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강변의 가장 가까운 마을을 찾은 일행들은 눈 앞에 펼쳐진 참혹한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잿더미가 된 마을.
화재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잔불이 새까만 연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챙-! 챙챙!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행들은 즉시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경공을 밟았다.
두 패로 나뉜 수십 명의 무림인들이 서로 뒤엉켜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아무리 협객이라도 사정을 모른 채 무림문파간의 싸움에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들의 싸움으로 인해 마을 전체를 불태워버린 것이라면 또 다른 이야기였다.
분노를 못 이긴 상아가 그들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당장 싸움을 멈추세요!"
그러나 칼부림 중에 먼저 검을 거두기란 쉽지 않은 일.
분명 상아의 목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말이 통할 상태가 아니군. 이럴 땐 일단 잡아 패는 게 먼저지!"
칼을 뽑아든 지찬이 나서려 할 때였다.
그의 옆으로 남궁적이 먼저 싸움터를 향해 걸어갔다.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안휘의 성문 앞에서 느꼈던 바로 그 기세였다.
순간 등골이 섬뜩해진 지찬은 냅다 칼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남궁적이 누구인지 알 리 없는 송호영은 다급히 외쳤다.
"위험합니다!"
남궁적을 막기 위해 뛰어가려던 호영의 뒷목을 잡아챈 진삼이 말했다.
"가만히 계시오. 황자 나으리. 무림에선 누구도 어르신의 걸음을 막아선 아니 되오."
"하지만, 저러다 눈먼 칼에……."
"칼에 눈이 백 개가 달렸다 한들 어르신의 털끝 하나도 해칠 수 없소."
단지 남궁적이 엄청난 고수란 말로 알아들은 호영은 이내 불안한 눈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남궁적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의 눈은 곧 경악을 물들었다.
적과 아군조차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광기에 물든 전장.
그곳의 한 가운데로 지나는 남궁적에게 여기저기서 살기가 담긴 칼날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그 어떤 칼도 남궁적의 몸에 닿지 못했다.
마치 빗살이 스스로 사람을 피해가는 것처럼.
그저 앞으로 걸어가고 있을 뿐인 남궁적을 향한 칼날은 모두 허공을 가른다.
간혹 걸음만으로도 피할 수 없는 일격은 가뿐히 고개를 젖히거나 몸을 살짝 트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구태여 집요하게 노려 쫓아 붙는다면 일격이 닿을 만도 하겠지만. 난전에 난전을 거듭 중인 무림인들은 다음 상대를 찾아 칼을 휘두르기에 바빴다.
염라거결(閻羅拒闋).
삭풍과 함께 도제를 상징하는 무의 극의.
이 전장에 흐르는 모든 살기를 온전히 읽어 내고 있는 남궁적에게 누구도 일격을 가할 수 없었다.
그렇게 전장을 일직선으로 가로지른 남궁적이 도착한 곳엔 두 패거리의 수장이 혈전을 치루고 있었다.
사내의 경지를 가늠한 남궁적은 그들이 이 싸움의 핵심이란 사실을 바로 알아차렸다.
적이 그들의 싸움에 개입하기 전. 멈추어선 그에게 여지없이 칼이 날아들었다.
살짝 뒤로 물러서 칼날을 피해낸 적은 순식간에 손을 뻗어 칼을 내지른 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커억!"
숨이 꽉 틀어막히는 기분.
사내는 즉시 칼을 휘둘러 남궁적의 머리를 노리려 하였다.
그러나 의문의 노인과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그는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 드는 동시에 움켜쥐었던 칼을 놓쳐버린다.
탱그랑!
"으어어. 사, 살려….주십시오."
공포에 잠식된 사내는 남궁적의 팔을 붙잡고 애원했다.
적은 사내에게서 무심한 눈길을 거두었다.
사내가 안도하는 순간, 적은 그의 몸을 싸움이 한창인 두 수장을 향해 집어 던졌다.
촤아악-.
사내의 몸이 흙바닥을 쓸며 두 사내의 가운데에서 멈췄다.
갑작스런 난입.
싸움을 멈춘 두 사내의 시선이 일시에 남궁적을 향했다.
밤송이 같은 수염에 거도를 쥔 사내가 물었다.
"노인네는 뉘시오?"
