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제귀환록-120화 (120/282)

120화

백천검가를 세워 목마른 검객들에게 절세검법을 베풀고.

정도맹을 창립하여 북적에 의해 무너진 강호의 협의와 정의를 다시 세운 검제였다.

부처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을 등불로 삼는 승려들처럼, 검제의 가르침을 뼛속에 새기는 백도검문이었다, 그리고 백천검가는 그 백도검문이 뻗어 나온 원류.

이곳에 앉아있는 사람들 중 셋이 백도검문의 그늘 아래서 무공을 배우고 자라왔다.

특히 이사후에게 거둬져 검가의 은혜로 협객이 될 수 있었던 상아가 강하게 부정했다.

"오해이실 겁니다. 검제께선 권제와 함께 무림의 큰 스승이십니다. 검제께서 그 누구보다 정의로우시다는 건 온 천하가 아는 사실입니다."

무영은 그런 상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무림에 협중보옥이라 불리는 상아의 사연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픈 과거를 올곧은 신념으로 딛고 자라난 그녀는 백도검문의 표본과 같은 협객이었다.

"천검이 정의로운 사람이며, 무림의 영웅이라는 건 우리도 알고 있다. 그러나. 복수는 별개의 일이다. 암제라 불리었던 소호형님은 내 아버지이며 스승이셨다. 쌍룡성은 스승과 부모의 복수를 갚는 일에 옳고 그름을 따질 만큼 멍청하지 않다."

그의 대답에 상아의 옆에 조용히 앉아있던 재희가 말했다.

"그 복수가 무림의 근간을 흔들고,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의 피를 부르는 일이라도요?"

무영의 시선이 재희를 향했다.

쌍룡성과 같은 아픔을 지닌 천산의 비운아.

때문에 쌍룡성은 재희를 수년간 지켜보았다.

만약 재희가 복수의 의지를 보였다면 천산신교와 힘을 합쳐 복수를 도모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재희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속내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늘에서야 재희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재희를 바라보는 무영의 눈동자가 모닥불의 불빛에 번들거렸다.

"두렵구나."

"전, 잘 모르겠습니다."

무영은 흉한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는 자신의 대의를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지를 사람이다. 너도 알잖느냐? 그가 자신의 대의를 위해 죽인 제는 소호형님만이 아니었다."

10년 전 천산신교와의 전쟁.

검제는 이미 전쟁을 멈춘다는 대의를 위해 친우를 죽인 과거가 있었다.

"원수가 목적을 위해 인륜을 저버릴 지언데, 무엇을 주저한단 말이냐. 길들여진 개는 늑대를 사냥할 수 없는 법이다. 개가 늑대를 죽이기 위해선, 늑대가 되어야하는 법이지."

"개가 어떻게 늑대가 될 수 있겠습니까?"

"늑대가 될 수 없다면 들개무리라도 되어 물어뜯어라. 그것이 무림의 오랜 법도다."

남궁적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복수에 미쳐 살았었기에 무영의 심정에 충분히 공감했다.

또한 그가 아는 천곽은 친우보다, 또 심지어 자신의 목숨보다 신념을 우선시하는 사내가 맞았다.

"허나, 천곽은 소호가 천살성이라는 이유로 죽일 만큼 어리석지 않다."

타인에게 신념을 관찰하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게 엄격했던 천곽이었다.

천곽과 가장 많이 부딪혔던 남궁적이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복수에 눈이 멀어있던 젊은 날의 남궁적 옆에 천곽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그는 도제가 아닌 세기의 대마두라 불렸을지도 몰랐다.

"그는 항상 확실한 근거와 믿음을 가진 후에야 신념을 행동으로 옮겼다. 천곽이 소호를 죽인 게 사실이라면 반드시 이유가 있을 터."

무영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제이시여. 어떤 이유가 있든 검제가 소호형님을 죽였다는 사실은 변치 않습니다. 무어라 말씀하신들 저희는 복수를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나는 너희에게 복수를 단념하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더 나눌 얘기가 없군요. 북풍검문은 제 목숨 살려주신 값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저희는 이대로 복수를 행하겠습니다."

