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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제귀환록-32화 (32/282)

32화

상아와 적화는 숨을 삼켰다.

어떻게 말을 해보려 했지만 끝내 입 밖에 꺼내지 못했던 진실을, 그가 알아채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들은 더 긴장해야 했다.

남궁적이 아직 알지 못하는 더 불편한 진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언젠가, 아니 곧 남궁적이 알아버린다면, 그녀들은 더없이 큰 죄를 저지른 기분이 될 것이다.

두 사람 중 먼저 용기를 낸 것은 적화였다.

"할아버님, 저기."

그리고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씁쓸한 눈으로 입을 연 남궁적에 의해 그녀의 용기는 아무 소용도 없게 되었다.

"천곽이 강을 죽였더냐."

이미 남궁적은 조홍의 기억을 통해 이미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그렇구나. 결국, 그리되었구나."

-나와 천곽 사이의 일에 끼어들지 말고 너희는 속히 사천을 떠나라.

분명 기억 속 단리강은 그리 말했었다.

조홍과 백팔 인의 협객이 목숨을 바쳐 막아선 것은 신교의 무자비한 살육이었지 정도맹과의 전쟁 자체는 아니었다.

그리고 조홍은 무림 두 거인들의 전쟁이 끝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칠제라 칭송받는 천하의 단리강이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면 누구에 의해서였을까.

칠제의 행보를 막아서면 그것은 무림의 반역이다.

그럼에도 신교가 의지를 꺾고 다시 평화가 찾아 왔다는 것은, 반역이 아닌 칠제가 단리강을 막아섰다는 것을 의미했다.

무림의 칠제에게 죽음을 고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칠제만이 가능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의 강호는 아직도 ‘칠제의 시대’라 불리지 못했을 것이다.

두 칠제가 서로의 뜻을 꺾기 위해 검을 들었다면, 그들의 승패에 따라 다른 한쪽은 승복할 수밖에 없다.

승자가 누구든 그의 뜻이 칠제의 뜻이 되었을 터이니.

‘하지만, 그리 했어야만 했는가.’

천곽. 자네는 꼭 검을 들어 단리강을 막아서야만 했나?

강. 천곽이 어떤 친구인 줄 알면서 어찌 고집을 꺾지 않았는가.

무림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것도 양보하지 않는 사내.

제 혈족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하찮게 생각하던 사내.

두 사내는 결국 누구도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음이라.

남궁적은 두 벗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조홍의 기억 속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직감하고 있었으나, 그 역시 두려워 모르기를 바랐던 결과였다.

침묵을 지키는 남궁적에 상아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말씀드리려 하였으나, 어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지금까지 숨기게 되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내가 슬퍼할까 걱정해주었느냐."

"저는…."

"일어나거라. 너희가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니다."

두 아이가 보기에 남궁적은 호통을 치지도, 실의에 빠지지도 않았다.

예상외로 담담한 남궁적의 모습에 그녀들은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그때, 먼저 배에서 내린 재희가 아직 내리지 않은 세 사람을 향해 외쳤다.

"안 내려오고 뭐 하십니까~! 여기 선장이 직접 객잔으로 안내해 주겠다고 하니 서두르자고요!"

저 눈치도 없는 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재희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상아는 살쾡이 같은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남궁적은 껄껄 웃으며 둘을 재촉했다.

"재희의 말이 맞다. 선장도 바쁠 터이니 어서 내려가자."

뒷짐을 쥔 남궁적이 먼저 배에서 내렸다.

상아와 적화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허겁지겁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여인의 눈동자는 무심히 걷는 남궁적의 등을 향했다.

그녀들에게 보이지 않는 남궁적의 얼굴은, 슬픔도 실의도 아닌 깊은 후회에 절여져 있었다.

만약,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면.

어쩌면 의로웠던 협객들도, 단리강도 죽지 않았을지도.

‘내가, 그 날. 내가 만약 도망치지 않고 자네들의 곁에 머물렀다면 말일세. 강.’

자네들은 서로 투닥거리다 내게 물었겠지.

누가 더 옳은 말을 하고 있냐고.

그리고 남궁적은 대답했을 것이다.

-술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 둘 다 입이나 다물었으면 좋겠다.

‘그랬다면 우리가 오래전 청년이었던 시절처럼, 자네들은 한껏 웃어버리고 넘겨주었을까.’

잘 모르겠다.

세월이 벗들을 얼마나 바꿔 놓았을지 몰랐으므로.

