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제귀환록-103화 (103/282)

103화

호북성의 서북부 십언(十堰).

악양으로의 여정을 이어가던 일행들은 잠시 객잔에 들러 여장을 풀었다.

늦은 저녁식사를 위해 자리를 잡은 일행들.

허름한 객잔 안에 꽉 들어찬 사람들을 둘러본 재희가 중얼거렸다.

"딱히 무림객잔도 아닌 것 같은데 무림인이 많이 보이네."

그는 마침 주문을 받으러 온 점소이에게 물었다.

"점소이. 오늘 객잔이 꽤나 붐비는거 같습니다. 근래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점소이가 피곤한 얼굴로 대답했다.

"소문 못 들으셨습니까 대협? 합비에 칠성기가 걸렸답니다. 여기 이 사람들 모두 다 도제를 뵈러 안휘로가는 객들이랍니다."

오, 이런. 그분 지금 여기 계신대.

다행히 아직 일행들이 합비를 떠나 소림에 들렀다는 소문은 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문보다 두 박자 정도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천만다행.

실수라도 남궁적의 정체가 알려진다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한 재희가 일행들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십언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다른 객잔엔 빈방이 없어 여기 허름한 객잔까지 오게 된 일행들이었다.

의자에 등을 기댄 진삼이 머리에 쓴 죽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북풍검문에 기별이라도 넣어보지 그랬나. 마 선배님이 검가의 소가주를 무척 아끼셨던 것 같은데."

북풍검문은 십언에 위치한 백도검문이었다.

"북풍검문에 도제께서 행차하셨다간 아주 난리가 날걸? 하 호위도 마 선배님 성격 잘 알잖아?"

모든 백도검문이 칠제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편이었지만 북풍검문의 문주 마림광은 특히 유별나기로 유명했다.

거기다 재희에게 호의를 보이는 몇 안되는 백도검문의 주요인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재희는 오히려 그런 북풍검문이 껄끄러웠다.

"나도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상아가 그런 재희를 찌릿 노려보며 말했다.

"마 선배님의 호의를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아니, 사저. 저도 칠제의 손자란 이유만으로 보내는 호의를 마냥 반길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습니다."

억울하다는 듯이 투덜거리는 그에 상아가 흥! 하고 콧소리를 내었다.

"마림광 선배님이 당신이 제의 핏줄이란 이유로 좋게 볼만큼 단순한 분이신 거 같나요?"

"섭섭합니다, 사저. 마 선배님이 전대 척마대주라고 너무 편들어 주시는 거 아닙니까?"

웬일인지 매사에 시큰둥하던 진삼이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글쎄, 핏줄 때문이라기보단, 소가주를 보면 본인의 젊은 시절이 생각나는 거겠지. 소싯적 마 선배님도 악양에서 소가주 못지않은 한량이셨다."

그랬던 마림광이 정신을 차린 데는 정도맹의 척마대에 소속되어 군자도 조홍을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맹의 규율과 정도무림의 법도에 가장 엄격하기로 소문난 마림광.

그의 밑에서 척마대의 일을 배웠던 상아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진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진삼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인 만큼 진실일 확률이 높았다.

마림광은 인맥이 좁기로 유명한 진삼의 몇 안 되는 지인이기도 했다.

마림광의 화려했던 과거사를 처음 듣는 건 재희도 마찬가지였다.

키득거린 재희가 남궁적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이런 곳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하하. 가끔은 이렇게 사람 냄새 나는 곳도 나쁘지 않잖아요?"

"잘했다. 나 역시 불편했을 게다."

그리고 객잔 안을 쭉 둘러보았다.

지저분한 데다 시끄러웠다.

평소 조용한 걸 선호하는 편이었지만 가끔은 이런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확실한 건 휘황찬란한 소림의 황룡당보다는 훨씬 더 나았다.

적은 일행들의 이야기에 나왔던 마림광을 떠올렸다.

진삼의 말마따나 조홍의 기억 속에 있는 젊은 시절의 그는 허구한 날 쌈박질을 하고 다니던 천방지축이었다.

