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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제귀환록-44화 (44/282)

44화

적화마저 떠난 식당엔 두 형제만 남았다.

"너도 올라가거라."

"형님은요?"

"난 그 까만 놈이 다시 수작을 부리러 오나 망을 봐야지."

"저도 같이할래요."

"너까지 밤을 새우면 누가 아침에 객잔 문을 열어."

"하지만…"

"오늘 밤은 내가 맡고, 내일 낮은 너에게 맡기마."

형의 자상한 설득에 고집을 접은 동생은 결국 터벅터벅 2층으로 향했다.

장환은 그런 맹이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거칠고 표현에 서툰 자신에겐 과분할 정도로 바르고 착한 아이였다.

객잔을 찾는 협객들을 만나며, 자연스레 협객을 꿈꾸게 된 아이.

맹이가 남궁의 여협과 같은 반듯한 무림세가에서 자랐다면 점소이 일 따윈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테지.

한참 밤낮없이 무공을 배우며, 훗날 강호를 주유할 자신의 모습을 꿈꿀 나이였다.

하지만 빌어먹게도 사연 많은 육가의 늦둥이로 태어난 것이 족쇄가 되었다.

장환도 여유가 있었다면 맹이를 무관에 보내 기초를 다지게 하고, 육가의 가전무공을 가르치고 싶었다.

그러나 하나뿐인 동생이 손을 보태야 할 만큼 육가객잔의 수입은 넉넉지 않았다.

주머니가 가벼운 야협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그마저도 반값을 받고 있었다.

더구나 이런 볼품없는 객잔이라도 기대고 있는 형제들이 많았다.

옛 무가의 자식들 중 번듯하게 자리 잡은 형제들도 있었으나 그렇지 못한 형제들도 있었다.

장환은 형편이 어려운 형제들을 못 본 척하지 못했다.

‘중산은 끈질긴 놈이야.’

어려서부터 심보가 고약한 놈이었다.

비무를 핑계로 용검파의 대제자였던 사형을 불구로 만들어 문주 자리를 꿰찬 일은 성도에서도 유명한 사건이었다.

‘오늘 실패했다고 포기할 놈이 아니지.’

차라리 살수를 고용하여 자신을 노린다면 다행이었다.

만약, 놈이 사천무림에 깃발을 세우고 자리를 잡는다면, 그리하여 포악한 본래 성정을 숨길 필요가 없게 된다면.

‘다음은 맹이와 객잔을 노릴 거야. 그럴 놈이니깐.’

결단을 내린 장환은 주방으로 들어간다.

주방의 벽면 위쪽.

온갖 조리도구를 욱여넣은 선반 앞에 선 그는 먼지가 쌓인 물건들을 차례차례 내려놓았다.

그리고 선반의 깊숙한 곳에서 천으로 돌돌 말린 검 한 자루를 꺼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 말한 건 거짓말이었소."

홀로 중얼거린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 위로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

언젠가 맹이가 자신의 품을 떠날 준비가 되었을 때 전해주고자 했던 육가검문의 마지막 검.

그는 검을 어루만지다 눈을 질끈 감았다.

"아버지, 이 못난 아들을 용서하십시오."

‘저는 형제들을, 제 동생을 지켜야겠습니다.’ 검을 쥔 장환은 객잔 밖으로 나선다.

* * *

복면인은 성도 시내의 좁은 골목을 내달렸다.

발끝에 내공을 모아 땅을 박차는 그의 경공술은 당가 안에서도 손안에 꼽힐 정도로 높은 경지에 닿아있었다.

그러나.

‘말도 안 돼. 따라잡히고 있다니.’

객잔을 빠져나온 후부터 따라붙은 추격자는 경공에 대한 높은 자신감을 철저히 무너트리고 있었다.

추격자는 다닥다닥 붙은 성도 시내의 기울어진 지붕 위를 밟으면 달리고 있음에도 땅바닥을 달리는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따라붙고 있다.

달빛에 가려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으나 이대로 가다간 저 정체불명의 추격자에게 덜미를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최대한 당가의 흔적을 남기지 말라 하셨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추격자를 붙이고 당가로 돌아갈 순 없었으니 어떻게든 추격자를 떨쳐내야 했다.

그는 품속에서 그믐달 모양으로 생긴 검은 표창을 꺼내 들었다.

신월표.

과거 당가의 수많은 암기 중에서도 예측하기 힘든 궤적을 그리며 악명을 떨쳤던 암기였다.

