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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제귀환록-83화 (83/282)

83화

남궁산이 알기론 섬광검 기철은 검 끝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세검을 쓰는 쾌검의 고수였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적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적이 검가의 손님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남궁산이 소리쳤다.

"침입자다! 모두 검을 들어라!"

채재쟁!

검을 뽑은 세가의 무인들이 남궁적을 포위했다.

일백이 넘는 칼끝이 그를 겨눈다.

남궁적의 바로 앞에 있던 남궁산이 검을 들어 남궁적의 목을 겨누며 추궁했다.

"정체를 밝혀라. 어떻게 내원에서 걸어 나왔지?"

남궁적이 눈을 감은 채로 중얼인다.

"내가 누구냐고?"

그리고 감았던 눈을 뜨자.

그의 눈동자엔 금빛 광채가 맺혀있었다.

"옛 남궁의 협객이다."

남궁산은 멍한 눈으로 금안을 응시한다.

"제왕안?"

오직 남궁의 제왕검형을 완성한 검객만이 지닐 수 있다는 눈동자.

‘세가에 제왕검을 완성한 어른이 계셨던가? 대체 어디에?’

이윽고 남궁산은 방금전 남궁적이 했던 말을 되새긴다.

옛 남궁의 협객.

옛 남궁? 북적과의 항쟁으로 인해 남궁의 전대고수는 남아있지 않았다.

단 한명을 제외하고.

남궁의 마지막 협객이라 불리었던 한 사람.

제왕안을 완성할 수 있는 절대고수.

그러나 그분은 무려 40년 동안이나 소식 하나 없던 분이었다.

"설마. 그럴 리 없어. 당신이 도제 일리가…."

남궁산은 제왕안을 직접 마주하고 있음에도 애써 부정한다.

목 앞에 칼날을 두고도 한 치의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는 표정.

그는 금안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두려움에 물들어 있음을 깨닫는다.

남궁산은 뒤늦게 칼을 거두려했다.

하지만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얼어붙은 것처럼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남궁적이 기세만으로 그들을 압도한 것이다.

"내가 남궁에서 나를 증명해야 하느냐?"

"제이시여, 저희는."

남궁산이 무어라 말하려는 듯 했으나 듣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남궁산의 칼날을 밀어낸 그가 걸음을 옮긴다.

포위한 세가의 무인들은 남궁적이 옆을 지나칠 때도 꼼짝도 하지 못하고 눈동자만 굴렸다.

남궁산이 서 있던 대연무장의 단상 위에 올라선 남궁적.

그가 뒤를 돌아 대연무장의 수련각을 쳐다본 그가 검을 들어 올렸다.

남궁적이 그대로 검을 내리긋자 전각의 지붕이 무너지며 반으로 두동강 난다.

스컹-! 콰과광!

지붕을 받치던 대들보가 잘려나가자 지붕이 그대로 내려앉으며 굉음을 일으켰다.

동시에 남궁산과 세가의 무인들의 얼어있던 몸이 풀려난다.

남궁산이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무너진 전각을 바라보다 허겁지겁 단상 앞으로 달려갔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그가 외쳤다.

"분노를 거두어 주소서! 남궁의 영웅을 알아뵙지 못한 소인의 잘못입니다. 부디 용서를!"

"용서?"

"예. 당장 칠성기를 올려 도제의 귀환을 알리겠습니다. 뭐하느냐! 어서 제께 예를 갖추지 못할까!"

남궁의 무인들이 연무장 바닥에 검을 박고 무릎을 꿇으려는 찰나.

남궁적이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뒤돌아선 그가 다시 검을 들어 저 멀리 보이는 연무장의 담장을 향해 검을 긋는다.

콰과과광!

담장의 벽이 통째로 잘려나가며 무너진다.

도대체 왜이러시는 걸까.

물을 틈도 없이 남궁적의 경고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이제부터 안휘에서 썩어빠진 남궁을 도려낼 것이다. 가로막는 자들은 모조리 베겠노라. 살고 싶으면 도망쳐라."

쉬이익-! 쿠구궁!

혼란스러워하는 남궁의 무인들 머리 위로 스쳐간 삭풍이 연무장 바닥에 거대한 상흔을 남겼다.

진심이다. 제께서 진심으로 남궁을 없애려 하신다.

사색이 된 남궁의 무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남궁적으로부터 도망친다.

