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한 무리의 사내들이 성도의 대로를 가로질렀다.
검, 도, 작살을 닮은 창까지 각자의 애병을 몸에 찬 그들은 모두가 성도에 있는 문파 출신의 무림인이었다.
장사하기에 여념이 없던 상인들과 대로를 걷던 사람들은 바짝 벽으로 붙어 그들이 지나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사람들의 잔뜩 경계 어린 시선이 썩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위풍당당한 기세로 걸어간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어느 객잔의 앞.
무리의 대장이자 사천 용검파의 19대 문주 중산은 팔짱을 끼고 객잔의 대문을 올려다보았다.
육가객잔.
10년 전 정도맹과 신교의 전쟁 이후 성도 최고의 무림객잔으로 명성이 자자한 곳이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정대인께서는 왜 육장환에게 집착할까요?"
소봉파의 진자기는 겨우 객잔의 주인을 포섭하기 위해 정성을 들여야 하는 이유가 납득되지 않았다.
중산은 진자기처럼 불만을 가진 동료들이 몇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릇 대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한 법. 육가객잔의 육장환은 자네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큰 명분을 가진 사람일세."
"객잔 주인 따위가 그리 대단한 사람입니까?"
진자기의 사문인 소봉파는 성도가 아닌 사천 변방에 뿌리를 둔 중소문파였다.
쯧, 이런 보잘것없는 인간도 아쉬운 현실에 짧게 혀를 찬 중산은 육가객잔의 역사에 대해 알려주었다.
"비록 지금은 객잔 주인이지만 육장환은 북적에 항거한 육가검문의 후예라네. 그의 조부는 숭산에서 북적의 장수를 베었지. 더구나 그의 아비인 육상환은 십 년 전 신교와 정도맹의 전쟁에 참여한 협객이었어."
때문에 육가 또한 사천혈겁 때 신교의 손에 멸문의 위기를 맞이해야 했다.
육가검문이 객잔으로 남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으니, 육가객잔의 두 형제 역시 군자도와 백칠인의 협객이 살려낸 사천혈겁의 생존자였다.
그는 선대의 영광과 올곧은 인품으로 사천혈겁에 살아남은 명문의 후예들 사이에서 중심이 되었으니, 그의 지지를 얻는 것은 곧 옛 정도맹 소속이었던 사천 명문 문파들의 지지를 얻는 것과 같았다.
"육장환을 포섭한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사천무림맹의 결성을 선포할 수 있는 명분을 얻는 것과 다름없네. 그러니 정 대인께서도 공을 들이시는 게지."
약초상 정 대인을 비롯한 사천의 이름 있는 거상들이 자금지원을 약속하였고, 또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잠룡이 사천무림맹의 힘이 되어주기로 약속했다.
반정도맹 무리, 아니 스스로 사천무림맹이라 일컫는 그들이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명분과 민심이었다.
"헌데, 보통 고집이 아니란 말이지. 육장환이라는 자가."
벌써 여섯 번째 방문이었다,
수십 관의 금덩이도, 육가검문의 옛 성세를 되찾아 준다는 약속도 육장환은 모조리 거절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오. 육 주인. 끝내 고집을 부린다면 우리도 다른 방법이 없소.’
굳게 마음먹은 중산은 객잔 대문의 문턱을 밟았다.
객잔 안으로 들어온 중산의 얼굴을 확인한 육맹이 급히 주방으로 가 육장환을 불렀다.
내일 식사에 쓸 소면을 반죽하다 말고 나온 육장환은 식당을 거의 통째로 차지하고 앉은 중산의 무리에 눈을 부라렸다.
그가 반죽용 목밀대를 들이밀며 소리 질렀다.
"중산! 여기가 어디라고 또 기어 들어왔느냐! 썩 꺼져라. 불한당 놈들아!"
그의 우렁찬 고함에도 중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뻔뻔한 얼굴로 응답했다.
"장사 안 하시오? 우린 그저 식사를 할까 해서 왔소만."
"식사? 우리 객잔엔 네놈들에게 내어줄 물 한잔도 없다. 나가!"
"거 섭섭하게 굴지 맙시다. 우린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온 죽마고우가 아니오?"
"죽마고우 같은 소리 하네. 은인들의 이름을 팔아 재물과 권력이나 탐하는 놈들! 저번에 네놈들과 할 얘기는 없다고 일렀지. 진정 내 목밀대 맛을 봐야 얼씬도 안 할 셈이냐?"
"목밀대라. 허허. 그 옛날 육가검문의 협객들께서 사천의 명문 육가검문의 후예가 검이 아니라 한낱 나무 몽둥이나 들이미는 걸 안다면 통탄하실걸세! 내 육 동생의 바로 그 점이 아쉬워서 찾아온 게 아닌가? 이제 목밀대가 아니라 다시 검을 잡고 육가의 옛 명예를 되찾을 때가 되지 않았나."
