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기철의 미간 앞에 멈춘 칼날.
칼날이 멈춘 이유는 지찬이 자비를 베푼 것이 아니었다.
싸움을 관전하던 다른 장로가 끼어들어 기철의 미간과 지찬의 검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검을 들이밀어 막아낸 까닭이었다.
"합공을 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나?"
"패배를 인정하오. 기 장로와 나는 이만 물러나겠소."
"이상하군. 그쪽이 더 실력이 있어 보이는데. 왜 더 해보지 않고?"
"착각이시오. 기 장로가 한 수 위요."
지찬은 장로의 목소리가 아닌 말투에서 괴리감을 느낀다.
"너. 노인네가 아니군."
"그 역시 착각이오."
"이름이 뭐지?"
검가의 장로로 변장한 사내.
그가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종오."
"종오? 흠. 처음 듣는구만. 하긴, 검가에 누가 있든 내 알 바 아니지. 영감쟁이 데리고 썩 꺼져."
자신을 종오라 밝힌 사내는 다리에 힘이 풀린 기철을 부축한다.
합비로 돌아가는 검가의 무인들.
남궁은 씁쓸히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절망한다.
녹림도왕이 아무리 대단하다지만 설마 검가의 장로마저 압도할 줄은 몰랐다.
남궁산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가주님! 녹림도왕의 실력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붙어봤자 모두 죽을 겁니다."
무림의 싸움에서 숫자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특히 아득한 실력 차이 앞에서는 더욱 무용지물이었다.
삼백의 남궁이 녹림도왕 한 명을 합공한다해도 그를 제압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남궁산의 말대로 당장 도망쳐야 옳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 도망치면 일천의 녹림도들은 10만이 될 거다.
또한 어디선가 남궁을 지켜보고 있을 도제의 분노는 어찌하란 말인가.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이제 물러설 수 없습니다. 전투를 준비하십시오."
"미친 짓입니다. 재고해주십시오. 최소한 합비의 문파들을 설득하여… 아니. 도제께 빌어봅시다. 제께서 명하신다면 관군이 나서 줄 겁니다."
"산 숙부. 이대로 도망친다면 우리는 녹림이 아니라 제께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겁니다."
"설마 죽이기야 하시겠습니까!?"
당장 죽게 생겼는데 나중의 처벌이 두려울까.
남궁산은 죽고 싶지 않았다.
"소가주의 고집 때문에 혈족들을 죽음으로 내몰 순 없습니다. 책임은 남궁에 돌아간 후에 지겠습니다."
그가 삼백 무인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후퇴한다! 남궁은 조속히 후퇴하라!"
남궁신이 막아선다.
"남궁은 자리를 지켜라!"
엇갈리는 명령에 혼동하기 시작하는 삼백의 무인들.
정해진 대로라면 창검대주보다 소가주 남궁신의 명령을 우선해야 함이 옳았다.
그러나 남궁산과 마찬가지로 살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그들은 하나둘씩 남궁신을 외면한다.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본 마지찬이 말했다.
"어이. 덤빌 놈 없으면 이제 제대로 한판 붙어야지. 우리가 호구로 보여? 도망가게 놔둘 거 같으냐?"
호왕채의 녹림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칼을 치켜들었다.
사색이 된 남궁의 무인들.
지찬의 명령이 떨어진다.
"얘들아~ 불알 두 쪽이 아까운 놈들이다. 싸그리 다 죽여버려라."
"우와아아!"
남궁산이 가장 먼저 등을 돌려 도망친다.
그를 따라 도주 행렬이 이어졌다.
남궁신은 참담한 심정으로 도망가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 * *
합비의 성벽 위 장루.
남궁적은 씁쓸한 눈으로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가관이로구나."
남궁적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한숨을 푹 내쉰 그가 말했다.
"의도는 알겠으나 과하셨습니다."
노야는 자신은 모르겠다는 듯이 태연하게 물었다.
"뭐가?"
"녹림들 말입니다. 저들이 오늘 하필 거사를 도모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노야께서 계획하신 일이 아닙니까."
"계획이라니. 나는 단지 살짝 인도하였을 뿐이니라."
노야는 누군가의 간절한 바램 없이 움직일 사람이 아니었다.
"저 산적 놈의 바람이었습니까? 아니면 남궁의 바람이었습니까?"
"바라는 이들은 있었지. 그러나 둘 다 아니다."
녹림의 자금줄이 되어주었던 도전자들.
그들이 호왕채로 오는 동안 길을 잃게 만든다거나, 배를 타지 못하게 하는 사소한 간섭으로 말이다.
"그리고 섭섭하구나. 네가 원한 일이 아니었느뇨?"
적은 부정한다.