따닥. 딱.

남궁적이 던진 마른 잔가지가 모닥불에 타들어 가며 소리를 내었다.

"나 하나를 꺾지 못했거늘, 어떻게 천곽을 죽이려 하는가."

조용히 무릎을 잡고 일어선 무영이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올렸다.

사라락-.

잎사귀가 스치는 소리와 함께 모닥불에 비친 나무의 그림자들 속에서 검은 복면을 쓴 살수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리떼처럼 숲속을 가득 메운 살수들의 숫자는 무려 일천을 헤아렸다.

모두가 암룡답영보를 익힌 쌍룡성의 살수들이었다.

갑작스런 살수들의 등장에 당황한 일행들.

하지만 남궁적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단언했다.

"모두 죽을 것이다."

"설사 우리가 죽더라도. 검제는 그가 이룩한 것들을 모두 잃게 될 겁니다."

"묻노라 소호의 제자야. 소호는 너에게 복수를 바랬느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적이 이어 말했다.

"칠약. 일곱이 서로에게 지키기로 하였던 약속. 처음엔 그저 술김에 시작한 장난이었으나. 천곽이 소호에게 내건 약속으로 장난이 아니게 되었지. 너는 아느냐? 천곽이 소호에게 어떤 약속을 걸었는지를."

무영은 알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천살의 손으로 사람을 해치지 말라. 제이시여, 소호 형님은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소호가 천곽에게 내건 약속은 아는가."

"…."

적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본다.

남궁적의 동공에 북쪽 하늘에 걸린 일곱 개의 별 중, 맨 끝자락에 걸친 별이 담긴다.

실로 소호다운 약속이었다.

"천살성이란 피를 부르는 광인이 아니다. 태어나서부터 죽음을 이해해버린 비운의 별이다. 나는 알지 못하나 소호에겐 죽음이란 아주 하찮은 의미였지. 자신의 목숨조차도."

천살은 살아갈 이유를 찾았다.

죽음보다 죽음으로 인해 슬퍼할 벗들을 위해.

"소호는 죽는 날까지 벗으로 남아달라 했다. 천곽뿐만 아니라 우리 여섯 모두에게 같은 약속을 걸었지. 나는 소호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다."

적이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긴 재희를 한번 스쳐보고는 무영에게 말했다.

"일곱의 일이다. 진정 소호가 천살성이라는 이유로 죽었다면 나는 마땅히 벗의 복수를 할 거다."

"이유가 있다면 그를 용서하실 셈이십니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겠지만, 글쎄. 나는 그래도 너희가 나서는 걸 원치 않아."

칠제의 일에 너희가 나서지 말라는 의미였다.

"저희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진짜 가혹한 처사는 내가 천곽을 위해 너희를 죽이는 것이지.:쌍룡성이 복수에 희생되지를 않길 바라는 남궁적의 마음은 충분히 전해졌다.

"소문으로 들었던 것과는 많이 다르시군요."

"사람은 나이를 먹다 보면 변하기 마련일세. 자네처럼. 소호의 후예들아. 복수가 아닌 소호의 뜻을 이어라. 한때 복수를 위해 살아온 선배의 조언이니라."

무영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도제는 다른 선택지를 주지 않았다.

"그래도 저희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러나 남궁적으로 인해 적당히 타협한다.

"하지만 제의 뜻을 받들어 복수의 시일을 미루겠습니다. 도제시여, 당신이 세 번째가 된다면, 당신을 위해서 하는 복수는 말리지 못하시겠지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무영의 신영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천명의 살수들도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춘 후였다.

일행들의 야영지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정적이 감돌았다.

남궁적은 말없이 마른 가지를 꺾어 불 속에 던졌다.

따닥 따닥.

그는 한동안 타오르는 장작불을 가만히 응시했다.

* * *

날이 밝고 다시 여정을 떠날 준비를 하는 일행들.

야영지를 정리하던 재희가 근처의 묶어둔 말의 안장에 걸린 낯선 주머니를 발견한다.

주머니를 열어보자 그 안엔 은자가 가득 담겨있었다.

"어라?"

