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내 그렇지 않아도 천산을 둘러보고 북경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네. 부도독은 본 황자를 위해 수고를 들이지 마시게."
"무례를 용서하소서. 황자전하를 걱정하신 태자전하께서 직접 도독부에 명을 내리셨으니, 소신은 신하된 도리로서 명을 수행해야겠습니다."
아무리 황태자의 명이라지만 신하가 제 이 황자인 호영을 강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신위 부도독은 전혀 물러설 기색이 아니었다.
이쯤 되자 일행들은 신위 부도독과 호영의 사이에서 흐르는 수상한 기류를 감지한다.
호영이 신위 부도독의 눈을 지그시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 이름 높은 협객들이 본 황자와 함께하고 있거늘, 무엇이 걱정이란 말인가. 형님께는 내 따로 서신을 보낼 터이니 그만 돌아가시게나."
부도독을 향해 포권지례를 올린 상아가 덧붙여 말했다.
"정도맹의 척마대주. 한상아라 합니다. 황자전하의 안전은 정도맹의 이름으로 책임지겠습니다."
일행들이 그저 그런 삼류 무림이라 생각했던 신위 부도독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일행들을 향해 일갈했다.
"갈! 어찌 황자전하를 무도한 자들의 손에 맡기겠는가. 황태자 전하의 명이다. 무림은 황실의 일에 관여치 마라."
아무리 군부의 고관대작이라 한들 정도맹의 이름이라면 어느 정도 존중을 하는 게 중원의 관례.
하지만 부도독의 존중은커녕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검자루를 잡는 진삼과 상아.
그를 본 추공이 다급히 말했다.
"우군 부도독이나 되시는 분이 직접 병사를 끌고 오시다니요. 정무가 바쁘신 분일 터인데, 병사들만 남기고 가주십시오. 소인이 통솔하여 황자전하를 모시겠습니다."
"추 호위. 그대가 황자 전하의 총애를 받는다 하여 감히 내 충의를 의심하는 건가. 나는 그저 광주 무림의 기류가 심상치 않아 현장을 돌보던 중이었다. 또한 그대는 전하의 일탈을 못 본 채 한 중역죄인이로다. 그대의 죄는 차후 북경에서 태자전하께서 직접 치룰 터. 입을 다물라."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추공이 호영의 눈치를 살폈다.
입술을 깨문 호영은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의 명이었다.
자칫 일행들이 병사들과 싸움이라도 일으켰다간 간단한 문제로 끝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무림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그의 형님에겐 좋은 명분이 되어줄 것이다.
호영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준비를 하고 있는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은 어깨에 멘 활을 들고 화살통에 손을 얹고 있는 미화공주에게서 멈춘다.
주먹을 꽉 움켜쥔 그는 표정을 고친다.
그리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형님의 명이라니 어쩔 수 없군. 유람은 여기 까진가 보오."
"하지만 전하!"
추공이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정한 호영은 마음을 정한 후였다.
"나라의 충신을 믿지 못해서야 내 어찌 황실의 핏줄이라 할 수 있을까."
뒷일은 알 수 없었다.
다만, 황태자인 그의 형님이 자신을 죽이라는 명을 내리지는 않았을 터.
부디 형님을 향한 부도독의 충심이 넘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간 즐거웠습니다, 협객님들. 다음에 인연이 된다면 꼭 뵐 수 있기를."
인사를 마친 호영은 병사들을 향해 걸어갔다.
흡족한 미소를 지은 신위 부도독이 말 머리를 돌리려 할 때였다.
"멈추시오."
진삼이 그들을 불렀다.
고개를 돌린 부도독과 진삼의 눈이 마주쳤다.
예사롭지 않은 기세를 느낀 그가 물었다.
"그대는 또 누구인가."
"쾌검일절. 하진삼이라 하오."
"쾌검일절? 쾌검일절이라하면… 그 백천검가의?"
"이젠 아니오. 나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검객이오."
"하. 들을 것도 없군. 회군하라!"
진삼을 무시하고 회군하려는 찰나.
스릉-.
그의 귓가로 칼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그대들은 갈 수 없소."
다시 등을 돌린 신위의 눈에 검을 뽑은 진삼의 모습이 들어온다.
호영이 즉시 일행들을 만류했다.
"안됩니다! 칼을 거두십시오!"
"이제 이 강호에 나를 구속할 건 없소. 한낱 검객의 반역이라면, 작은 소란이 아닐까."
