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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제귀환록-116화 (116/282)

116화

남궁적의 옆에서 나란히 말을 몰던 마림광은 남궁적의 행선지를 전해 듣고는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하하. 이런 우연이. 저희도 마침 문파와 거래하던 성도의 비단상인들에 변고가 생겼다 하여 사천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변고란 적과 일행들이 성도에 들렀을 때 일어난 사천무림맹 사건을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적은 모른 척 시치미를 뚝 뗀다.

"기막힌 우연이긴 하구나."

"사천까지 쭉 제를 모실 수 있게 되었으니 하늘이 도우신 게지요! 제 대에 이런 영광이 찾아오다니. 아직도 믿을 수 없습니다. 동행을 허락해주셔서 다시 한번 제께 감사드립니다."

쓸데없이 말이 많은 건 여전하구만.

사실 적은 쉬지 않고 나불거리는 마림광에 동행을 허락한 걸 살짝 후회 중이었다.

그렇다고 선의로 가득한 마림광을 매몰차게 거절하기에는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저 너는 떠들어라, 나는 갈 길 가련다라는 마음으로 말을 몰고 있었다.

마림광은 시큰둥해진 적의 반응을 알아챈다.

칠제의 열렬한 추종자인 그는 칠웅기를 일백은 족히 정독하며 칠제의 성격을 꿰뚫고 있었다.

‘내가 귀찮아지신 게로군.’

살짝 무안해진 마림광이 목표를 바꾸었다.

마침 그가 친애하는 의형의 아들이 여기에 있었다.

"재희야."

"예? 저요? 갑자기?"

"하하. 무림에 돌아오신 제를 알아 뵙고 모시고 있다니. 그 소문을 들었을 땐 어찌나 기쁘던지. 내 언젠가 네가 큰일을 해낼 줄 알았다. 지금쯤 의형께서도 네가 자랑스러우실 게다."

"아. 예, 뭐. 하하. 하하하."

재희가 마림광을 피하고 싶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마림광도 재희가 자신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다음으로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척마대주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고 있는 기특한 후배를 칭찬한다.

"상아도 고생이 많구나. 어째 내가 척마대주로 있던 시절보다 훨씬 더 훌륭하지 않으냐. 천지사방에서 네 이름이 들리는 걸 보면, 꼭 조 선배님이 척마대주로 계시던 시절 같다."

"과찬이십니다 선배님. 소녀가 선배님의 위업을 따라잡기엔 아직 한참 모자란답니다."

"당연하지! 하지만 조만간 일거다. 내 언제나 너를 응원하고 있다. 그리고 진삼."

"말씀하십시오 마 문주님."

"마 문주는! 의형이라 부르라 한지 10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그리 부를 셈이냐?"

"북풍검문의 문주님을 사사롭게 부를 순 없습니다."

"알았네 알았어. 마음대로 부르게. 늘 자네에게 감사하네. 자네가 재희의 곁에 있어 주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굉장히 꺼림칙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이는 진삼이었다.

마지막으로 마림광은 고려에서 온 미화공주와 녹림왕 지찬을 돌아보았다.

"그쪽 분들은 처음 뵙는 분들이시구려. 헌데, 한 분은 어째 낯이 익은 것 같은데…."

그는 지찬의 얼굴을 살펴보며 미간을 좁힌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애매한 순간 남궁적이 말했다.

"커다란 놈은 내 제자니라."

눈을 휘둥그레 뜬 마림광이 고삐를 당겨 말을 속도를 늦췄다.

지찬과 말머리를 나란히 한 그가 지찬을 향해 포권을 올렸다.

"도객께선 제의 후예셨군요. 이 마림광이 인사드립니다."

"크하하핫! 거 배우신 분이셨구만! 반갑소 마 문주. 오 이런. 그러고 보니 성씨가 같구만. 나 마지…."

빡!

재빨리 지찬의 뒤통수를 후려친 재희가 그의 멱살을 잡아끌고 귓가에 속삭였다.