"웃기는 소리. 네 놈이 찾아주지 않아도 육가의 명예는 잘 간직하고 있다. 잡소리 말고 당장 꺼져."
한편 이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으니, 미리 객잔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남궁적과 일행들이었다.
"이게 웬 떡?"
소면을 입에 구겨 넣던 재희가 눈을 깜빡였다.
상아가 입술 위에 손가락을 얹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남궁적도 술잔을 기울이다 무심한 척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맹아 뭐 하냐! 여기 중산 형님께서 간만에 들렀으니 주문받아야지."
육장환과는 말이 통하질 않자 맹이 에게로 표적을 돌린 중산이었다.
맹은 장환의 눈치를 보다 쭈뼛쭈뼛 중산이 앉은 탁자로 다가갔다.
주문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어디 보자. 자, 이 형님이 간만에 우리 맹이한테 용돈을 좀 줘야겠군."
그는 전낭에서 은자를 한주먹 꺼내 맹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며 말했다.
"어어, 너무 부담 갖지 말거라. 동네 형이 주는 용돈이니 편히 받아. 듣자 하니 협객이 되고 싶다던데. 맹아, 하루종일 접시나 나르고 있으면 언제 협객이 되겠느냐. 이 중산이 도와주마. 언제든 용검파로 오거라. 네가 온다면 용검파의 연무장을 내어주마."
"저, 저는 괜찮아요. 받지 않을래요."
"어허! 어른이 주면 받아야지. 자, 자 받아둬. 나중에 네가 협객이 되면 사천무림을 위해 검을 들어 갚아주면 된단다."
"뭐? 사천무림을 위해?"
성큼성큼 다가온 장환은 육맹의 손에서 은자를 뺏어 쾅하고 탁자 위로 찍어 눌렀다.
성난 호랑이처럼 사나운 눈빛이 중산을 잡아먹을 듯이 이글거렸다.
"네놈이 뭐라든 나, 그리고 백팔인의 의협들에게 은혜를 입은 내 형제들 모두 다시 무림에 발을 들이는 일은 없을 거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 경고를 무시한다면 사천무림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 것이다."
"후회할걸세 장환. 지금이야 자네가 선대의 명성을 빌어 고개를 뻣뻣이 들 수 있겠지만 곧 세상이 바뀔 거다. 그때는 아무도 자네들을 기억해 주지 않을 거야."
엄포를 놓은 중산은 객잔 안에 있는 다른 무림인들을 향해 말했다.
"들으시오 무림동도들. 내일 오시(오전 11시~ 오후 1시)에 성도 남문 앞에서 사천무림맹의 일원이 될 동도를 모집할 예정이오. 사천무림의 자립과 협의를 다시 세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이라면 누구든 환영이오."
감히 육가객잔 안에서 그들의 행사를 홍보한 행동은 육장환을 향한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당장이라도 목밀대를 들어 쳐죽일 기세를 뿜어내는 육장환.
중산은 그런 육장환의 기세에도 겁먹지 않고 힘껏 노려보고는 일당들과 함께 객잔을 나갔다.
장환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켠 채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노려보다 홱 고개를 돌렸다.
"후회는 개뿔!"
우당탕탕!
그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멀쩡한 의자를 냅다 후려 찼다.
꼴사납게 나뒹구는 의자가 그의 심경을 대변해주었다.
한차례 설전으로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식당은 저들끼리 속삭이는 소리에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중엔 당연히 재희가 있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일행들에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우리가 객잔 하나는 제대로 잡은 것 같습니다."
적화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사흘 동안 성도를 그렇게 돌아다녔는데도 찾지 못한 자들이 직접 찾아오다니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떠하긴. 내일 오시 남문 앞이라지 않습니까? 찾아가야죠."
"잠입! 잠입이로군요! 어떡해. 너무 설레요!"
"쉿! 남궁 소저.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앗. 죄송합니다!"
"목소리가 크다니까요."
진삼이 차게 식은 눈으로 두 사람의 바보짓을 쳐다보는 사이 상아가 돌연 목소리를 높여 육장환을 불렀다.
"육주인."
주방으로 돌아가려던 그가 상아를 바라보았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그쪽이랑 나눌 이야기가 없소."
상아는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일행들은 그제야 상아와 육장환이 같은 과거를 가진 동류라는 걸 기억해내고 숨을 삼켰다.
사천혈겁의 생존자들.
상아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한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육장환은 어째서인지 무림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말했고, 상아는 정도맹의 척마대주로서 온 무림에 이름을 떨치는 협객이 되어있었다.
