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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제귀환록-33화 (33/282)

33화

죽립을 눌러쓴 다섯 명의 무림인.

일행들과 함께 객잔을 나선 남궁적은 성도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거리는 사천의 중심지답게 인파로 가득했다.

물건을 팔려고 고함을 지르는 상인들, 물건을 사려는 행인의 흥정하는 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장터에 내놓은 온갖 가축들의 울음소리는 덤이었다.

성도의 사람들에겐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었으나, 반백 년을 넘어 성도를 찾은 남궁적에게는 아니었다.

그 시절 이곳은 천축과 서역에서 북적에게 잡혀 온 노예들이 밧줄에 묶여 줄지어 걷고 있었다.

사람이 모이는 곳마다 허리에 곡도를 차고 긴 창을 쥔 채 경계를 서고 있던 북적의 병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 산 아래를 내려와 본 도시의 풍경에도 느꼈지만 남궁적에게는 오늘날 강호의 모습이 무척 낯설었다.

과거 그가 성도와 같은 큰 도시에서 칼을 차고 길을 걸을 때면 언제나 북적이나 동적의 병사들에게 붙잡혀 검문이라는 이름의 시비가 걸리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에게 신경 쓰는 이 하나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늙은 검객이겠거니, 무심히 지나친다.

가끔 호객하러 달라붙는 호객꾼들의 손짓에 흠칫 신경을 곤두세웠으나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신가요?"

함께 걷는 내내 계속 남궁적의 기분을 살피던 상아가 죽립을 살짝 들어 올리며 걱정해주었다.

상아의 배려가 고마운 남궁적은 별일 아니란 듯이 말했다.

"옛 성도의 모습과 달라 낯설어 보이니 조금 싱숭생숭하구나."

한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조잘거리던 재희가 남궁적에게 관심을 보였다.

"어라, 성도에 오신 적이 있습니까?"

적화는 남궁적을 남궁의 큰 어른이라 소개했었다.

온 중원을 떠돌아다니는 야협이 아니고서야 안휘에 있는 남궁의 사람이 사천까지 올 일은 무척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재희는 이젠 아주 소수만이 기억하는 남궁의 옛이야기를 꺼냈다.

"아! 어르신께선 남궁의 천검단이셨군요! 어렸을 적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북적의 시대 이전엔 남궁의 천검단이 중원을 돌아다니며 협의를 실천하고 다녔다지요?"

적과 적화는 놀란 눈으로 재희를 바라보았다.

재희가 아주 오래된 남궁의 과거를 알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까닭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적이 기억하는 남궁의 마지막 천검단은, 가주였던 아버지와 함께 소림이 있는 숭산에서 북적과 싸우다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적은, 그런 어두운 사연을 굳이 꺼내고 싶지 않았다.

"나도 천검단이 되고 싶었지. 그러나 실력이 부족하여 천검단에 들어가지 못했단다."

정확히는 남궁적은 어린 시절 검을 제대로 배우지 않아서였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중원을 쏘다니는 천검단의 힘든 임무를 맡기엔 너무 어리기도 했고.

그러나 적의 말 그대로 자질이 부족해서였다고 이해한 재희는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저기, 그게…. 제가 괜한 말을 했나요?"

듣고 있던 적화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니거든요! 이 공자가 생각한 것처럼 할아버님의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에요!"

"예?"

"할아버님께서 활동하실 땐 남궁은 무척 어려운 시절이었단 말예요. 세가의 사정 때문에 천검단을 운영하지 못했던 것뿐이랍니다."

"아하. 그렇군요. 하하. 제가 오해를 할 뻔했지 뭡니까."

적화의 옹호에 오히려 남궁적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자질이 부족해서가 맞다. 내 어찌 천검단의 영웅들만 했겠느냐."

"앗. 물론 천검단의 영웅들도 훌륭하셨지만…."

할아버님은 무림을 구한 칠제시잖아요.

중원을 구했잖아요!

남궁적에게 억울한 눈빛을 쏟아내는 적화였다.

그런 적화의 반응에 적은 껄껄 웃었다.

"내 부족하여 숭산에서 천검단과 함께하지는 못했으나 북적에게서 도망치지는 않았다. 성도도 그 시절에 왔었단다."

어째 사저와 남궁소저가 극진히 모시더니 북적에게 항거한 영웅이셨구나!