"광풍검이라고 못 들어봤냐? 산 채로 포 뜨이기 싫으면 입 다물어라."

"어어? 광풍검? 저 사람 좋아 보이는 양반이?"

광풍검이라는 이름을 들은 지찬은 등골이 저릿해지는 기분에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는 붙잡은 마두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다시는 검을 잡을 수 없도록 근맥을 모두 절단시켰다.

오죽하면 하북과 하남 일대에서는 우는 아이에게 광풍검이 잡아간다는 말로 울음을 그치게 만들 정도였다.

차라리 깔끔하게 마두의 목을 베고 다니는 협나찰이 훨씬 더 자비롭지 않냐는 것이 세간의 평가이기도 했다.

지찬도 어린 시절엔 광풍검이 잡으러 온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란 세대였다.

한편으로는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야 족제비.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질렀냐? 녹림도가 마두는 아니잖아?"

한숨을 푹 내쉰 재희가 다시 속삭였다.

"칭제."

"아차!"

속닥거리는 두 사내의 모습에 마림광이 서운한 투로 말했다.

"무슨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시오? 나도 좀 들어봅시다."

기겁한 지찬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어어어! 재미없소!"

"거 참. 사람 서운하게."

뒤에서 말을 몰던 두 여인이 숨죽여 쿡쿡 웃었다.

미화공주와 함께 말을 타고 있던 혜림이 눈을 깜빡였다.

남궁적과 일행들은 이대로 조금은 피곤하지만, 평화로운 여정이 계속될 줄 알았다.

귀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날아든 화살이 북검문의 말 엉덩이에 꽂히기 전까지는.

삐이이이이익-! 퍽!

"이히히힝!"

화살에 맞은 말이 고통에 울부짖었다.

동요한 건 화살에 맞은 말뿐만이 아니었다.

대열을 이루던 말들도 화살이 낸 소음에 깜짝 놀라 앞발을 들어 올렸다.

여기저기서 낙마한 무사들이 재빨리 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고삐를 잡았다.

난리는 십 분이 넘도록 이어졌다.

간신히 사태를 잠재운 무사들이 말의 엉덩이에 꽂혀있던 화살을 뽑아 마림광에게 가져왔다.

화살을 알아본 남궁적이 말했다.

"효시로구나."

효시는 화살촉 바로 위에 달린 타원 모양의 작은 피리로 소리를 내는 화살이었다.

그러나 일방적인 효시와는 달리 소리가 지나치게 큰 감이 있었다.

궁술에 정통한 미화공주가 다가오더니 곁눈질로 화살을 살핀 후 말했다.

"동물의 뼈를 갈아 만든 효시입니다. 화살 전체가 피리가 되는 구조이지요. 철시보다 만들기 까다로운 것인데."

큰 연회나 행사 때나 사용하는 귀한 화살이었다.

미화공주의 설명에 적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찌 이런 화살이 날아와 말의 엉덩이를 찔렀을꼬?"

엽사가 실수로 날린 화살일리는 없고.

일부러 말을 놀래 키기 위해 쏘았다고밖에 볼 수밖에.

하지만 백도검문의 일문인 북풍검문의 깃발이 걸린 행렬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다니고 있는 길은 관도도 아닌 상로.

미치지 않고서야 도적 따위가 얼씬거릴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흐음. 수염을 쓸어내린 적이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절대고수인 남궁적조차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다시 고개를 돌린 적의 눈에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림광의 얼굴이 보였다.

"짚이는 구석이 있느냐?"

북풍검문이 원한을 진 일이 있냐는 말이었다.

마림광은 원한은 없지만 짚이는 구석은 있었다.

잠시 말을 꺼내길 주저한 그가 입을 열었다.

"요즘 백도검문을 노리고 다닌다는 쌍룡성이 아닌가합니다."

"쌍룡성? 소호가 만들었다는 문파 말이더냐?"

고개를 끄덕이는 마림광.

그가 대답했다.

"다들 쉬쉬하고 있지만 최근 쌍룡성의 기습으로 의심되는 피해가 계속 보고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찾으려 해도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도리가 없습니다."