무영이 놓고 간 것이 틀림없었다.

재희가 다른 일행들에게 은자 주머니의 존재를 알리자 남궁적이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돌려줄 방법도 없다. 여비로 쓰자꾸나."

재희는 자신이 관리하겠다면 냉큼 품속에 챙겼다.

찝찝한지 미간을 살며시 찌푸린 상아를 본 재희가 능청스레 주절거렸다.

"할아버님이 말씀하시길. 어른이 주는 돈은 거절하는 거 아니랬습니다."

"검제께서요?"

"어, 아니. 잘 아는 할아버님께서요. 하하."

여비도 다시 채웠겠다, 일행들의 여정은 다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말을 타고 며칠을 상로 위를 내달린 일행들이 중간에 마을 하나를 거쳐 가려던 차였다.

사내가 마을 입구에서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들의 앞을 가로막은 그가 삿갓을 벗자 지찬이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엇? 너는 합비에서 그때 그!?"

사내. 종오가 도제를 향해 칠제의 예를 취했다.

"종남의 마지막 제자 종오가 칠중도제를 뵙습니다."

남궁에 찾아온 검가의 원로와 함께했으며, 염가장에서 수상을 제안을 해왔다는 사내.

그는 자신을 오래전 멸문한 종남의 제자라 밝혔다.

재희는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경계한다.

남궁적도 종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네가 염가장에 천곽의 전언을 전했다 들었다. 헌데 어찌 검제가 아닌 종남의 제자라 밝히느냐?"

"검제께서 갈 곳 없는 저를 거둬주셨기 때문입니다."

"천곽이 좋은 일도 했군, 그래. 우리가 올 것을 어떻게 알고 기다리고 있었느냐."

종오는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재희가 마장에서 말을 구매할 때 쓴 보증서였다.

"검제의 명을 받아 도제와 소가주를 찾아다닌지 오래 되었습니다. 늘 뒤늦게 헛걸음을 하는 사이에 제께서 이것을 보내주셨습니다."

"천곽이 나와 재희를 찾아?"

"예. 짧은 전언과 소가주에 관한 지시가 있었습니다."

"말하라."

남궁적을 향해 포권지례를 올린 그가 검제의 전언을 읊었다.

"오랜 벗을 찾아가고 싶었으나, 약속으로 인해 벗을 찾을 수 없으니 악양에 가을이 오기 전까지 벗을 방문을 기다린다 하셨습니다."

그다음 재희를 보며 말했다.

"또한 소가주는 속히 검가로 귀환하라 명 하셨습니다."

검제가 거두고 난 10년 동안 줄곧 방치되다시피 한 재희였다, 종오는 난생처음 받아보는 검제의 명령에 의아해하는 재희에게 이어 말했다.

"약속의 시간이 되었다."

종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일행들이 재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있던 표정을 푼 재희가 실없이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손자가 보고 싶으신가 봅니다. 쩝. 제의 명을 어길 수도 없고. 아쉽지만 저는 악양으로 돌아가 봐야겠군요."

옆에 있던 진삼이 작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퇴근인가."

"이보게 하 호위. 지금 정든 분들과 헤어지려는 차에 그런 소리가 나와?"

"당신 입에서도 그런 소리가 나오면 안 되지."

그러나 종오는 뜻밖의 말을 전한다.

"검가로 귀환하는 사람은 오직 소가주만이오 쾌검일절."

눈썹을 찡그린 진삼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종오를 쏘아보았다.

"나는 소가주의 호위요."

"내가 전하는 건 천검께서 직접 내리신 명이오."

"그거참 수상한 명령이시군. 나는 검제의 전언을 전한다는 너를 알지 못한다. 내겐 소가주의 안전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 네가 검제의 명을 들고 왔다는 증거를 대라."

진삼의 요구에 종오가 말없이 검자루를 쥐었다.

그 즉시, 진삼이 검자루를 쥐고 쾌검격을 준비한다.

스릉.

하지만 진삼의 경계가 무색하게 종오는 꺼내든 검을 진삼에게 휙 던졌다.

검을 받고 검신에 새겨진 글자를 확인한 진삼이 눈을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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