"노야께서 원하셨겠지요. 제가 소희의 뜻을 이어 탐랑을 계도 하길 원하시는 게 아닙니까?"
"방계의 아이가 탐랑임을 알아보고 검을 거둔 것은 너였느니라. 어찌 혈귀라 불릴 만큼 매정했던 검객이 뽑았던 검을 거두었을꼬?"
탐랑. 탐랑.
그는 부정하지 못하고 두 글자를 계속 입안에서 굴린다.
남궁적이 탐랑의 이름 앞에 나약해졌던 이유.
노야는 그 이유를 꼬집었다.
"너를 살리고 죽었던 네 형님이 탐랑이었기 때문이 아니냐?"
휘오오-.
높은 성벽 위로 들이닥친 돌풍.
돌풍에 실려 온 노란 나비 한 마리가 두 노인의 머리 위로 날개를 팔랑인다.
나비는 한참을 맴돌다 살며시 남궁적의 어깨 위에 앉았다.
어깨 위의 나비를 잠시 내려본 적이 말했다.
"예. 제 형님께선 탐랑이셨습니다."
남궁과 탐랑의 오랜 악연.
힘, 재물, 권력. 욕망을 원동력으로 끝없이 성장하는 재능.
탐랑이라는 재능이 남궁을 천하제일검가로 끌어올리는데 일조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남궁 선조들은 절대 탐랑을 가주나 소가주의 자리에 허락하지 않았다.
욕망에 취한 탐랑은 주위의 모든 것을 잡아먹으려 든다.
남궁을 쥔 탐랑은 욕망에 굴복하여 수없이 남궁을 위기로 내몰았던 까닭이었다.
그래서, 남궁은 그들의 핏속에 잠자고 있는 탐랑을 저주라 불렀다.
"하지만 제 형님께서는, 탐랑이셨음에도 남궁에 가장 영광스러운 역사를 남기셨습니다. 소희는, 저 아이가 제 형님처럼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거겠지요."
힘과 재물, 권력이 아닌 남궁의 협의를 갈망하는 늑대로 기르고 싶었던 것이다.
소희의 큰 오라비이자, 그의 형님이 그랬던 것처럼.
"노야. 당신은 진정 이 세상의 모든 걸 알고 계십니까?"
"내가 모르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 당연한 이치이니라."
"허면, 남궁에 다시 제 형님과 같은 늑대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제게 확신을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노야의 뜻대로 행하겠습니다."
"적아. 늘 말하지만 내 뜻은 없다."
그는 남궁적의 어깨 위에 손가락을 얹는다.
작은 나비는 적의 어깨에서 노야의 손가락 위로 얌전히 자리를 옮긴다.
그가 손을 털어 나비를 날려 보내며 말했다.
"모든 것은 오로지 너의 선택일지니. 나는 안내하고자 할 뿐. 무엇도 강요하지 않는다."
그가 허공에 손을 휘젓자 새하얀 술병이 생겨난다.
"철에는 하품과 상품이 있다. 그러나 뛰어난 장인은 하품을 철을 솎아 상품을 철로 만들어낼 수 있지. 장인이 하품의 철로도 명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비법이로다."
물을 담아도 술로 바꾸어내는 술병.
주선의 도력이 담긴 신선주였다.
"그러나 사람이 어찌 하품이 있고 상품이 있겠느냐. 다만, 망치를 든 장인이 안휘의 사람이거늘, 어찌 명검이 나오지 않으랴?"
노야는 신선주를 남궁적에게 건넨다.
선택은 적의 몫이었으나, 청탁은 노야의 자유였다.
하지만 적은 노야가 신선주를 건네도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다 죽일 셈이냐?"
"도망치는 꼬락서니를 보십시오."
"에잉 쯧. 남궁의 마지막 협객은 무슨. 인간 백정이 따로 없구만."
"…."
"고집불통 같으니. 그래. 내가 무어라 지껄여도 들어먹을 놈이 아니었지."
"한 가지만 알려주십시오. 저 녹림 놈. 저놈이 어찌 팽가의 오호단문도를 알고 있습니까?"
일부로 제게 팽가의 전인을 인도하셨습니까?
남궁적이 그리 묻자 노야는 샐쭉 한쪽 눈을 일그러트리니 먼 산을 바라보았다.
"나는 모르겠다만?"
"방금 노야께서 모른다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크흠."
적은 수염을 쓸며 딴청을 부리는 노야를 노려본다.
노야는 따가운 눈빛에 계속 모른척하기 힘들었는지 결국 입을 열었다.
"팽가가 있던 하북의 고룡산에 사나운 대호가 살고 있었도다. 팽가의 마지막 생존자는 비급을 숨기기 위해 스스로 범굴에 몸을 던졌느니라. 그리하여, 팽가의 도법을 호랑이굴에 숨겼지."
