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제귀환록-134화 (134/282)

134화

"저희는 이만 협객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남쪽으로 갈까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일행들이 배에 오르기 전 야협들은 작별을 고했다.

계속 도제를 모시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그들은 자신들의 의무를 잊지 않았다.

욕심보다 협객으로서의 신념을 우선시하는 야협들.

남궁적은 그들의 보며 몹시 흡족해 하였다.

"그대들의 협명이 들리는 날을 기다리겠느니라."

강호에 칠제의 응원을 들을 수 있는 협객이 얼마나 있을까.

감개무량한 야협들은 포권지례를 올리며 남궁적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도록 철저마침하겠습니다. 강녕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비록 하룻밤의 인연에 불과했지만 함께 지내는 동안 유쾌한 추억을 쌓았던 일행들은 못내 아쉬운 마음으로 그들을 배웅했다.

작별의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았을 때였다.

"노 선배님께서는 무림에 명성이 높으신 분인가 봅니다."

낯선 목소리가 찬물을 끼얹었다.

귀티가 흐르는 곱상한 외모의 미공자.

그는 마치 처음부터 한 일행이었던 것 마냥 미화공주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행들은 굉장히 껄끄러운 눈으로 미공자를 바라보았다.

사내의 옆에서 좌불안석이던 추공이 미공자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전하. 아무래도 전하를 반기는 눈치는 아닌 듯 하옵니다."

그러나 충언을 올리는 사내의 얼굴을 밀어낸 사내는 대뜸 일행들을 향해 자신을 소개했다.

"좀 전엔 은혜를 입었는데 제대로 인사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북경 송문가의 여섯째 아들. 송호영이라 합니다. 부디 제가 은인들과 함께하며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해주시겠습니까?"

북경의 송문가라면 나라의 재상을 여러 번 배출하였던 명문 중의 명문가였다.

무림에도 알려질 만큼 유명한 가문의 공자.

그러나 일행들은 여전히 짜게 식은 눈을 하고 있었다.

"요즘 명문가의 공자님도 전하라는 소리를 듣고 다니던가?"

진심으로 궁금해 하는 지찬의 중얼거림에 진삼이 냉소했다.

"반역이지."

게다가 송문가라면 무림에도 잘 알려진 소문이 있었으니.

"아들이 없어 골머리를 썩고 있다는 송문가에 여섯 번째 아들이요?"

금방 지어낸 거짓말이 들통나자 당황한 송호영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추공이 또다시 그에게 속삭였다.

"어떻게 외가의 사정도 모르십니까? 전하의 외조부이신 송 대학사님께서 아신다면 심히 섭섭해하실 겁니다."

"다 자네 때문이니깐. 그 입 다물게 추공."

어쩔 수 없지.

송호영은 차마 말할 수 없던 비밀을 털어 놓기로 결심한다.

"은인들에게 거짓을 고하려던 제 불찰입니다. 사실 저는…."

듣는 이가 없는지 주위를 한번 살핀 그가 진지한 얼굴로 속삭였다.

"주정훈이라 합니다."

주정훈. 그 이름을 들은 일행들은 꽤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족이라고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설마 두 번째 황자일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까닭이었다.

무려 황위 서열 이 위의 황족.

사실상 그는 황태자를 제외한 북경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놀랍기보다는 어이가 없던 진삼이 중얼거렸다.

"황궁이 발칵 뒤집혀 졌겠군."

정훈은 비련에 잠긴 여인마냥 간곡한 어조로 호소했다.

"아바마마와 대신들의 상심이 크겠으나 본 황자의 큰 뜻을 막을 순 없다. 그대들은 나의 은인. 부디 강호의 협객으로 살아갈 나를 송호영으로 대우해다오."

그 꼴을 잠자코 듣고 있던 일행들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이들이 들었다면 당장 머리를 박고 예의를 갖추어야 했음이 옳았다.

그러나 일행들 중엔 무림의 황제나 다름없는 칠중도제가 있었다.

굳이 과하게 예의를 갖출 필요도 없으며, 본인도 원하지 않은 듯했다.

미화공주가 자칭 송호형에게 말했다.

"즐거운 유람이 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황자전하."

드디어 나를 바라봐 주는구나!