앞에서 재희와 선장이 근래의 강호에 대해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며 조잘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그 옆에서 목석같이 묵묵히 걷는 진삼의 모습까지.

나란히 걷는 세 사람의 뒷모습에서, 남궁적은 추억의 편린을 엿본다.

이윽고 세 사람 가운데서 유독 입을 쉬지 않는 청년을 보며, 그의 얼굴은 슬픔에 잠겼다.

* * *

와장창!

문을 열자마자 이 층에서 남자가 떨어져 내렸다.

직접 소개한 객잔에 입장부터 험한 꼴을 보이자 곤란해진 선장이 볼을 긁적였다.

"아하하. 원래 대대로 사천무림의 무림인들을 주로 상대하는 객잔이라, 장강에서 배로 먹고사는 저희 집안도 무림인들과 친분을 쌓아두려 애용하던 객잔입니다. 다소 험악하긴 하나 그만큼 무림인들의 신뢰를 받는 곳이니…."

남궁적이 애써 변호하려는 선장을 지나치며 말했다.

"평범한 무림의 객잔이로군."

휴,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그가 대수롭지 않아 보이자 안도한 선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남자가 떨어진 객잔의 이 층에서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

"어~? 수달 놈 아니냐?"

친구라 말했던 객잔의 주인이었다.

선장은 그를 향해 삿대질하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야 인마! 기껏 손님들을 데려왔더니 대낮부터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이라니, 늘 하던 짓이지. 손님? 주위에 계신 분들인가?"

"말조심해라. 여기 계신 협객님들은 아주 귀한 분들이니까."

"헹! 내 객잔에서는 칼 찬 손님이랑 안 찬 손님, 단 두 종류로만 구분한다. 보아하니 칼 찬 손님이군! 거기 떨어진 놈 보이시오, 손님들? 당신들도 내 객잔에서 행패를 부리면 저 자식처럼 될 거요. 아, 거기 뒤에 여협님들은 좀 봐주겠지만."

재희가 흥미로운 눈으로 만신창이가 된 사내와 객잔의 주위를 번갈아 보고는 말했다.

"제법 솜씨가 괜찮은 편이신가 봅니다?"

그가 호탕하게 웃어 재끼고는 약간은 씁쓸한 어조로 대답하길.

"우리 객잔은 원래 객잔이기 전에 무관이었소. 망했지만. 그래도 한 40년도 전에는 사천에서 이름 좀 날리던 무관이었지. 자신 있으면 소란을 일으켜보시오."

"제가 소란을 일으킬 이유가 있습니까? 사연 많고 재밌는 새 친구를 사귀게 되었는데, 하하!"

객잔 주인은 재희의 대답에 놀란 눈을 하더니 이 층 난관을 훌쩍 뛰어넘어 내려왔다.

쓰러진 사내놈을 꺼지라고 한번 걷어찬 그는 재희를 향해 넙죽 손을 내밀었다.

옷에 손을 쓱쓱 문질러 닦은 재희가 그의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이재희라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무림객잔의 호걸 주인 나으리!"

"무림객잔의 호걸? 객잔의 산적이란 말이요, 아니면 사내답단 말이요? 여튼 내 들었던 말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소리군. 크크. 나도 반갑소. 육장환이라 하외다."

"육 형이셨군요. 이리 멋진 객잔을 가지셨으니 제가 형으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이거 썩 괜찮은 젊은이로군. 좋아! 새로 사귄 동생 앞으로 내 오늘 저녁에 홍주 한 병 가져다주지."

"와하하! 동생이 호의를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만난 지 일각도 되지 않아 육 객주와 형, 동생 거리고 있는 재희를 본 적화가 기함을 토해내었다.

그녀가 상아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이 공자의 친화력이 굉장하네요."

상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소가주의 몇 안 되는 장점이죠."

그러자 곧바로 재희가 상아를 향해 방긋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사저! 역시 저를 알아주시는 건 사저뿐이네요. 하하하."

그에 몹시 떨떠름한 얼굴이 된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쓸데없이 귀도 밝고요."

키득키득. 소리죽여 웃던 적화는 앞에서 그런 이들을 흐뭇한 얼굴로 보고 있던 적과 눈이 마주쳤다.

적화는 화들짝 놀라며 작게 움츠렸다.

남궁적에게 죄를 지은 것처럼 심장이 콩닥거렸다.

하지만 그녀를 탓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던 적은 일행들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출출하지 않으냐?"

그렇지 않아도 다들 이른 아침부터 배에서 내린 참이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였다.

