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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제귀환록-140화 (140/282)

140화

남궁적은 성화당에 흐르는 지독한 살기를 감지한다.

등 뒤로 손을 감춘 염랑과 흑랑들.

채찍과 거도를 움켜쥔 그들은 언제든 남궁적을 향해 출수를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남궁적은 고민했다.

반절을 베어버리면 나머지 반절을 지킬 수 있다.

그러나 진정 그것이 옳은 일인가?

혈귀라 불렸던 시절의 남궁적이었다면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절의 남궁적에게 감정 따위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작금의 남궁적은 이 가련한 혈족들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있었다.

남궁적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신교가 그들을 용서하겠느냐."

적의 질문에 단리수혁의 표정이 굳었다.

수혁은 길게 내밀었던 목을 다시 거두어 남궁적과 시선을 맞춘다.

"신교의 율법에 용서란 없습니다."

단리혁의 기억으로 율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던 남궁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도맹이 단리강의 목을 가져갔으니, 내 너희에게 천곽의 목을 주겠다. 새로운 원한은 내가 가져 갈터니, 너희는 평화를 찾아라. 그리한다면 율법에 맞는 해결책일 터."

검제를 죽이겠다고? 신교를 위해?

수혁은 코웃음쳤다.

"시간을 벌고자 하십니까?"

"수혁아. 너는 십만 교도의 아버지다. 그들을 전쟁터로 내몰지 말라."

"소용 없습니다, 외숙. 신교의 편에서지 않으시겠다면, 제 어머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남궁의 이름으로 중립이라도 지켜주십시오."

처음부터 단리수혁이 남궁적에게 원하던 바였다.

그러나 타협할 남궁적이 아니었다.

남궁적의 손이 칼자루를 쥐어 허락하지 않겠다면 차라리 베어버리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나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오늘이 신교의 마지막 밤이 될 것이다."

금빛으로 물드는 동공.

그와 동시에 남궁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세가 성화당 안의 늑대들을 짓눌렀다.

기세만으로 서있기 조차 힘들어진 늑대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단리수혁은 제왕안의 기세를 거뜬히 버텨낸다.

발치에서 피어난 검은 불꽃이 단리수혁의 온몸을 휘감았다.

일촉즉발의 상황.

파라락!

옷자락이 휘날리는 소리와 함께 만일의 스무 명의 노인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성화당의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청화수호대였다.

그들은 청화를 계승받지 못한 단리수혁을 따르지 않는 세력이었으나, 신교와 도제의 불화를 바라지 않았기에 사태를 주시 중이었다.

흑색과 푸른색으로 조화된 태극이 그려진 장포.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든 노인이 말했다.

"신성한 성화 앞에서 싸움을 벌여선 안 됩니다. 두 분 다 기세를 거두어주십시오."

태양신공을 극성으로 단련한 천산신교의 최정예 고수들.

그들을 눈으로 쓸어 본 남궁적이 중얼거렸다.

"신교의 모두가 교주의 뜻과 같진 않나 보군."

"저희는 청화의 뜻을 따르는 종. 뜻을 가지지 않습니다."

다시 눈을 돌린 남궁적의 시선 끝에 사정없이 구겨진 단리수혁의 얼굴이 들어온다.

입술을 짓씹은 수혁이 말했다.

"신교로 발걸음 하시느라 피곤하시지 않습니까. 내일 다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그러지."

적의 눈동자를 덮었던 금빛이 사라졌다.

기세를 거둔 적은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늑대들 중에서 한 사람을 찾았다.

"이곳에 흑랑 막야가 있는가."

검은 무복을 입은 사내가 한걸음 앞으로 나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안내를 부탁하네."

남궁적의 요청에 막야는 교주를 바라본다.

"안내해 드리거라."

수혁의 허락이 떨어지자 남궁적을 데리고 성화당을 떠났다.

그가 문밖에 섰을 때쯤, 성화당의 안쪽에서 고성이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월권이요 수호대주."

"주인이 없는 지금. 저희는 오직 교의 율법을 지켰을 뿐입니다."

"교주인 내가 곧 교의 율법이오!"