미화공주가 반응을 보이자 짐짓 어깨를 펴 자세를 바로 고친 그는 눈을 감고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유람을 나온 것도 아니고 이제 황자전하도 아니요. 황자가 아닌 나는 무림초졸의 무명 강호일 뿐. 나를 강호의 후배로 대해 주시오."

이 나의 진심이 전해졌는가?

어째 적막이 흐르는 기분이 들 때쯤이었다.

추공이 눈을 감고 있는 그에게 언질을 주었다.

"전하. 그냥 배에 올라갔습니다."

"뭐?"

화들짝 놀란 그가 눈을 뜨고 시선을 돌리니 일행들은 이미 배에 오른 후였다.

"내 말이 믿기지 않았나?"

"아니요, 믿지 않는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왜?"

"글쎄요. 무림인이라서?"

그럴 리가.

분명 자신을 가르쳤던 백도검문의 명숙조차 고개를 조아렸거늘.

이런 반응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던 송호영이었다.

충격이 컸는지 호영은 망부석이 되어 일행들이 있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추공이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위로를 건넸다.

"어디 태자전하의 이름이 부족해서겠습니까? 그만큼 자유로운 무림인들이라서 그런 거니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자, 천산신교를 구경하고 싶다지 않으셨습니까? 어서 해치우고 궁으로 돌아갑시다."

"추공."

"경청하겠습니다, 전하."

"처음이야."

"강호를 유람하는 동안 익숙해 지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되도록 지금처럼 정체를 밝히지 마시구요."

"아니. 내가 황자임을 알고도 이렇게 대하는 여인은 처음이란 말일세."

"예?"

역시 말에서 떨어질 때 머리를 다치신 게 아닐까?

추공은 서둘러 사천에 용한 의원부터 찾아야겠다 결심하는 사이였다.

성큼성큼 걸어간 호영이 일행들을 올랐던 배에 올랐다.

"전하! 그 배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타십니까?"

"임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네."

"…맙소사."

벌써 눈이 돌아가셨구나.

* * *

멀찍이 떨어진 탁자에 앉아 이쪽을 연신 힐끔거리는 두 사내.

일행들은 자신들을 따라 배에 탄 게 분명한 두 사내를 두고 회의가 한창이었다.

"어쩌죠?"

"킁. 어쩌긴 뭘 어째? 저런 걸 붙이고 다닐 바엔 차라리 두들겨 패서라도 쫓아내야지."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미리 말하고 패라. 뒷일은 녹림이 감당해."

"내가 미안하구나. 섣불리 활을 꺼내버려선."

"언니 잘못이 아닙니다. 자책하지 마세요."

"허면 저들을 어쩐단 말이냐. 차라리 황자라는 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분명 동행을 원치 않는다는 신호를 몇 번이나 주었는데도 악양까지 따라올 기세였다.

그리고, 미화공주는 일행들 중에서도 노골적으로 자신을 향하는 황자의 시선에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본녀의 얼굴이 또 사고를 치는구나. 어마마마께선 나를 어찌 이리 낳으셨을꼬."

그렇지 않아도 강호를 주유하는 동안 수많은 문제를 만들어온 미화공주였다.

일행들과 함께하는 동안은 그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아 방심하고 면사와 죽립을 쓰고 다니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죄책감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결국 최후의 수단을 강구했다.

"사백님. 감히 소녀가 간청 드리옵니다. 부디 사백님의 권위를 빌려 저들을 쫓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가만히 창밖의 물결을 구경하던 적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송호영과 추공 쪽으로 쓱 눈길을 주더니 잠시 고민에 잠겼다.

"저들을 쫓는 자가 있었지."

활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자였다.

‘암살의 위험에 시달리는 황자라.’

고민하던 그의 머릿속으로 문득, 장가장에서 진삼이 했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몇해전 창제의 아드님과 부인께서 무림의 살수에게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던 적이 있습니다.

혹시 그와 관련된 일이 아닐까.

적은 만일 그렇다면 두고 볼 수는 없다 여겼다.

"차라리 곁에 두는 게 마음이 편하겠구나."

적이 염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챈 상아가 물었다.

"혹시 황자를 쫓던 추격자를 염려하십니까?"