참으로 팽가다운 발상이었다.
"그래서, 저 산적 놈이 비급을 취했습니까?"
"사람 맛을 알아버린 범이 어떻게 되었겠느냐. 고룡산에 자리 잡은 놈이 인육에 맛을 들리더니 기어코 호왕채의 산적을 잡아 먹어버렸도다. 우연일까. 운명일까. 형제의 죽음에 분통한 산적하나가 제 발로 범굴로 찾아가 호랑이를 때려죽였지."
그리고 그 산적은 호랑이굴에 있던 팽가의 비급의 주인이 되었다.
말을 마친 노야는 남궁적을 힐끔 쳐다본다.
남궁적의 복잡한 심정이 눈빛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빚이 있지?"
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야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살살 하거라."
후우-.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쉰 적이 성곽을 밟고 뛰어내렸다.
매끄럽게 낙하하여 도망치는 남궁의 무인들 가운데로 향해 벼락처럼 떨어진다.
살랑살랑. 노란 나비가 노야의 눈앞을 맴돈다.
"지가 받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어찌 억지로 쥐어 주겠느냐?"
나비의 날갯짓이 거세진다.
"쯧쯧, 제 오라비는 지독히 챙기는구나. 안휘도, 남궁도, 오라비까지. 인세에 그리 미련이 많아서야."
나무라듯 나비를 향해 쏘아붙인 노야가 허공을 밟으며 하늘 위로 올라간다.
갑자기 멈춰선 그가 아직 성곽 위에 머물고 있는 나비를 향해 말했다.
"네 청을 들어주었잖느냐. 이제 너도 미련을 털고 약속을 지키거라."
그러나 나비는 계속 성곽 위를 날아다녔다.
계속 머무는 나비에 노야는 그녀를 꾸짖었다.
"어허. 이제 남은 일은 네 오라비의 몫이거늘. 내 어찌 알꼬?"
그제야 노란 나비는 노야의 뒤를 쫓아 하늘 위로 오른다.
* * *
쿵!
합비의 성문 앞. 충격음과 함께 뿌연 흙먼지가 일었다.
성문을 향해 도주 중이던 남궁의 무인들은 갑자기 흙먼지가 가로막자 멈춰섰다.
짙은 안개처럼 퍼진 자욱한 흙먼지.
그 속에서 남궁적이 걸어 나왔다.
도제를 본 남궁의 무인들은 환호를 내질렀다.
가장 선두에서 도망치던 남궁산이 남궁적의 앞으로가 무릎을 꿇었다.
"제이시여, 부디 남궁을 구해주소서. 저 산적 놈들이 남궁을 욕보이고…."
스컹-!
채 말을 마치지 못한 남궁산의 목이 떨어진다.
갑자기 남궁산의 목을 단칼을 베어낸 남궁적.
그가 무심히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창검대는 남궁과 안휘를 지키는 칼이니. 남궁을 욕보인 건 창검의 이름을 지고 등을 보인 너다."
적이 바짝 얼어붙은 다른 이들을 훑었다.
"또 남궁을 욕보일 놈들이 있는가?"
"흐이익!"
살기를 읽은 그들은 바짝 얼어붙은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다시 등을 돌리는 놈이 하나 없다.
코로 날숨을 길게 내쉰 적은 녹림도들을 향해 걸어간다.
호왕채의 녹림도들은 남궁적이 성문 앞으로 떨어질 때부터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녹림도 앞에 도착한 적이 멈춰섰다.
기세를 숨기지 않았던 덕분일까.
강자의 풍모를 알아본 호왕채의 형제들은 긴장하여 꿀꺽 침을 삼켰다.
지찬은 남궁적의 정체를 직감한다.
"올 것이 왔군."
휘이잉-.
합비의 앞 들녘을 휩쓴 바람에 적의 수염과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의 시선은 다시 마지찬의 곁에 무릎을 꿇고 포박된 남궁신을 향했다.
나름 저항은 해 보았는지 온몸에 상처가 가득했다.
적과 눈이 마주친 남궁신이 눈을 질끈 감고 시선을 피한다.
그런 남궁신의 모습에 적은 실소를 흘렸다.
"이 꼴이 너의 남궁이더냐?"
적의 질책에 신은 면목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대놓고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남궁적에 지찬이 볼을 씰룩였다.
"이보쇼. 집안 얘기는 나중에 하지?"
적은 매서운 눈매가 지찬을 향했다.
나란히 선 호왕채의 호걸들 중에서도 머리 하나는 더 큰 거한의 사내.
그가 엄지를 들어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녹림도제 마지찬이요! 노 선배의 존함은 어찌되시오?"
지찬은 짐작은 하고 있으나 확인차 이름을 물었다.
적은 짧게 대답한다.
"남궁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