상아는 대화를 거절한 육장환에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당신과 당신의 형제들의 신념이요. 그게 뭐죠?"
"소저께서 알 필요 없소. 당신은 하던 대로 하면 돼."
"이봐요!"
"소저."
육장환은 유난히 하얀 그녀의 얼굴을 가리켰다.
"객잔 안이든 밖이든 얼굴을 가리고 다니시오. 소저는 소저의 생각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오. 특히 이곳에서는."
말을 마친 육장환은 그대로 주방으로 사라졌다.
* * *
육가객잔을 나온 중산에게 진자기가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중산 대협. 저 오만방자한 놈을 그대로 둘 겁니까?"
"우리에 대한 적대감을 똑똑히 보았지 않나. 포섭할 수 없다면 무릎이라도 꿇려야지."
"그러면 동도들을 모아 밤새 객잔을 뒤집어 버릴까요?"
"멍청한 놈! 그랬다간 성도의 민심이 확 뒤집어질 거다. 내게 방법이 있으니 잠자코 기다리면 돼."
가진 거라곤 무림객잔이라는 허울만 좋은 삼류 객잔이 전부인 놈이다.
애초에 10년 전 사건으로 인해 성도에 청로가 없어져 협객들이 드나들기 시작하여 장사가 되는 객잔이 아닌가?
음식도 형편없고 시설도 낡아빠진 저 이 층짜리 객잔.
유일한 생계수단인 객잔을 쫄딱 망하게 한다면 제 놈도 별수 없겠지.
객잔이 망해 굶다 보면 제 발로 걸어와 무릎을 꿇겠지.
"정 대인께 가세."
* * *
당가타의 귀빈실.
중년 사내와 한 명의 노인이 차를 나누고 있었다.
한 모금 짧게 차에 입을 댄 노인이 말했다.
"용독술에 능한 고수를 빌려 달라?"
"예 장로님. 용검파의 중산이 요청해왔습니다. 곤란하시다면 내어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당가의 일 장로 당우경은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대외적으로 봉문 중이라 알려진 당가의 고수가 외부에서 활동하기엔 아직 너무 이르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용독술의 고수가 필요한가?"
"육가 객잔에 관한 건입니다. 육장환이라는 자의 실력이 만만치 않아 어쭙잖은 사람을 쓸 수 없다는군요."
"중요한 일이었군. 좋네. 내어주지."
"괜찮겠습니까?"
"당가를 위한 일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지."
"가주님의 허락은…."
"이보게 정순."
"예 장로님."
몸을 일으킨 당우경이 창문을 확 열어젖히자 황색 기와집이 빽빽이 들어선 당가타의 풍경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의 눈에 담긴 당가타는 먼 과거의 모습과 똑같았지만 어쩐지 생기를 잃은 모습이었다.
열여섯 개의 연무장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혈족들의 훈련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끊임없이 독과 약재를 가공하던 약재방의 굴뚝도 연기를 뿜지 않았다.
"자네가 천축에서 구해오는 약재 덕에 전대 가주께서 살아계실 수 있었네."
"당가의 일원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약재상 정순.
당가의 데릴사위인 그는 당가에서 운영하는 비밀 상단의 주인이었다.
그는 당가타에서 난 질 좋은 찻잎을 천축에 가져가 큰 이문을 남기고, 그 돈으로 다시 천축의 약재와 독초들을 구매해 당가의 창고를 채웠다.
정순은 봉문 중인 당가가 마련한 유일한 숨통이었다.
만약 중경 상단의 실질적인 주인이 사천당가라는 것이 알려진다면 당가는 무림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당우경은 그런 정순의 공로를 인정하여 데릴사위인 그를 당가의 직계혈족보다 대우해 주었다.
"당가는 절대 가족을 버리지 않네. 오늘날 자네가 보인 충의는 훗날 반드시 보답 받을 걸세."
당가가 다시 무림에 우뚝 서는 날, 당우경은 정순에게 사천의 비단거래를 모두 독점할 권리를 주기로 약속했다.
물론 그 역시 당가 소유의 상단으로 행해지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정순은 천하 대상단의 주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먼 과거에 당가의 이름을 건 상단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럼, 가주님의 허락은…."
"이리 하찮은 일에 가주님을 귀찮게 할 순 없잖은가."
정순은 아직 창밖을 보고 있는 당우경의 등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해했습니다. 장로님."
"명심하게. 자네는 당가의 일원이고, 우리가 하려는 일은 모두 당가를 위한 것이네."
"제가 감히 장로님을 의심하겠습니까?"
정순의 대답에 당우경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칠제의 그늘에서 온전히 벗어난 당가는, 영광을 되찾으리라.
모든 것은 당가를 위해.
구름 낀 하늘을 노려보는 그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