바닥에 나뒹군 사내는 바로 그의 수하였다.
심기가 언짢은 그와 달리, 다른 패거리의 수장을 보인 사내는 화색을 지었다.
"노 선배님께서 도움을 주러 오셨군요!"
"뭐야. 지원군인가! 원한을 갚기 위한 정당한 싸움이오! 어줍짢은 협객이면 썩 꺼지시오!"
"갑자기 들이닥쳐 불을 질러놓고는 무엇이 정당하단 말이냐! 애초에 너희는 누구냐?"
"몇 번을 더 설명해야지? 우린 더러운 백도검문의 개들을 사냥하러 온 천산의 늑대이시다!"
천산의 늑대?
남궁적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흑랑대주 단리혁의 기억을 아무리 뒤져도, 천산신교는 저자처럼 저급한 늑대를 기른 역사가 없었다.
납득이 가지 않는 건 상대하던 사내 역시 마찬가지였다.
"헛소리 마라. 천산신교의 늑대가 왜 우리를 기습하고 민간에 불을 지른단 말이냐! 내 장담컨대 너희는 천산을 사칭한 사도 무리다. 노 선배님. 저자의 거짓부렁을 귀담아듣지 마십시오. 저희 연화검문은 백도일세 죽산문의 산하 문파입니다. 부디 잔뿌리나마 검제의 후예인 저희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대충 사정을 파악한 남궁적은 스스로 신교의 늑대라 칭한 거도의 사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거도의 사내는 거짓을 말한 적 없다는 듯 당당한 태도로 경고했다.
"끼어들면 천산신교를 적대하는 것으로 간주하겠소. 오지랖 부리지 말고 썩 꺼지시오."
남궁적이 보기에도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 문제였다.
그러나 진실을 따지기 이전에, 적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다닌 자들이 사내의 패거리임을 직시했다.
스릉-.
칼을 뽑아드는 남궁적이 말했다.
"무림인이라면 응당 칼로써 원한을 해결하야 할 터. 마을은 왜 불태웠느냐."
콧방귀를 낀 사내가 거도를 높이 들어 올리며 답했다.
"정도맹과 백도검문에 동조한 이들 모두 한패가 아닌가?"
"혹, 네가 말한 원한이 십 년 전의 참극을 일컫느냐."
"하하. 당연하잖소? 염제께서 미처 끝내지 못했던 일을 마무리 지으라는 교주님의 명이오!"
"내 자세히 들어봐야겠다."
"지옥에서나 들으시지!"
그가 남궁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들개만도 못한 감을 지닌 자가 천산의 늑대라."
나직이 중얼거린 적의 동공에 금빛이 일었다.
스컹-!
가볍게 휘두른 일수에 사내의 머리 위로 튀어나왔던 두꺼운 도신이 깨끗이 잘려나갔다.
쿵!
가벼워진 칼의 무게.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달려오던 사내는 곧바로 속도를 늦춰 멈춰 섰다.
들어 올렸던 팔을 내려 반쪽이 된 칼과 떨어진 도신을 번갈아 쳐다본 그의 고개가 천천히 남궁적을 돌아본다.
방금 전까지 호기롭던 동공은 몹시 떨리고 있었다.
꿀꺽, 그가 마른 침을 삼키자 목울대가 출렁였다.
"노 선배님의 경지가 대단하시군요. 미처 못 알아 봤네. 허허허."
남궁적은 말없이 그를 주시했다.
사내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소매로 이마를 훔친 그가 거도를 등 뒤로 감추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사실 제가 아직 천산신교의 교인이 된지 얼마 되지가 않아서,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릅니다. 그, 그만할깝쇼? 아니지. 그만해야죠! 멈춰! 싸움 멈춰!"
사내의 외침에 패거리들의 시선이 적과 사내에게로 몰렸다.
상대하던 연화검문의 문원들도 영문을 모른 채 눈길을 모았다.
칼부림이 멎자 일행들이 다가와 남궁적의 주위에 섰다.
진삼이 즉시 사내를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손가락을 들어 사내의 무릎을 가리킨 다음, 땅 아래를 다시 가리켰다.
무릎부터 꿇으란 의미였다.
주춤주춤 머뭇거리던 사내가 슬며시 무릎을 땅에 찍었다.
"저, 고인께서는 성함이…?"