"그래. 혹을 붙여 목숨 하나를 살릴 수 있다면, 그 또한 협행인게지."

"하지만 어르신. 자칫 황실의 권력다툼에 간섭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상아가 염려하는 것은 관무불가침이었다.

관과 무림은 서로 간섭하지 않겠다는 건국제와 칠제가 하였던 약속이 있었다.

당사자인 남궁적이 모를 리 없었다.

"허나 황자가 강호를 유랑하다 죽는다 해도 어찌 무림과 관계가 없다 할 수 있을까. 황실의 권력다툼이, 자칫 무림의 소행이라 오명을 살까 염려스럽다."

남궁적은 지난날 건국제와 하였던 약속보다 황실과 백성들의 무림에 관한 인식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먼저 걱정했다.

또한 저 철없어 보이는 황자가 낯설지 않은 적이었다.

"속을 썩이는 것도, 하는 짓도. 재희와 닮은 청년이로다. 내 못 본 척하려 했으나 마음에 걸리는구나."

진삼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며 소스라쳤다.

어쩐지 거부감이 격하게 든다더니.

남궁적의 말마따나 황자에게서 재희의 기운이 물씬 나고 있었던 이유였다.

적의 결정에 더 이상의 반문은 없었다.

결국 불편을 감수하기로 한 일행들.

선원이 악양으로 향하는 배의 출항을 알렸다.

황자와 일행들은 배 위에서 서로 거리를 둔 채 이틀 정도를 지냈다.

그리고, 서쪽으로 나아가던 배는 돌연 매캐한 연기구름을 맞이한다.

"탄내가 심하네."

코를 틀어막은 상아가 갑판 위로 나와 밖을 살폈다.

그리고 그녀는, 눈앞의 펼쳐진 광경에 재빨리 남궁적을 찾았다.

"어르신! 밖을 보셔야겠습니다."

차를 홀짝이던 남궁적이 다른 일행들과 함께 갑판으로 나왔다.

강변을 따라 이어진 작은 어촌 마을들. 그리고 저 멀리에서도.

한차례 화재가 휩쓸고 간 자리 위로 잔불이 일으킨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이 탄 흔적이 이어지지 않아 있었다.

단순한 화재가 아니다.

판단을 내린 적이 선장을 불러 요청했다.

"배를 세워주게."

잠시 배를 세우는 것쯤이야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선장은 선객인 일행들을 걱정하였다.

"도적들의 소행일지도 모릅니다. 가급적이면 배를 타고 지나가시지요."

"도적들의 소행이라면 더욱 내려야겠네."

남궁적의 말에 일행들이 협객일 거라 짐작한 선장은 즉시 강가에 배를 세웠다.

화려한 경공을 밟아 배에서 뭍으로 뛰어내리는 일행들.

그리고 또 다른 사내가 뒤이어 난간을 밟고 뛰어올랐다.

"전하! 위험합니다!"

추공의 만류에도 위태롭게 날아오르더니 착지에 실패하여 바닥을 굴렀다.

엉금엉금 난간을 붙잡고 내려와 물속을 헤엄쳐온 추공이 호영을 일으켜 주며 말했다.

"배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도적들에게 옥체가 상하시기라도 하면…."

몸을 일으킨 호영이 추공의 손을 뿌리쳤다.

"내 백성들이 도적들에 손에 고통받고 있다. 내 어찌 편안히 배에 타고 있을까."

그는 걱정스런 눈으로 자신을 보는 일행들에게 걸어가 포권을 올렸다.

"함께하게 해주십시오. 협객님들께 작게나마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황자를 위험에 끌어들일 수 없다는 건 일행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진삼이 나서 거절하려던 차.

남궁적이 말했다.

"훌륭하다. 허락하노라."

"감사합니다, 선배님!"

고개를 숙이는 호영.

추공이 기겁하며 외쳤다.

"전하. 고개를 숙이시면 안 됩니다! 체면을 지키십시오!"

"여긴 북경이 아니다. 무림의 법도 아래 나는 강호의 바다에 한낱 모래알 한 알뿐이다."

추공은 자신을 낮추는 황자의 언행에 더욱 기겁했다.

그러나 호영의 보는 일행들의 시선은 사뭇 온화해져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