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여덟.>
이름 없는 야산.
사건은 일곱과 한 마리가 잠시 쉬어가던 중에 일어났다.
* * *
"아니, 보기만 하자는데. 쪼잔하게 왜 그러나?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보여주게 자명."
"삑!-."
강이 집요하게 자명을 쫓아다니며 조잘거렸다.
그의 머리 위에 배를 깔고 앉은 손바닥만 한 새끼 매가 강의 말을 옹호하듯 작은 부리를 벌리며 울었다.
지치지도 않는지 아주 하루 종일 달라붙는 단리강.
어제저녁. 자명은 무심코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 말을 꺼낸 걸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얼마 남지 않은 소림의 보물입니다. 제발 이해해 주십시오, 단리 시주."
"어허! 이 친구가. 누가 달라고 했나? 잠깐만 보겠다고 잠깐만."
사태를 관망 중이던 조현이 은근슬쩍 말을 꺼냈다.
"그러게 자명. 강이 저렇게 애원하잖나. 한 번만 보여주세."
"조 시주. 구경을 위해 꺼낼 물건이 아닙니다. 천곽 시주, 신혜 시주. 제발 이 중생들 좀 말려주십시오."
하지만 천곽은 자명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혹시 친구를 믿지 못하여 그러나?"
자명이 배신감에 가득 찬 시선으로 천곽을 쳐다보자 모른 척 고개를 돌리는 천곽이었다.
그도 무인인지라 소림의 보물이 보고팠다.
이윽고 믿었던 신혜마저 단리강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래요. 단리소협이 아무리 철이 없어도 설마 친우의 귀물을 노릴까 봐요."
"남궁 시주! 남궁 시주는 아니지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검신에 기름을 먹이던 적이 슥 하고 자명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내렸다.
"하루 종일 떠들어대는 게 시끄러워 죽겠으니 한번 보여주고 말게나."
"아미타불. 아미타불. 벌 받을 겁니다, 시주님들."
"하핫. 나는 상관없네! 원래 천산이 부처를 모르잖나."
"천산의 불꽃도 분명 노하실 겁니다."
"어허! 천산의 불꽃이 우리 조상님들의 영령인 건 알고 하는 소린가? 우리 할아버지가 날 얼마나 좋아하셨는데."
"하아…."
결국 백기를 든 자명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들고 다니던 짐보따리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뒤적거리자 단리강, 조현, 신혜 그리고 천곽이 눈을 반짝였다.
남궁적도 슬쩍 고개만 내밀었다.
이윽고 보따리 속에서 꺼낸 자명의 손엔 낡은 목갑 하나가 들려있었다.
오직 하소호만 나무 아래서 홀로 무심한 얼굴로 나무 조각을 깎고 있었다.
강이 소호에게 손짓하며 소리쳤다.
"소호! 무려 대환단이야 대환단! 자네도 어서 와서 구경하게."
두 마리의 뱀 새겨진 단검이 멈췄다.
이내 다시 조각을 시작한 소호가 조용히 말했다.
"…대환단이나 되는 보물을 본다면 욕심이 일지도 몰라. 나는 친구의 것을 탐하지 않아."
그의 말에 자명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다섯은 서로를 향해 곁눈질하다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제 발 저린 단리강이 자신했다.
"하하하. 그, 그렇지만, 뭐 나는 나를 절대 믿는 사람이라서."
하지만 그의 동공은 몹시 떨리고 있었다.
강의 팔꿈치가 조현의 옆구리를 찔렀다.
"자, 자네 왜 그러나 소호. 이래 봬도 나는 나랏 밥을 먹던 장군가의 적손일세! 그리 말하면 우리가 꼭 도적처럼 보이지 않나 하하하! 그렇지 않습니까 박 소저?"
왜 나를!?
당황한 신혜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 그래요, 하 소협. 저희는 그저 소문으로만 듣던 대환단이 궁금한 것뿐이랍니다. 천곽도 그렇죠?"
"귀물 따위에 흔들릴 우정이 아니지. 흠, 흠!"
나름의 변명을 늘어놓은 넷의 눈이 남궁적을 향했다.
간절한 그들의 시선에 적은 마지못해 소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 말처럼 사람이 어떻게 욕심이 안 생기겠나.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구경이라도 하세."
그제야 몸을 일으킨 소호도 일행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자명은 처음부터 그런 친구들을 짜게 식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어차피 보여주기로 마음먹은 참이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목갑의 뚜껑을 열었다.
-딸깍.
목갑의 이음새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
푹신하고 촉촉한 이끼.
그 위로 다섯 개의 환단이 영롱한 금빛을 뽐내며 고운 자태를 드러내었다.
"오오오!"
다섯은 일제히 탄성을 쏟아내었다.