진삼의 말에 지찬도 칼을 뽑으며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 내 친구답구만! 여기 산적 놈도 있다!"
갈팡질팡하는 상아.
그녀의 어깨를 잡아 뒤로 물린 미화공주가 화살에 시위를 걸고 한발 앞으로 나온다.
"한 동생은 괜찮다. 우리가 해결하면 될 일이다."
"언니!"
"너무 걱정 마라. 우리의 뒤엔 남궁 사백님께서 계시지 않느냐?"
그렇지! 잠시 잊고 있었다.
도제는 결코 황자를 모른 채 하지 않을 분이셨다.
상아도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어느 대협객께서 말씀하시길. 협행이란 협객의 마음이 가는 대로 행하는 것이라 셨습니다. 저도 돕겠어요."
일행들 모두가 한뜻으로 호영을 위해 검을 들었다.
감동한 호영은 말문을 잇지 못하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반면 분노한 신위 부도독이 일행들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 그대들이 하는 짓이 반역이라는 건 알고 있는가?"
살벌한 겁박에도 진삼은 코웃음쳤다.
"부도독께서 잘 모르시나보오. 최근 그 소리를 입에 담았다 목이 날아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거든. 그리고, 내가 보기엔 반역을 저지를 사람은 우리보단 그쪽인 듯한데. 황자전하께서 무사히 북경에 돌아가실 예정인 게 확실하오?"
"말이 통하질 않는군. 역도를 모두 죽여라."
차자장!
군병들의 창날이 일행들을 향했다.
미화공주가 끌어당긴 시위를 놓으려던 순간이었다.
쉬이익- 퍽!
화살 한 발이 일행들과 군병들 사이 중간에 내려꽂혔다.
다그닥. 다그닥.
뒤쪽으로 눈을 돌린 신위 부도독.
저 멀리서 어둠 속에서 새까만 기마가 맹렬히 달려오고 있었다.
흑의 기마. 흑의 갑주.
온통 칠흑일색의 무장을 본 신위는 눈을 치켜뜬다.
"막아라!"
그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기병들이 대열을 갖추었다.
창날이 모여 달려오는 흑의 무장을 향해 방벽을 세웠다.
그러나 흑마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고삐를 내려쳐 더 속도를 높인다.
순식간에 창날 앞까지 달려온 흑마는, 일순간 높이 뛰어올랐다.
푸르릉-.
날아오른 흑마가 거칫 콧김을 뿜어내었다.
훤히 드러난 흑마의 아랫배를 향해 창을 찔러 올리는 군병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흑마의 주인이 휘두른 원월도에 무참히 저지된다.
캉캉캉!
잘려나가는 창날.
나무작대기가 된 창의 울타리를 넘은 흑의 무장은 곧바로 언월도를 공중에서 돌려 거꾸로 잡았다.
흑마의 앞발이 땅에 닿는 동시에 기다란 창대를 휘두른다.
창대가 향하는 방향은 바로 부도독의 옆에 있던 호영이었다.
날아드는 창대에 눈을 질끈 갑는 호영.
그러나 창대는 그를 가격하지 않고 겨드랑이 사이를 찌르고 들어갔다.
무장이 창대를 회수하며 호영의 몸을 공중으로 던져 올렸다.
"어어!?"
그쯤 네발을 모두 땅에 착지시킨 영민한 흑마가 몸을 움직여 등허리로 호영의 몸을 받아내었다.
졸지에 무장의 뒤에 타게 된 호영.
그는 흑마가 거칠게 몸을 흔들자 떨어지지 않기 위해 무장의 허리를 껴안았다.
신기에 가까운 기마술과 창술을 목격한 부도독과 병사들은 그대로 얼어붇은 채 흑의 무장을 주시한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바로 옆에 있는 부도독의 목을 날려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흑의 무장은 마치 볼일이 끝났다는 듯이 유유히 말을 몰아 일행들 쪽으로 걸어갔다.
일행들 역시 멍하니 흑의무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상아가 그. 아니 그녀를 알아보았다.
"당신은!"
그녀가 투구를 벗자 투구 속에 감춰져 있던 긴 말총머리가 풀려났다.
어깨너머로 등 뒤로 바짝 붙어 있던 호영의 쳐다본 그녀가 말했다.
"흑사자군 천인장 조윤. 황자 전화를 뵙습니다."