역시 남궁적은 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진삼이 다시 수신호를 보냈다.
입을 가리키고 양손으로 짚는 모양을 취했다.
입 다물고 묻는 말에만 답하라는 신호였다.
연신 고개를 끄덕인 사내는 즉시 입을 다물고 남궁적의 질문을 기다렸다.
드디어 준비가 되자 남궁적이 입을 열었다.
"너는 천산의 늑대인가?"
사내는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즉시 답했다.
"아, 아직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차례입니다! 교주님께서 명을 수행한다면 흑랑으로 임명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적은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곧바로 적의 심기가 불편해졌음을 눈치챈 사내가 외쳤다.
"안 하겠습니다! 당장 그만두고 원래 있던 감숙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감숙성?"
"예! 저희가 본디 감숙성에서 빌어먹던 무림문, 아, 아닙니다. 사도무리의 허접쓰레기 들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작게 중얼거린 적이 사내의 앞으로 걸어갔다.
"다시 묻겠다. 마을에 불을 지른 건 너희인가?"
"저, 저희가 질렀습니다! 그러나 의도하지는 않았습니다. 연화검문을 불태우라는 명을 수행하는 중에 조금 과하게 손을 쓴 나머지…."
사내는 대답을 끝내지 못했다.
적이 그의 머리를 베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가까운 거리에서도 반응을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극쾌의 일 수였다.
그 장면을 목격한 사내의 패거리들이 공포에 질려 달아나려던 순간이었다.
"움직이면 베겠다."
날선 적의 경고에 가까운 패거리들이 즉시 멈췄다.
아무리 봐도 달아나는 게 현명했다.
그러나 사내들은 움직이지 못했다.
남궁적의 눈에 맺힌 제왕안의 기세가 그들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제야 남궁적의 눈에 맺힌 금빛 안광을 발견한 연화검문의 문주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풍문으로 시작되었으나, 이제는 진실이 되어 강호를 떠도는 화제.
칠중도제 남궁적의 무림귀환.
그는 즉시 땅에 검을 박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연화검문주 이소양. 무림의 대영웅이신 칠중도제를 뵙습니다!"
침묵 속에 외침은 모든 이들의 귓속으로 또렷하게 박혀 들었다.
연화검문의 문완과 사도 패거리들 할 것 없이 모두가 칠제의 예를 취했다.
물론, 일행들은 그들의 태도가 남궁적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했음을 알고 더 긴장했다.
깊게 숨을 몰아 내쉰 적이 말했다.
"다음."
죽은 사내 대신 질문에 답할 자를 찾는 것이었다.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사도무리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들이 머뭇거리며 뜸을 들이자 지찬이 직접 걸어가 한 명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오라시잖아 인마!"
퍽!
엉덩이를 걷어차는 지찬의 발길질에 도제의 앞으로 내몰린 사내가 온몸을 파들파들 떨며 무릎을 꿇는다.
적은 이젠 목에다 칼날은 얹어 놓고 질문을 시작했다.
"신교의 교주가 명을 수행하면 흑랑으로 임명해 준다는 이야기. 자세히 털어놓아라."
"그게, 그… 저희만이 아닙니다! 그간 정도맹과 백도검문의 핍박으로 쫓겨났던 문파들 모두에게…."
그는 근래에 일어났던 일들을 조곤조곤 털어놓았다.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대화가 계속될수록 남궁적과 일행들의 표정은 점차 심각해져 갔다.
이야기의 중심엔 폐관 수련에 든 후 광증을 고쳐서 나왔다는 천산신교의 교주가 있었다.
이야기를 듣던 상아가 고개를 저으며 현실을 부정했다.
"미쳤어요. 그 일은 염제께서 십 년 전 백팔 협객들의 목숨으로 용서하셨어요! 또다시 정도맹과 신교 사이에 전쟁이 날 거에요!"
십 년간의 폐관.
긴 세월 동안의 수련을 끝마치고 돌아온 찬마신교주 단리수현은 광증을 이겨낸 것이 아니라 광기에 잡아먹힌 광인이 되어있었다.
어찌 신교의 편에서 전쟁을 부추기냐는 남궁적의 질문이 이어졌다.
이윽고 더욱 놀라운 이야기가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희는 분명 보았습니다. 신교의 영험한 불꽃이 천산에 돌아온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