그들은 무림에 손꼽히는 무가지보의 위용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명은 내친김에 이 다섯 알의 대환단에 얽힌 사연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숭산혈겁이 일어나기 전까지 소림은 총 서른일곱 개의 대환단을 축적해 놓았었습니다."
자명의 말에 깜짝 놀란 다섯은 고개를 들어 자명을 바라보았다.
"서른일곱 알이라니. 한 알에 일 갑자라는 대환단이 말인가?"
조현이 묻자 자명은 고개를 끄덕이다 침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미타불. 대환단은 재료도 중요하지만 수양이 깊은 선승들의 십 년간 공양을 드려야만 완성됩니다. 소림의 선승들께서 수백 년간 공양을 드리며 모아온 서른일곱 알이었습니다."
"이제 대환단은 더 이상…."
"예. 이제 대환단의 제조법도, 공양을 드릴 소림의 승려들도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이 다섯 알이 강호의 마지막 대환단이겠지요."
다섯은 안타까움에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자명의 말속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낀 강이 물었다.
"서른일곱 알이라 하지 않았나? 혹시 나머지 서른두 알은 숭산혈겁때 소림과 함께 불타 버린 것인가?"
그렇다면 얼마나 큰 손실일까.
일행들이 또 한번 북적에 대한 분노를 불태우던 중.
자명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말했다.
"모두 소림의 보물인데, 어떻게 다섯 알만 챙겼겠습니까. 나머지 서른두 알은 소승이 먹었지요."
순간 여섯은 귀를 의심했다.
자명의 어조가 너무 당당하여, 일행들은 하마터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을 정도였다.
"뭐?"
"한 알에 일 갑자짜리를?"
"이제 더 없다며."
"자명의 끝없는 내공이 어디서 나오나 했더니…"
그중 가장 허망한 표정을 짓던 강이 결국 자명의 멱살을 쥐어 들었다.
"뭐? 내가 먹었소? 서른두 알 전부를?"
그러나 자명은 오히려 부처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긋나긋한 말투로 강을 달랬다.
"허허허. 대환단의 힘으로 강호를 구하고자 하는 불심에서 먹은 것입니다. 다 세상의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이해하기엔 납들 할 규모가 아니었다.
강이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하수오도 서른두 개를 처먹으면 효능이 없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먹다 보니 손이 계속 가서 그만. 다 부처의 뜻입니다, 단리 시주. 이 손 놓으시지요. 결국 소승이 대환단의 힘으로 강호를 위해 이바지하고 있잖습니까?"
결국 먹다 보니 대환단의 맛에 중독되어 과복용했다는 말.
"강호를 구하기엔 지나치게 많이 처먹었다고 돼지새끼야!"
"허허. 본래 귀물은 스스로 제 주인을 찾는 법. 서른두 알의 주인이 소승이었을 따름이지요. 다 부처의 뜻입니다."
"이 땡중이 부처한테 양심을 공양했나. 그래 좋아. 귀물은 스스로 주인을 찾는다 이거지?"
순식간에 자명이 들고 있던 목갑으로 손을 뻗은 강이 대환단 하나를 집어 들었다.
순간 자명이 붙잡으려 했지만 단리강은 이미 도망치고 있었다.
재빨리 목갑을 닫고 품속에 챙긴 자명이 그를 쫓으며 소리쳤다.
"아니되오, 단리 시주!"
"다 부처의 뜻이네, 자명!"
주위를 빙빙 돌며 추격전을 벌이는 강과 자명.
결국 참다 못한 자명은 도망치는 단리강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백보신권!
주먹 모양의 거대한 권기가 단리강의 등을 향해 쇄도했다.
등 뒤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기운.
강은 그대로 도약하여 자명의 백보신권을 피해내었다.
하지만 첫 일수는 단지 시작해 불과했다.
파바박!
자명은 소매를 휘날리며 바다와 같은 내공으로 수십 발의 권기를 찍어내었다.
십여 장을 가득 매운 백보신권의 권기가 해일처럼 강을 덮쳤다.
화르륵.
강의 손에서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한 줄기의 푸른 불길이 되었다.
강은 길게 뻗어난 불꽃을 권기를 향해 채찍처럼 휘둘렀다.
천산의 청화와 소림의 백보신권.
두 개의 절세신공이 부딪혔다.
콰과광! 콰과과광!!
뒤이어 날아오던 권기를 집어삼키며 연쇄폭발이 일어났다.
얼굴을 보호하던 팔을 내린 자명.
이렇게까지 할 의도가 아니었던 그는 초조한 눈으로 폭발의 여운이 가시길 기다렸다.
그리고 연기가 흩어진 공간.
단리강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하하하!"
위쪽!
단리강이 일행들이 쉼터로 삼았던 거대한 나무 위.