적은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연무장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한심한 것들."

겁에 질려 달아나는 꼴이 지금껏 상대해왔던 도적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 옛날 북적들조차도 지금의 남궁보다 기개가 있었다.

적은 대연무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며 눈에 보이는 건물들을 모두 부수기 시작했다.

콰과광! 쿠구궁!

그가 발을 딛는 곳부터 차례차례로 남궁의 전각들이 무너져 내렸다.

일곱 번째 전각을 무너트렸을 때.

푸른 무복의 청년이 남궁적을 막아섰다.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신이었다.

"죽기 싫으면 비켜라."

이미 도망친 무인들로부터 사정을 전해들은 남궁신이었다.

그러나 남궁신은 비켜서지 않고 땅바닥에 검을 꽂아 넣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신. 남궁의 대영웅이신 도제를 뵙나이다."

남궁적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는 막상 단 한사람도 자신을 가로막지 않자 실망을 거듭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 자신을 막아선 유일한 청년.

적은 남궁신을 가만히 내려 본다.

결사의 각오가 깃든 두 눈에는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비켜라."

"송구하오나, 비킬 수 없습니다."

"죽고 싶으냐? 비키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저는 세가의 소가주입니다. 가문의 운명 앞에 죽음이 두렵겠습니까? 제이시여. 부디 분노를 거두어주소서."

당돌한 놈 이로고.

기개 하나만큼은 남궁다웠다.

남궁신을 기특하게 여긴 적은 이 청년과 잠시 어울려주기로 한다.

"내가 무엇에 분노하였는지는 알고 있느냐."

"제께서 적화와 함께 합비로 오시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짐작하건데, 제께서는 화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으시고 그로 인해 오해를 하신 듯 합니다."

적화가 방계의 혈족들이 남궁을 망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녹림도들로부터 남궁을 구해 달라 청하였다.

"오해라. 좋다. 남궁신. 내 질문에 답하라. 협비란 무엇이며, 영웅들을 기린다는 제사비는 또 무엇이냐."

적화 때문이 아니었구나.

아무것도 모르는 적화가 협비나 제사비에 대해 알 리 없었다.

똑같은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남궁수민과 달리 남궁신은 당당한 목소리로 답한다.

"남궁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맹세컨대, 저희는 옛 남궁의 영웅들께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허나 외면하고 침묵하였지. 너희는 남궁의 의무를 저버렸으니, 이는 남궁의 후예인 내겐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도제 역시 어쩔 수 없는 남궁의 사람이구나.

남궁신은 속으로는 남궁의 고지식함을 경멸하였으나 표정에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또박또박 말한다.

"예. 백번 옳으신 말씁이십니다. 저희의 잘못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남궁을 멸하신다는 것은 너무 과한 처벌이십니다. 대모님의 뜻과 방계 혈족들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낸 남궁입니다. 이토록 허무하게 잃을 순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남궁신의 속내를 읽지 못할 남궁적이 아니었다.

"내게 소희의 이름을 들먹이지 마라. 소희가 오늘 너희의 꼴을 보았다면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진정으로 소희의 뜻을 따랐다면 안휘의 협의가 무너지지 않았을 터. 나를 기만하려 들지 마라. 두 번은 용서하지 않겠다."

네 본심을 보여라.

남궁적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신은 씁쓸히 웃었다.

그와 방계의 혈족들이 남궁대모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한때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지금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 거짓도 아니었다.

남궁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또한 남궁신은 도제의 귀환을 그의 꿈을 위한 기회로 만들고 싶었다.

과거의 영광에 비해 한없이 초라하기 그지없는 지금의 남궁이었다.

백천검가는 커녕 백도검문의 끝자락에도 미치지 못하여 안휘의 일개방파들에게도 무시 받는 현실.

열망. 그런 남궁을 옛 남궁과 같이, 다시 천하제일검가로 일으키고 싶은 열망이야 말로 지금의 남궁의 숨을 이어가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열망의 중심에는 단 세 사람뿐인 직계의 혈족이 아닌 남궁신을 비롯한 방계의 혈족들이 있었다.

‘어차피 이대로 도제의 손에 무너져 내릴 것이라면.’

각오를 마친 남궁신의 입술을 떼었다.