타다닥.
돌풍을 맞은 모닥불이 거세게 타오르며 날벌레를 집어삼켰다.
* * *
화르르륵-!
거대한 성화의 불꽃 앞에선 사내가 양팔을 벌려 남궁적을 환영했다.
"천산을 방문해주셔 감사합니다. 숙부님. 십만교도의 정점에 선 몸이기에, 칠제의 예를 차리지 못함을 너그러이 용서하소서."
유난히 짙은 흑색장발.
그리고 정돈된 흑색수염을 늘어트린 사내.
천산신교주 단리수혁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남궁적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없이 교주의 앞으로 걸어갔다.
성화당 안에는 교주만이 아니라 붉고, 검은 복장을 한 늑대들이 좌우로 도열 해있었다.
그들의 가운데로 가로질러간 남궁적은 단리수혁의 삼보 앞에 멈춰 섰다.
숙였던 고개를 올린 수혁의 눈이 남궁적을 향한다.
적은의 눈동자는 그가 아닌 뒤쪽의 성화를 담고 있었다.
등을 돌린 그가 적과 함께 성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돌아가신 태상교주께서는. 항상 자취를 감추셨던 벗에게 천산의 위대한 불을 보여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고인께서 이루지 못한 소원을, 아들인 제가 이루게 되었나이다."
여전히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 남궁적.
하지만 단리수혁은 상관없다는 듯 계속 이어 말한다.
"아버님께서는 천산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이셨습니다. 그분의 영령 또한. 이 불꽃에 깃드셨겠지요. 제이시여, 혹. 보이십니까?"
다시 등을 돌린 그가 남궁적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남궁적의 시선 역시 이번엔 단리수혁을 향하고 있었다.
"성화에 깃든 제 아버님의 원한이. 억울하게 죽어간 교도들의 비명소리가."
곧이어 남궁적이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네 안의 불을 말하는 것이라면, 똑똑히 보고 있다."
"다행이군요. 허면, 제께서도 신교의 분노를 이해해 주신 거라 알아도 되겠습니까?"
"아니."
단호히 대답하는 적의 대답에 웃음 띠고 있던 수혁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허면, 당신에게도 신교의 교도는 그저 이교도 무리로 보이십니까?"
"아니."
"솔직히 말씀해주셔도 상관없습니다. 부처를 모르는 무지한 것들이라 멸시하셔도, 원시천존을 모르는 무도한 것들이라 하셔도 말입니다. 도제이시여."
남궁적의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온 수혁이 방긋 웃었다.
"당신은 남이 아니니. 저의 외숙이시잖습니까. 무슨 말씀을 하신들, 집안의 어른이 해주시는 충고로 알아듣겠습니다."
수혁은 남궁과 신교의 사이에 이어진 혈연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적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네 안에 남궁의 피가 흐른다면 그만두어야 한다."
"그렇기에, 당신께서는 더욱 외면하실 수 없습니다. 이 조카를 위해 손을 보태어 주실 거라 믿습니다."
"단리수혁. 너는 어찌하여 과거를 반복하려 드느냐. 결과가 무엇이든, 결국은 잿더미만 남게 될 것이다."
"반복하는 게 아닙니다. 숙부님."
수혁인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위에, 새빨간 불꽃이 피어올랐다.
"제 아버님께서 못다 이룬 위업을."
불꽃의 색이 점점 짙어져 간다.
"위대한 선대 교주께서 정하신 신성한 율법을."
마침내 불꽃은, 완전히 검게 물들어 타올랐다.
"이어받는 것입니다. 그 잿더미가! 바로 아버님의 뜻이었으며, 신교를 살아오게 만든 율법입니다."
검은 빛을 띠는 사이한 불꽃.
예상대로 청화가 아니었다.
그 불꽃 속에 담긴 광기를 엿본 남궁적이 수혁을 노려보았다.
단리수혁은 말했다.
"숙부님이 왜 천산에 걸음하셨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막고 싶다면 이 조카를 죽이십시오. 과거의 그가 했던 것처럼."
불을 꺼트린 수혁이 준비가 되었다는 듯 남궁적을 향해 목을 내밀었다.
그가 남궁적에게 속삭인다.
"그러나 이번엔 다를 겁니다. 어리석었던 지난 과거처럼 멈추지 않습니다. 위대한 영웅이시여. 천산의 십만교도를 모두 죽이고 나서야,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