그 꼭대기에서 머리 위로 대환단을 치켜든 단리강이 웃고 있었다.
"단리 시주. 소림의 보물을 돌려주시구려!"
자명의 간절한 외침에도 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돌려주기는 개뿔. 어차피 또 네놈이 처먹을 꺼. 이 몸이 먹어 중원을 구하는데 이바지하겠다!"
퍽이나 그러시겠다.
벗들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기왕 저지른 일.
강은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대환단을 사랑스럽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기물은 스스로 주인을 찾는다 하였던가.
햇빛에 눈이 부셔 손을 들어 눈을 살짝 가린 잠깐의 틈.
손가락 사이 좁은 시야 위로 무언가 불쑥 나타나 손가락 사이에 있던 대환단을 덥썩 가로채 간다.
그 난동에도 꿋꿋이 강의 머리 위에 배를 깔고 앉아있던 새끼매 단아였다.
평소 단리강이 먹이를 줄 때처럼 머리 위로 대환단을 올라오자 고개를 쭉 내밀어 그것을 물어 간 것이었다.
"어?"
사라진 대환단에 상황을 파악 못 하고 있는 사이.
돌돌돌. 부리를 위로 들고 대환단을 입안에서 굴리던 단아는.
꿀꺽.
한입에 삼켜버렸다.
"어머."
"호오."
"어이쿠!"
"이런."
"…."
"아미타불."
"하."
대환단을 삼킨 단아가 경악하는 일행들을 내려보며 큰 눈망울을 깜빡였다.
"삑?"
허탈한 표정으로 이제 허공에 검지와 엄지 사이를 열었다 닫는 단리강.
스윽. 대환단의 맛이 괜찮았는지 단리강의 머리 위에서 아래로 고개를 내린 단아가 부리로 이마를 콕콕 찍었다.
강은 곧바로 그런 단아를 잡아채기 위해 머리 위로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영리한 단아는 강의 손이 닿기 전에 푸드덕 날아가 버렸다.
"이, 이이이놈 단아-!"
이미 저 멀리 올라가 그의 머리 위로 빙빙 돌고 있는 단아를 향해 불꽃을 쏘아내는 강.
그리고 밑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일행들.
단아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신혜가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걸 어쩌죠, 자명. 우리 단아가….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어떻게 단아를 불러 토해내게 해볼까요?"
"아미타불. 괜찮습니다, 박 소저. 이 또한 부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귀중한 대환단이긴 했지만 저 괘씸한 단리강의 뱃속에 들어갈 바엔 차라리 단아가 삼킨 것에 만족하는 자명이었다.
나무 위에서 강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노옴-! 내려오기만 해봐라! 배를 갈라버리겠다!"
"삐익!"
화르르르! 화르륵!
하늘을 수놓는 푸른 불꽃.
그런 단리강을 조롱하듯 수려한 날갯짓으로 유유히 불꽃을 피해내는 단아.
새끼매와 단리강의 사이가 본격적으로 틀어지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 * *
"노란 깃이 하나씩 자란다더니, 대환단의 기운을 흡수하여 영물이 되었구나. 껄껄껄!"
"삐익-! 삐익-!"
뜻밖에 오랜 벗을 만난 적은 재회의 기쁨을 누렸다.
그가 품에 안겨 한껏 어리광을 부리는 단아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녀석, 용케도 날 알아봐 줘서 고맙다."
상아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물었다.
"아시는 영물인가요?"
칠제 쯤 되면 영물과도 안면을 트고 다니는 걸까?
어안이 벙벙한 상아의 질문에 적이 유쾌하게 웃었다.
"영물이다마다. 단아는 원래 총명한 친구였지."
"단아요?"
칠제의 일대기를 담은 칠웅기.
무림의 필독서인 바로 그 칠웅기에서 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궁제의 애완매로 일곱의 위대한 여정과 함께했다던 해동청이 아니던가?
칠웅기가 시중에 출간되었을 때는 해동청을 구하려는 중원의 부호들로 인해 난리가 나기도 했었다.
"어머머!"
상아는 양손으로 두 뺨을 감싸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
신물까지 모두 게워낸 재희가 풀숲을 헤치고 나왔다.
비몽사몽 풀린 눈으로 비틀비틀 걷던 재희가 남궁적의 품에 안겨있는 단아를 발견했다.
눈가를 좁혔다 폈다 반복하던 그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씁. 술을 너무 마시긴 했군. 헛것이 다 보이네."
그러나 다시 눈을 떠봐도 금색의 괴조는 그대로였다.
그리고 단아와 단리강의 손자의 눈이 마주쳤다.
머리를 긁적이던 재희가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하하하! 안녕하시오, 조류공? 만나서 반갑소이다."
재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단아가 갑자기 괴성을 내질렀다.
"괘애애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