"예. 용납하지 않으셨겠지요. 그리고 남궁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다시 모든 걸 내던지셨을 겁니다. 검객의 검을 팔아 안휘를 기근에서 구하셨듯이.

그리고, 그로 인한 모든 짐은 저희 방계혈족들이 또다시 떠안았을 겁니다."

세가의 재정을 채우기 위해 모든 가산을 처분하였던 방계의 노력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았다.

천하는 오직 남궁대모의 이름만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남궁적 역시 방계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한다.

"방계가 무슨 의미더냐. 안휘의 민초들을 위하여 협의를 세우는 것은 남궁의 존재 이유다."

신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 방계가 치러왔던 모든 노력과 희생이 남궁이 아닌 안휘를 위한 것이었다 치자.

안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던진 남궁에 무엇이 남았는가.

비참하고, 비루한 현실이 남았다.

남궁신은 이 모든 원인이 남궁이 무림에 있음에도 무림세가 답지 않았던 까닭이라 여겼다.

그가 생각하는 무림의 본질은 곧 힘이었다.

"안휘를 지키고 협의를 세우는 것 또한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옛 남궁엔. 선조들께서 전수해주신 고절한 검법과, 천하제일검가의 검수들이 있었습니다."

"뜻이 없는 남궁의 검은 삼류검객의 검과 다르지 않다. 허나, 남궁의 뜻을 안다면, 시중의 삼류검법도 남궁의 고절한 검법과 같느니라."

몽상이다. 남궁신은 남궁적의 말이 그가 절대자인 칠제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고절한 검법이 있었기에, 선조들 께서도 뜻을 펼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10년 전, 남궁소희는 협의가 없다는 이유로 무림령을 거부했었다.

안휘의 모든 문파들 역시 소희의 뜻에 함께하였다.

그리고, 무림령을 거부한 대가 역시 안휘무림의 모두가 함께 치렀다.

남궁소희의 장례식날.

안휘의 무림문파들은 곧바로 그 날의 대가를 요구해왔다.

그것이 협비이며, 기웅비였다.

치욕스럽고 분했지만 남궁은 거절할 수 없었다.

통보나 다름없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할 힘이 없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이제. 남궁은 과거의 치욕을 되갚을 수 있는 힘을 되찾게 될 것이다.

그 방법이 검제의 무공을 받는 것이든, 도제의 이름으로 칠성기를 올리는 것이든.

"감히 제께 청해드립니다. 남궁이 잃어버린 협의를 안휘에 세울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십시오. 혹, 원치 않으시거든 본래 남궁이 이어받았어야 할 옛 남궁의 유산을 물려주십시오."

"유산?"

"제왕검형. 장차 남궁의 가주가 될 제가 마땅히 물려받아 할 것이 아닙니까?"

남궁적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제왕검형?"

직계란 작자는 방계에게 물려주길 원치 않아 했습니다. 하지만 제께서는 안휘와 남궁을 위하여 아끼시지 않으리라 믿습니다."적은 그제야 무엇이 이 청년을 비틀어 놓았는지를 알아챈다.

무지(無智). 누구도 가르칠 이가 없어 남궁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리고 남궁소희가 이 청년을 세가의 소가주로 택한 이유 역시 알아차렸다.

"너는 탐랑이구나."

"저는 탐랑이 무엇인지 모르나, 대모님께서 저를 두고 그리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탐랑성. 남궁의 핏줄에 내린 저주.

그러나 동시에 남궁을 천하제일검가로 만들었던 재능의 이름이기도 했다.

남궁적은 비로소 소희가 무엇을 바라여 이 아 아이에게 남궁의 미래를 맡겼는지 깨달았다.

노야가 그에게 했던 말의 의미 역시.

-적아. 오늘의 남궁은 벼르지 못한 검이다. 남궁소희가 옛 영광을 고스란히 담아 완성시키고자 하였지만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예견하여 마지막 말을 남건 것이리라.

-지금의 네가 무엇을 위하여 칼을 들 것인지 고민하라.

소희는 탐랑을 올바르게 인도하여 남궁의 검이 되기 전에 눈을 감았다.

단지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탐랑은, 욕망이라는 저주에 사로잡혀 남궁의 뿌리를 썩게 만들었다.

적은 마음속으로 죽은 동생에게 묻는다.

‘소희야. 너는 내가 어찌했으면 좋으냐.’

소희의 대답은 다시 노야가 했던 말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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