‘껄껄. 그랬던 놈이 어엿한 일문의 문주가 되었구나, 조홍이 알았다면 까무러쳤겠지.’

적은 허리춤으로 손을 옮겨 술병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조홍에게 술 한잔 올리며 이 소식을 전하고픈 마음에서였다.

신선이 만든 술이니 죽은 조홍에게도 닿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낯선 술병을 본 지찬이 호기심을 보였다.

"어라. 못 보던 술병입니다?"

마을에 들릴 때마다 술병을 꽉 채우는 게 남궁적의 일과였는지라 지찬도 적의 술병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적이 노야에게 받은 신선주를 꺼낸 건 처음이었으니 관심을 가질만했다.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새하얀 자기병에 다른 일행들도 눈을 두었다.

적은 아이들에게 신선주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선물 받았느니라."

정확히는 염가 남매를 잘 보살펴 주는 것에 대한 뇌물에 가까웠지만.

적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다.

애주가인 재희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얼핏 봐도 정말 귀한 술 같습니다."

평소엔 절대 자신의 술을 탐하지 않던 아이들이었다.

심지어 상아마저 아닌 척 술병을 힐끔거리고 있다.

그만큼 신선주라는 기물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풀풀 풍겨대고 있었다.

"좋은 술은 나눠 먹어야지. 너희도 같이 마시자꾸나."

명월주(明月酒)라 했던가.

신선주는 남궁적도 노야가 함정처럼 내어준 술잔으로 딱 두 번 마셔본 게 전부였다.

아마 노야가 조홍과 단리혁의 생을 보여주었던 신선주와는 다른 종류일 터.

적은 답지 않게 기대에 찬 심정으로 술병을 열었다.

퐁! 술병의 입구를 막고 있던 무른 대나무 마개가 빠져나오며 청량한 소리를 내었다.

그와 동시에 술병 안에서 흘러나오는 그윽한 주향.

구름에 향이 있다면 이 술의 향과 같을까.

주도 문외한인 마지찬조차 홀린 눈으로 콧구멍을 벌렁이고 있었다.

적이 술병을 들자 일행들의 눈도 따라 움직였다.

"한 잔씩 마셔보자."

상아가 죄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무척 귀한 술 같습니다. 선물하신 분이 어르신을 위해 준비한 술일 텐데 저희가 축내도 될까요?"

어차피 물을 담아도 술로 바뀌는 신선주였다.

설사 단 한 병뿐이었더라도 남궁적은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만큼 귀한 술이 아니다. 언제든 채워 넣을 수 있단다. 걱정 말고 마시거라."

그러자 재희가 제일 먼저 슥 잔을 내밀었다,

"큼. 그럼 제가 먼저."

지찬은 용납하지 않았다.

"뭐 인마? 당연히 스승님의 제자인 내가 먼저지!"

"얼씨구? 제자 노릇은 한 번이라도 하고 하는 말이냐?"

"하여튼 네놈보단 내가 먼저다!"

"명부터 먼저 끊어줄까?"

두 철부지들이 으르렁대며 티격태격하는 동안 적은 진삼과 상아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싸우다 말고 뒤늦게 잔을 받은 재희와 지찬.

마침 점소이가 준비된 식사까지 내왔다.

신선주 한잔을 시작으로 떠들썩한 술판이 벌어졌다.

모처럼의 술자리에 흥이 오른 지찬이 술 단지 세 개째를 비웠을 때였다.

일행들이 앉은 바로 옆 탁자에 앉은 두 무림인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문 들었는가? 백도검문이 또 당했다는군."

"이번엔 어디라고?"

"송림검문! 안휘로 가던 길에 소가주와 정예들이 모조리 몰살당했다더라."

"제의 후예가 제의 후예를 죽이고 다닌다니.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구만."

홍주를 단지째 들고 벌컥벌컥 들이키던 지찬을 제외한 일행들이 신나게 술을 마시다 말고 서로를 쳐다본다.

남궁적이 턱짓에 재희가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일어난 그의 손엔 죽엽청 한 병이 들려있었다.

자연스럽게 옆 탁자에 합석한 재희가 탁 하고 죽엽청을 올려놓았다.