적은 육 주인에게 아침 식사를 부탁했다.

그러자 육장환은 단호히 선포했다.

"우리 객잔엔 만두와 소면. 그리고 사천식 매운탕밖에 제공하지 않소. 다른 걸 드시려면 나가서 드셔야 할 거요."

"그거면 충분하네. 혹시 술은 있는가?"

"당연한 소릴. 객잔에 술이 없으면 되나. 술은 사천 각지의 온 명주들이 준비되어 있소."

"더할 나위 없군. 주인이 좋은 거로 하나 추천해주게나."

"요즘 수정방이 물이 올랐지. 그걸로 하나 내오리다."

고개를 끄덕인 남궁적은 시간을 내어 일행들을 선장에게 감사를 표했다.

"좋은 객잔을 소개해주어 고맙소이다 선장."

"저야말로 의인들을 안내하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노야."

적은 먼저 객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두 여인은 서둘러 남궁적의 뒤를 따라 객잔 안으로 따라갔다.

어쩐지 심각해 보이는 상아와 적화의 분위기에 코를 긁적이던 재희도 그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식사 준비를 위해 움직이려던 육장환을 선장이 붙잡았다.

그리고는 들어간 손님들의 정체에 대해 조용히 일러주었다.

육장환의 안색이 굳었다.

"어지러운 시국에 곤란한 손님들을 모셔왔군."

"그래도 의로운 뜻으로 사천을 위해 나서주신 분들이라네. 부탁함세."

"원래 내 객잔엔 곤란한 손님들만 찾아오니 상관없어. 하지만 어렵구만. 지금은 성도가 너무 소란스러워. 자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자네 동생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거야. 요즘 맹이가 협객이 되고 싶다고 입에 달고 다니지 않았나?"

"협객."

육장환은 애매하고 어려운 단어를 곱씹었다.

무림의 길에서 반쯤 벗어난 그의 집안에서 다시 무림을 꿈꾸는 동생을, 어찌해야 하나 곤란해하던 참이었다.

선장은 아버지의 대부터 객잔을 이용하면서 죽마고우로 지낸 친우에게 말했다.

"자네 어린 시절처럼 말이야."

육장환은 말없이 돌아섰다.

선장은 불안한 눈으로 다시 그를 불렀다.

"친구!"

"손님들이 진짜 협객들이라면 네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러나 주방으로 향하는 육장환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그와 어린 동생 역시, 오래전 사천을 위해 목숨을 바친 대 협객들의 은혜를 입은 이들 중 하나였다.

일행 중 유독 피부가 새하얗던 여인.

친우가 일러준 대로 그녀가 정도맹의 척마대주 한상아라면 그에게도 당연히 짊어져야 할 의무가 있었다.

정확히는 빚이었다.

항상 걸걸한 성격으로 객잔의 자유분방한 손님들을 휘어잡던 그는 평소와 달리 복잡한 심경이 되어 식사를 준비했다.

잠시 후 육장환이 직접 만든 소면과 만두에 술을 곁들인 간단한 식사를 마친 남궁적은 일행들에게 일렀다.

"옷을 갈아입고 다시 모여 바로 움직이자꾸나. 부지런히 정보를 모아야지."

재희도 거들었다.

"당연하죠. 선배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저와 가장 친한 하 호위가 함께라니. 살면서 이런 기회가 있을 줄이야. 역시 사저를 쫓아 사천으로 오길 잘했어. 그렇지 하 호위?"

그렇지않아도 배에서 내리기 전부터 심기가 불편해 보이던 진삼의 얼굴이 더 구겨졌다.

결국, 사건에 제대로 휘말려 버렸군.

낙담하는 진삼의 곁으로 점소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열 두어 살의 어린 점소이가 능숙한 손짓으로 차곡차곡 빈 접시를 쌓으며 말했다.

"다 드셨네요! 접시 치워드리겠습니다."

"꼬맹이. 너 이름이 뭐냐."

"네? 아. 유, 육맹이라고 합니다."

진삼은 피곤한 얼굴로 점소이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전했다.

"그래 맹아. 너는 이런 어른이 되지 말거라. 특히 호위무사 같은 거."

"예? 예, 옙."

뜬금없는 소리에 당황하는 어린 점소이의 모습을 두고 남궁적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일행들도 금방 접시를 주방에 갖다 놓은 점소이의 안내를 받고 배정받은 방에 짐을 풀어놓고 옷을 갈아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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