"청화 수호대가 신교의 저주받은 불을 부활시킨 그대를 내버려 두는 이유도 당신이 교주이기 때문입니다."

문밖에서 남궁적을 기다리고 있던 소희는 신교의 치부를 들킨 것 같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남궁적은 그런 소희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짓는 막야를 바라보았다.

* * *?

밤이 깃든 천산.

남궁적은 신교를 찾은 귀빈을 모시는 객잔의 최상층에 머물고 있었다.

광주와 천산의 도시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객실의 노대.

객실에 도착한 남궁적은 식사도 거른 채 노대에 마련된 탁자에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오래전에 식은 찻잔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묵든, 어둠에 먹혀가는 일대를 본 남궁적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몰려온 먹구름이 하늘을 새까맣게 덮고 있었다.

"새벽에 비가 올 모양이구나."

남궁적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어느 순간, 그의 맞은편에는 노야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먹구름이 낀 하늘을 가리키며 물었다.

"적아. 보이느냐?"

"먹구름을 말씀하십니까?"

"구름 뒤에 있는 것 말이다."

"달을 말씀하시는지요."

노야는 남궁적이 딴청을 부리고 있음을 눈치챈다.

"녀석. 보이는구나."

더 이상 숨길 수 없음을 안 남궁적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검게 드리운 구름 위.

새까만 비늘을 가진 거대한 존재가 구름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존재.

악룡(惡龍)이었다.

"오랜 세월, 천산에 잠들어있던 악룡이다. 단리강의 아들이 천산의 비처에서 악룡을 깨웠다."

"단리수혁이 가진 검은 불꽃이, 저 존재의 힘이란 말씀이신지요?"

"천산의 일족들이 다루는 힘이 모두 용의 힘에서 비롯되었음이라."

"노야. 제가 저 용을 벤다면 어떻게 됩니까?"

"네가 그럴까 봐 내가 왔느니라."

의자에서 일어선 노야가 뒷짐을 지며 말했다.

"용이란 세상에 넘치는 기운을 품어 풀어내는 존재다. 저 새까만 녀석이 재앙을 불러오는 존재이긴 하나, 그 또한 이 세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섭리의 일부로다. 네가 저 용을 베어낸다면 훗날 용이 풀어내지 못한 기운이 다시 더 큰 재앙으로 돌아올 것이다."

"천산의 원한과 분노가 저 용을 깨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비단 10년간의 원한뿐 만이 아니지. 아주 오랫동안, 서서히 쌓여온 수천 년간의 분노를 먹고 자란 용이다."

악룡은 왜 하필 지금 와서 승천한 것일까.

통탄한 남궁적이 노야에게 물었다.

"그동안 저 용이 기운을 풀어내지 못하고, 이제 와서 재앙을 불러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천산에는 한 마리의 용이 더 있다. 천산이 품은 힘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며, 천산의 혈족들을 지키고자 하는 숭고한 기운을 품은 용이로다."

"혹, 그 용의 비늘이 푸른색입니까?"

"푸른색의 비늘을 가진 화룡(火龍)이지. 그동안은 상극의 두 용의 기운이 상쇄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었지."

결국 악룡의 기운이 강성하고 화룡의 기운이 약화 되어 균형이 깨져버렸다는 의미였다.

이미 악룡이 승천한 순간, 재앙을 막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남궁적이 아니었다.

"제가 증오의 근원을 없애겠습니다."

"천곽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느냐?"

남궁적은 입도 대지 않은 찻잔을 쥐어 입가에 가져갔다.

분명 식어있을 찻잔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한 모금, 차로 입을 적신 남궁적이 가라앉은 시선으로 노야를 바라본다.

"적아. 너는 아느냐? 너와 천곽이 싸운다면, 너는 죽는다."

모르는 것이 없는 분이니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천재라 불리던 친우는 젊은 시절에도 다른 여섯이 범접할 수 없는 재능을 보였다.

그나마 그 시절의 남궁적이 천곽과 비길 수 있었던 이유는 스승이 물려주신 삭풍이 고금제일로 꼽을 만한 무공이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천곽이 이룩한 경지를 남궁적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제가 이룬 경지를 천곽이 이루지 못했을 리 없지요. 그 친구답습니다."