이제야 남궁적에 대한 두 여인의 태도를 납득한 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존경심을 가득 담아 남궁적에 포권을 취했다.

"노 선배님께선 무림을 구한 영웅이셨군요. 늦게나마 이 후배가 영웅께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감사까지야. 나는 수많은 이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분들 모두가 중원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지요."

"오호라. 생각보다 제대로 된 청년이었군."

"생각보다라니요. 섭섭합니다. 선배님."

"껄껄, 섭섭해도 어쩌겠나. 상아와 적화에게 미운털이 박힌 네 잘못이지 않으냐."

"미운털이라뇨.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쵸 사저?"

상아는 곧바로 질색했으나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궁적이 염제가 죽었다는 소식에 상심하고 계실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재희로 인해 조금이나마 웃게 되었으니 이번엔 넘어가 주기로 마음먹었다.

"미운털까지는 아닙니다."

"오오. 우리 사저께서 웬일로 너그러우신지. 하핫.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의 남궁엔 천검단이 없나요? 근자에 한 번도 못 들어 본 거 같네요."

"어어어어, 없긴요!"

진심으로 궁금해한 재희의 의문에 발끈한 적화가 소리쳤다.

있긴 있었다.

단지 옛 남궁의 검법을 모두 소실하여 중원을 돌아다니며 협행을 펼칠만한 검수가 부족했기에, 안휘에 머물고 있었지만.

"지금은 준비가 되지 않아 이름만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조만간 천검단도 옛 명성을 되찾게 될 거에요."

남궁에 도제가 돌아오셨으니, 남궁의 검법도 되찾게 되리라.

의기양양한 적화에 재희는 기어이 초를 쳤다.

"남궁소저. 어떤 준비가 되지 않았단 말씀이십니까?"

"당신, 정말 최악이네요."

"예?"

"흥!"

아무래도 적화에게 미운털이 박힌 게 확실한 재희였다.

애초에 일방적인 파혼통보부터 남궁적에 대한 태도까지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적화였다.

턱을 긁적인 재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 동안 성도를 돌아다녔다.

그렇다고 성도의 분위기를 살피는 것을 마냥 게을리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딱히 소득이라 할만한 성과는 없었다.

성도 시내를 돌아다니다 일행들은 선착장이 있는 강가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재희가 말했다.

"무림인이라면 성도에 반드시 들려야 할 명소가 있다는 걸 아십니까?"

토끼처럼 귀를 쫑긋거린 적화가 관심을 보였다.

"명소? 아미파나 청성파를 말하는 건가요?"

"사천의 명문들도 명소이긴 하지요. 하지만 그보다 더 의미 있는 곳이 바로 요 근처에 있습니다."

"흠. 아! 무명터!"

"하하. 역시 남궁의 후예께선 잘 알고 계시는군요. 강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바로 그 무명터가 나옵니다."

성도의 명소 무명터는 칠제의 일대기가 시작된 곳으로 무림의 역사에서 의미가 깊은 곳이었다.

두 명의 제. 바로 도제 남궁적과 염제 단리강이 처음 만나게 되었다는 장소였으니, 적화의 고개는 저절로 남궁적에게 향했다.

초롱초롱한 그녀의 눈빛에 남궁적은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요! 당장 가요!"

두 볼이 상기된 적화가 재촉했다.

재희의 말대로 강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자 작은 어선 몇 척만 덩그러니 쉬고 있는 작은 나루터가 보였다.

그곳엔 일행들처럼 칠제의 발자취를 찾아온 무림인들이 여운을 만끽하고 있었다.

남궁적은 강 한 켠에 발을 담그고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서 나루터를 바라보았다.

남궁적이 묻기를.

"무명터라. 과거엔 그저 부둣가라 불렀던 거 같은데. 이름이 생겼구나."

사천에서 나고 자란 상아가 이곳에 이름이 붙은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염제께서 말씀하시길, 처음엔 벗과 추억이 있는 이곳에 특별한 이름을 붙이고 싶다 하셨으나, 낯간지러운 것을 싫어하는 벗을 위해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재희가 덧붙여 말했다.

"부끄러움이 많은 벗이 이곳을 다시 찾았을 때 염제 당신을 원망하지 않기를 바란다면서요. 하하. 그런데 또 웃기지 않습니까? 무림인들은 이름을 붙이지 않겠다는 염제의 말씀을 받들어 이곳에 ‘무명터’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말입니다."