통달하기가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기도 한 신월표는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암기였다.

‘회수는 나중에 생각하자. 제압이 먼저다.’

40년이나 지난 당가의 암기를 누가 알아볼까.

그는 망설임 없이 내공을 담아 손목을 비틀며 신월표를 던졌다.

촤르르륵-!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신월표는 자유자재로 구불구불한 곡선을 그렸다.

펄럭!

옷가지가 휘날리는 소리.

추격이 멎었다.

‘해치웠나?’

그는 자신이 던진 신월표가 의문의 추격자에게 적중하였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대로 내공을 쥐어짜 속도를 높인 복면인은 성도의 시내를 빠져나갔다.

인적이 없는 성도 강변의 한적한 숲속에서 멈춘 그는 나무 한 그루에 등을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쫓아오던 놈은 대체 뭐였지?’

객잔에서 상대했던 세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아마 밤중에 도주하는 자신을 목격한 의로운 무림인이 아닐까 하고 단정 지었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명을 재촉하기 마련이다.

연민의 감정보다는 독문암기인 신월표 하나를 사용해 뒤처리가 골치 아파졌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해가 밝기 전에 회수해야겠어. 일단 이곳에서 옷을 갈아입은 후 정 대인의 점포로 돌아가야겠군.’

숨도 가라앉겠다, 그는 겉에 입은 잠입용 피복을 벗기 위해 움직이려는 찰나였다.

사락.

"누구냐!"

기척을 감지한 그가 비도 하나를 들고 주위를 경계한다.

바람 소리였나?

너무 예민해져 있었나 보다.

쉬릭-. 턱!

비도를 다시 허리 뒤로 꽂아 넣으려던 그의 머리 옆으로 검은 표창이 날아와 나무에 꽂힌다.

사내는 즉시 표창이 날아온 방향으로 비도를 던졌다.

그러나 풀숲 너머로 사라진 비도는 다시 고요한 침묵을 불러왔다.

꿀꺽.

긴장에 침을 삼킨 그의 눈이 나무에 박힌 표창을 향했다.

‘신월표!’

그가 추격자에게 던졌던 신월표였다.

"모습을 드러내라!"

그러나 비도를 던진 방향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혈향이 느껴지지 않아. 비도에 맞은 것이 아니다.’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다.

귀살각에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그보다 경공술과 은신술이 뛰어난 의문의 고수.

사내의 머릿속에 중원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신비 문파에 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암제의 후예들!’

"쌍룡성의 손님이시오? 표창을 날린 건 미안하게 되었소. 모두 오해 때문에 일어난 내 실수이니 용서해주시오. 나는 백도검문과 관련이 없는 사람입니다!"

"쌍룡성?"

그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나무의 울창한 이파리 사이로 스며든 달빛 아래 고고히 서 있는 한 명의 노인.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의문의 존재에 복면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쌍룡성의 귀인이 아니시라면? 혹 신교에서 나오셨습니까?"

천천히 고개를 저은 남궁적이 나지막하게 말한다.

"육가객잔."

허리춤에서 여덟 개.

바로 이어서 소매 안에서 네 개.

복면인은 삽시간에 열두 개의 비도를 출수한다.

당가의 암기 무공인 연환십이참의 극성에 도달해야만 부릴 수 있는 절초가 복면인의 손에서 펼쳐진 것이다.

먼저 쏘아진 비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쏘아진 네 개의 비도로 인해 모든 비도는 동시에 남궁적을 향해 날아들었다.

남궁적은 절대 피해낼 수 없는 암기의 빗살을 향해 발도한다.

파라락!

태풍이 일어난 듯 옷자락이 격하게 펄럭였다.

고이 누워있던 낙엽들이 복면인의 온몸을 때렸다.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돌풍이 멎자 얼굴을 보호하던 팔을 내려 시야를 확보한 복면인은 절망감에 휩싸인다.

칼을 뽑은 채로 고고히 서 있는 노인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모습으로 온전히 서 있었다.

경신법과 은신술에 특화된 고수가 아니었다.

그가 감당할 수 없는 격을 지닌 초인.

복면인은 즉시 혀를 굴려 입안 깊숙이 감춰두었던 독단을 끄집어낸다.

팡!

어금니 사이에 놓은 독단을 깨물려는 순간, 남궁적의 신영이 활처럼 쏘아졌다.

궁신탄영.

절대자들만이 펼칠 수 있는 최상승경지의 경신법으로 빛처럼 이동한 남궁적의 손아귀가 그의 턱을 잡았다.