"안녕하십니까 강호형제님들. 혹, 악양에서 오시는 길이십니까?"

그들은 난데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재희의 행동에도 전혀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런 허름한 객잔이 붐빌 때는 으레 있는 일이었던 까닭이었다.

오히려 재희가 가져온 죽엽청이 반가웠는지 밝은 표정으로 맞이해주었다.

"그렇소. 얼마 전 칠오현에 계씬 염동화 선배님의 부고를 듣고 조문을 가는 길이오."

그들은 악양에서 활동하는 야협들이었다.

다른 한 명이 어쩐지 낯이 익은 재희의 얼굴을 보곤 눈가를 좁혔다.

"헌데, 소협. 어째 좀 낯이 익소?"

"하하하!"

아차. 악양 출신들이었지.

위기가 찾아오자 크게 웃어 보인 그는 두 무림인의 잔에 죽엽청을 따라주며 둘러대었다.

"원래 잘생긴 사람들은 다 비슷하게 보인답니다."

바로 옆 탁자에서 지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X. 아!"

지찬의 머리에 육포 한 조각을 집어던진 재희가 악양의 협객들에게 말했다.

"저희가 마침 낙양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아마 지금 가셔도 염가는 떠나고 없을 겁니다. 염가의 새 가주에게 합비로 터를 옮긴다고 들었소이다."

"오. 고맙소. 하마터면 헛걸음을 할 뻔했군!"

"그나저나, 저희가 오랜만에 악양에 돌아가는 터라 소문에 좀 어둡습니다. 방금 얘기하시던, 백도검문에 관한 소문 말입니다."

공짜 술도 받았겠다, 거기다 염가의 소식도 전해준 재희에게 호감을 품은 협객들은 거리낌 없이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십오 년 전쯤에 자취를 감추었던 흑룡성 말이오. 그들이 얼마 전부터 백도검문을 습격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고 있소. 습격을 받아 죽은 송림검문 소가주의 시체에 단검이 꽂혀있었다 하오. 단검엔 두 마리의 용이 꽈리를 튼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하더이다."

꽈리를 튼 두 마리의 용.

호사가들은 문양의 의미가 암제의 젊은 시절 별호였던 쌍사비를 의미한다고 짐작했다.

"왜, 암제께선 본래 섬서성의 전설적인 살문의 후예가 아니셨소이까? 이십 년 전 검제께서 사마척결로 사파무림을 탄압하신 일에 앙금을 품은 게 아닌가. 맹에서는 쉬쉬하고 있지만 백도검문의 수장들께선 그리 추측하고 있다 들었소."

추측이 사실이라면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북경의 황제조차 암살할 수 있다는 흑룡성의 살수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백도검문을 노리고 암살한다면 누가 대응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그 중심에 칠중암제가 있다는 말에 남궁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아는 암제 하소호는 절대 그런 일을 벌일 친구가 아니었다.

오해가 있다.

적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심란한 마음에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중, 갑자기 객잔의 문이 벌컥 하고 요란하게 열렸다.

열다섯? 많아 봐야 열여섯쯤 돼 보이는 소녀가 객잔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소녀의 등엔 각궁 한 자루, 그리고 허리 뒤로는 기다란 곡도 한 자루를 가로로 매달고 있었다.

장성을 지키는 군인이 아니고서야 무림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차림새였다.

길게 땋은 양 갈래머리를 팔랑이며 객잔의 주인장이 있는 계산대까지 걸어간 소녀가 쾅 하고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방 하나! 고급! 고급!"

소녀의 입에서 짧고 어눌한 중원말이 튀어나왔다.

객잔 안의 모든 이목은 소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소녀를 쳐다보던 주인장.

소녀가 눈썹을 찌푸리고 쌍심지를 켜자 주인장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바, 방은 있습니다."

주인장의 말을 알아들은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다다닥! 다시 객잔 밖으로 뛰어가는 소녀.

문밖에서 중원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들려왔다.

"마마! 방이 있사옵니다. 마마를 모시기엔 격이 맞지 않긴 하오나 노숙은 피할 수 있사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