이곳에 얽힌 작은 일화를 들은 남궁적은 가슴이 먹먹해져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

오래전 친우가 남겨둔 배려는 애써 슬픔을 묻어두었던 그의 마음속 둑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렸다.

눈치 없는 재희는 이제 볼 만큼 봤다고 여겼는지 일행들에게 말했다.

"자. 관광은 이쯤하고. 어서 반 무림맹인가 하는 놈들에 대해 조사하러 갑시다!"

상아는 즉시 재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빡!

"악! 사저, 다리에 감각이 없습니다."

"입 다무세요."

"예?"

그녀가 눈짓으로 가리키는 곳엔 느티나무 그늘 아래 서 뒷짐을 쥔 채 하염없이 강가를 바라보고 있는 남궁적의 뒷모습이 있었다.

왠지 가라앉은 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남궁적은 양해를 구했다.

"곧 따라가마. 잠시 혼자 있고 싶구나."

상아와 적화가 서슬 퍼런 눈으로 재희에게 경고를 보냈다.

또 눈치 없는 짓거리를 했다간 나루터를 찾는 낚시꾼들의 떡밥이 될 거라 직감한 재희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는 왔던 길을 한 번 더 돌아보겠습니다."

일행들은 대답 없는 남궁적을 두고 떠나갔다.

그들이 자리를 뜨기 전 호위무사 진삼이 문득 남궁적을 돌아보았다.

‘북적에게 항거한 남궁의 검객이라.’

그가 알기로는 그러한 남궁의 검객 중 살아남은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남궁의 마지막 협객.’

의심은 점점 더 깊어져 간다.

* * *

50년 전에는 서역과 천축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온갖 전리품과 노예들을 싣기 위해 커다란 선박이 한가득하던 부둣가였다.

남궁적은, 바로 이곳에서 남쪽에서 올라온 청년을 처음 만났다.

‘강. 자네와 내 추억인 줄 알았건만, 이제는 일곱 중 둘이 아니라 천하의 강호들이 기억하는 곳이 되었구나.’

남궁적은 그날의 추억에 사로잡힌다.

-이보시오, 나는 왜 배에 탈 수 없는 거요?

-어이, 너. 천산 사람이지? 부처도 모르는 것들은 내 배에 탈 수 없다.

-뭐요? 나도 부처가 누구인지 압니다. 아니, 내가 아는 그분은 사람을 이리 차별하라 가르치진 않은 거 같소만?

-하여튼 안돼. 불길한 놈들. 썩 꺼져!

남궁적이 강호에 남아있던 시절엔 천산의 일족이란 불을 숭배한다 하여 이교도 취급을 받았다.

단리강은 그런 신교의 인식에 대하여, 함께 북적에게 탄압받는 처지에 굳이 다시 급을 나누는 꼴이 우습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중원의 모두를 원망하지 않았다.

-이보시오. 나도 부처는 믿지 않소만. 배에 탈 수 없소?

허리에 검을 차고 사나운 기세를 뿜어내는 남궁적의 모습에 지레 겁을 먹은 선장은 차마 남궁적의 승선을 거부하지 않았다.

적은 그저, 앞의 소란으로 인해 승선이 늦어져 짜증이 났을 뿐이었으나 단리강은 남궁적 덕분에 배에 오르게 되었다.

이 작은 호의 아닌 호의가 단리강이 배 위에서 남궁적에게 끈질기게 달라붙던 이유였다.

-나는 그래도 중원사람들을 도저히 미워할 수 없네. 자네처럼 좋은 사람들이 더러 있잖은가? 하하! 도와줘서 고맙네. 정말 고마워! 이 배를 타지 못했다면 저 먼 항주까지 걸어갈 뻔했지 뭐야?

-나는 도와준 적 없다.

-쑥스러워하긴. 뭐, 그것도 사내답군. 하하하!

-천산 사람들은 입을 한시라도 쉬지 않으면 안 되는 병이라도 걸려있나?

-아닐걸? 내 아버지도 자네랑 똑같은 말을 했거든.

‘지겹다 여겼던 자네의 그 실없는 소리도, 이제는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구나.’

"이제는."

남궁적은, 작은 나룻배 하나가 둥둥 떠 있던 자리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던 천산의 청년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구나."

고개 숙인 남궁적은 부둣가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그렇게 한참 동안 벗을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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