우드득.

"끄어어억!"

손에 힘을 주어 단숨에 턱뼈를 으스러트린 남궁적은 그의 입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독단을 빼냈다.

"살려 줄 것이니, 죽지 않아도 된다."

속삭이는 남궁적의 목소리에 복면인은 움직이지 않는 턱으로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아흔, 아우어오 오흐이아."

"당가의 아이야, 너에게 물을 것 또한 없다."

알고 있었던가!

혹시, 그가 무심코 던진 신월표를 보고 알아낸 것이 아닐까.

그의 떨리는 동공 위로 무표정한 남궁의 얼굴이 비쳤다.

당신은 누구지?

당가에 원한을 가진 전대 고수인가?

그럴 리 없다.

칠제의 봉문으로 인해 40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당가에 원한을 가질만한 무림인이 존재할 리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남궁적의 말에 그는 눈을 부릅떴다.

"당경에게 전해라. 나 남궁적이, 분수를 잊고 약속을 어긴 당가에 책임을 물으러 갈 것이라고."

전할 말을 끝낸 남궁적은 복면인의 턱을 놓아주었다.

도제 남궁적. 그가 육가객잔에 있었구나!

40년 만에 일으킨 당가의 기지개가 잊혀 가던 제의 역린을 건드려 버렸구나.

장로님께 알려야 한다.

그는 힘을 잃고 축 늘어지는 턱을 부여잡고 혼신의 힘을 다해 다리를 놀렸다.

힘이 풀려 비틀거렸으나, 한시라도 빨리 당가에 가기 위해 몸부림치듯 달려간다.

남궁적은 칼을 집어넣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육가객잔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길의 그는 성도의 강변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그는 멍하니 강가에 앉아있는 육장환을 발견한다.

멈춰 서서 가만히 육장환을 지켜보았다.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고민에 잠겨있는 장환.

그가 왜 이 시간에 사색에 잠겨있는지 궁금해진 적이 그에게 걸어가려던 찰나였다.

풍덩!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장환이 검 한 자루를 강물 위로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객잔으로 돌아가기 위해 돌아서며 남궁적과 마주친다.

"이 늦은 시각에 왜 나와계십니까?"

"밤 산책을 하고 있었지."

밤 산책?

어쩐지 밤새 객잔을 떠들썩하게 만든 소동에도 보이지 않더니.

세상 태평한 남궁적이 부러웠던 장환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산책은 잘 하셨소?"

"야경도 즐길 겸, 적당히 몸을 풀었다네. 자네는?"

"저야…."

무어라 말하려던 그는 곧 대충 얼버무렸다.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잠시 나왔습니다. 그러네요. 저도 산책이나 나왔습니다."

"생각할 거리라. 방금 강에 버린 검과 관련된 것인가?"

장환은 마치 몰래 나쁜 짓을 하려다 들킨 사람처럼 당황한다.

"보셨습니까? 기척이라도 내시지."

"딱히 숨긴 적 없네. 자네가 고민이 깊어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지."

그의 옆까지 걸어온 남궁적은 강 위에 비친 달을 보고는 장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달이 비친 수면.

허무함에 물든 청년의 얼굴.

‘처음 노야를 만났을 때와 같구나.’

검을 버리고 호수 속으로 걸어가던 자신을 바라보던 노야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그는 자신이 노야에게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장환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고민이 있다면 털어놔 보게. 비록 견문이 좁은 늙은이지만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나."

"고민 같은 거 없습니다. 들어갑시다."

"무인이 검을 버렸는데 어찌 고민이 없을까. 육 주인. 자네는 결정을 내렸군."

"어르신. 혹시 검객이 아니라 점쟁이셨소?"

"점쟁이였다면 물어봤겠나?"

그것도 그렇군.

곧바로 수긍한 장환은 유난히 밝게 빛나는 달을 올려다본다.

반쪽 얼굴을 감춘 달빛이 그의 마음을 녹여서였을까.

어쩌면 풀벌레 소리가 귀가 아닌 가슴을 간지럽게 만들어서 일 것이다.

그는 검을 버리며 했던 다짐을 남궁적에게 털어놓았다.

"내일 중산을 찾아갈 생각이오.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까 하오."

"나는 자네가 그리 쉽게 굴복할 사람이 아닐 줄 알았네."

"사천무림맹인가 뭔가에 동참해 한자리 해먹을 생각은 없소. 단지, 객잔과 내 형제들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만 받을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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