얼굴을 한 조홍을 향해 애써 위로의 말을 건넸다.
"염려 마세요. 조 선배님. 여대 형님이 워낙 불같으시지 않습니까? 곧 화를 풀고 다시 올 겁니다."
"걱정하지 않아. 나도 여형의 성격을 알고 있네. 하지만 여형도 자네도 이제 나를 찾아올 필요는 없어."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조 선배님. 아직 강호에 선배님이 할 일이 많습니다. 이 후배가 돕게 해주십시오."
"내가 아니라도 자네와 여형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이지. 강중. 자네는 훌륭한 협객이야."
"군자도에 비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선배님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각자의 협의가 있는 법이야. 자네의 협의를 행하게. 그거면 충분해."
"청로의 형제들이 선배님이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발 그들을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조홍은 강중의 간절한 부탁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검지로 창가를 가리켰다.
강중의 시선이 그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그곳엔 창가 위로 내밀고있던 작은 머리 세 개가 강중의 시선에 쏙 하고 밑으로 들어간다.
아이들이 있는지 몰랐던 강중이 깜짝 놀라 물었다.
"저 아이들은…?"
"강중. 자네의 협의는 무엇인가?"
대답 대신 돌아온 질문에 강중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 고민을 하던 그가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제게 선배님의 가르침이 필요한 이유이지요."
"그러면 내가 자네의 선배로서 알려주겠네."
조홍은 다시 빼꼼 눈을 내미는 아이들을 보며 씩 웃었다.
"저 아이들이 내 협의일세. 강중. 협의란 거창한 게 아니야. 자식을 위하는 부모의 마음도, 아무런 인연이 없는 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마음도 똑같은 협일세. 무엇이 더 위대하고, 더 하찮은지 구분할 수 없어. 강중. 내 협의는 저 아이들일세. 그리고 강호의 모든 이들이 외면한 아이들이기도 하네. 내가 직접 염제를 뵐 걸세. 그리고 강호로부터 외면받은 이들을 위해 감히 청하겠네."
"대협!"
"그래. 대협. 나는 사람들이 나를 불러준 거창한 이름답게 행동할 거야."
조홍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부탁했다.
"자네가 내 협의를 지켜주겠나? 내가 떠나면 남게 될 아이들을 부탁하네."
강중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윽고 그는 무릎을 꿇고 조홍에게 절을 올린 후 그러겠노라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