"천곽은 아무 말 않더냐?"

"몇 번을 여쭈었지만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다."

적은 일전에 미화공주를 처음 보았던 객잔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심상치 않은 내용이라 생각했으나 설마 직접 겪게 될 줄이야.

수심에 잠긴 적의 얼굴에 마림광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 작은 의심일 뿐입니다. 혹시 모르니 문원들에게 속도를 높이고 경계를 강화하라 이르겠습니다."

"그리 하거라."

그러나 걸음을 재촉한 지 한 시진 후.

의문의 효시는 여지없이 다시 날아들었다.

삐이이이익-!

깡!

북원검문의 검수가 휘두른 칼에 말을 노린 화살이 튕겨져 나갔다.

활을 들고 대기 중이던 미화공주가 즉시 시위를 걸어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화살을 쏘아냈었다.

쇄애액-! 파사사삭! 퍼억!

풀숲을 헤치고 날아간 화살 끝에 무언가 적중하며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즉시 말에서 뛰어내린 상아와 재희가 화살이 날아간 방향을 향해 뛰어갔다.

뒤를 이어 북풍검문의 검수들과 진삼이 쫓아간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엔 피가 묻은 미화공주의 화살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주위를 샅샅이 수색해 보았지만 피를 흘린 자국이나 사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 * *

"말을 버려라."

사천으로 가는 걸 포기하고 십언으로 길을 돌려야 하나 고민 중이던 마림광에게 적이 말했다.

그의 지시에 마림광은 난감해한다.

"말을 버리는 건 흉수들이 원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버리라는 것이다."

그제야 마림광은 적의 의도를 눈치챘다.

적은 효시를 날리며 괴롭히는 흉수들이 모습을 드러내길 원했다.

만약 저들이 도제가 북품검문과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면 이런 짓을 벌이지 못했을 터.

말을 버린다면 순순히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았다.

칠중 도제께서 함께하고 계신다.

진정 흉수가 쌍룡성의 살수들이라면 머리를 조아릴 것이다.

그들 역시 백도검문과 마찬가지로 칠제의 후예들이었다.

"그들의 정체가 진정 쌍룡성의 살수들인지 확인할 수 있겠군요. 이럴게 아닙니다. 당장 칠성기를 그려다 깃발을 내걸까요?"

"아니. 그러진 말거라."

적은 흉수들이 칠성기를 보고 아무 말 없이 물러나는 걸 원치 않았다.

남궁적의 명을 받든 마림광이 즉시 문원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일행들과 북풍검문은 말을 버리고 다시 여정을 속행한다.

모두 언제든 다가올 기습을 대비하여 칼자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행렬엔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이 완연했다.

그러나 시끄러운 화살도, 살수들의 기습도 없었다.

만반의 준비가 무색해 질만도 했지만 긴장을 늦추진 않았다.

해가 산등성이에 걸려있었다.

모두가 기습이 있다면 어둠이 찾아온 후 일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적은 걸음을 걸으며 기감을 확대했다

눈으로 보이는 건 없었다.

하지만 풀이 움직이는 미세한 소리.

그리고 바람에 섞인 희미한 쇠 냄새가 오감을 자극한다.

흉수들은 일행들과 붕품검문이 말을 버린 이후부터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남궁적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눈치채지 못한 것은 그들의 잠신술이 그만큼 높은 경지에 닿아있기 때문이었다.

‘소호의 후예들이 맞구나.’

그의 벗인 암제 하소호는 쌍사비라는 전설적인 살문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소호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절대 눈으로 찾을 수 없었다.

지금 그들의 곁을 맴도는 살수들처럼.

결론은 나왔다. 남은 것은 저들이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이냐는 것이었다.

‘소호가 어째서?’

소호는 비록 살문의 후예이나 일곱 중 가장 벗들을 소중히 생각하던 친구였다.

적은 고개를 감추는 태양의 반대편에서 떠밀려오는 어둠을 바라본다.

‘직접 물어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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