"결국 네가 천곽을 이기지 못한다면 부질없는 짓이지 않느냐."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천곽은 검종(劍終)의 길을 걷는 자. 무(武)로서는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다."

"묻겠습니다 노야. 진정 그런 미래가 정해져 있습니까?"

남궁적의 질문에 노야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어렸다.

"네 생각대로, 운명이란 없다.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느니라."

"그럼 불가능하진 않겠군요. 충분합니다."

스릉-.

도를 뽑은 남궁적이 저 하늘을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

그의 칼끝이 향한 곳은 먹구름 사이를 헤엄치는 악룡이 아닌, 그 너머에 있는 금빛의 달이었다.

"아서라. 너는 아직 닿지 못한다."

"제가 스승님의 삭풍을 처음 보았을 때도, 복수를 위해 산을 내려왔을 때도 그랬습니다.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다른 경우다. 지금 네 넘어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구름 따위가 아니다."

"상관없습니다."

남궁적의 확고한 신념을 확인할수록 노야의 미소는 점점 더 짙어져 갔다.

"역시 검종보다는 네가 적격이로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남궁적이 노야를 돌아보았다.

그저 인도하고 방관할 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던 노야.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이 든 남궁적이 반문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 인도자로서 어찌 이런 너에게 길을 제시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적아. 네가 원하는 걸 모두 이룰 방법이 있다."

"무엇입니까?"

노야는, 오랫동안 남궁적을 지켜보며 계획해왔던 목적을 꺼냈다.

"나의 시험을 통과하여 육신을 초월하라. 그리하여 내 옆에 서라. 그리한다면 세상의 모든 일들이 네 뜻대로 이루어지리라."

천천히 손을 뻗은 노야가 하늘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이 그의 손을 따라 사라지기 시작했다.

본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말끔히 모습을 감추는 먹구름.

이윽고 하늘엔 악룡의 모습도, 먹구름도 모두 사라지고 청명한 달빛이 홀로 빛나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이루어낸 기적.

눈을 치켜뜬 남궁적의 귓가로 노야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너는 준비가 되었으니, 하겠다고만 대답하라."

"제가 당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겁니까?"

"그렇다. 삼라만상을 깨우치고, 세상을 관조할 수 있게 되지. 삶과 육신에서 벗어나 완전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이며 수많은 수행자들이 꿈꾸었으나 이루지 못한 경지이지. 한걸음이다. 적아, 나는 네 앞에 남은 한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리된다면, 제가 걱정하는 일을 모두 해결할 수 있습니까?"

"단언컨대 너는 모두 해결할 수 있다."

우두커니 선 남궁적은 노야의 눈을 직시한다.

살짝 입을 벌리려던 순간, 남궁적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온 까닭이었다.

그동안 노야가 건넨 모든 일들엔 항상 대가가 따랐다.

"노야. 제가 치러야 할 것은, 당신의 시험이 전부입니까?"

살짝 좌로 고개를 기울인 노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노야의 반응을 본 남궁적은 확신한다.

"무언가 더 있군요."

"있지만 나쁜 게 아니다. 단, 지금의 너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일 뿐이지."

"그럼 됐습니다."

"왜? 적아. 지금까지 이 기회를 잡기 위해 평생을 바친 수행자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지금도 심산유곡에서 곡기를 끊은 도사들이 얼마나 간절하게…."

"간절히 원하는 도사에게 가십시오. 저는 제가 직접 해결하겠습니다."

"얼씨구? 너. 신선이나 부처 모르냐? 내가 그리 만들어 준다니까?"

"그래 봤자 노야께 바둑내기로 술이나 뜯기는 신세 아닙니까? 관심 없습니다."

"이런 육시랄.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천곽의 검에 맞고 죽으며 눈물 흘려도 나는 상관 않겠다!"

"안 할거잖습니까? 그렇게 인정이 많으신 분이었으면 희영이의 목숨도 살려주셨겠지요."

"아니 그건…."

"됐습니다. 듣지 않겠습니다."

끝내 울화통이 터진 노야는 바득바득 이를 갈며 모습을 감췄다.

남궁적은 다시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과, 먹구름 사이를 누비는 악룡을 올려보며 상념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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