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소문을 들으셨소? 도제께서 사천에서 악양으로 오고 계신다더군."
호남을 가로지르는 동정호의 물길인 상강의 변에 위치한 무림 객잔.
이미 이곳에 도제의 소식으로 떠들썩해 있었다.
상강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죽립을 쓴 네 명의 무림인은 주위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중에서도 두 낭인들이 나누는 대화가 유독 귀를 가렵게 했다.
"콧대 높은 백도검문 놈들. 제 잘난 줄 알고 대모님과 남궁에 몹쓸 짓을 하지 않았나. 이번 기회에 도제께서 아주 혼쭐을 내주시겠지!"
"어허 이 사람아. 혼쭐은 무슨. 검제께선 가만히 계신다던가?"
"검제께서 왜 나선다고."
"맹주가 그분의 아들이잖나. 아무리 도제라도 쉽게 손을 대지는 못할 걸세."
"아니 이 사람이. 꼭 도제께서 왜 검제의 눈치를 볼 거라고 말하는구만."
"눈치를 봐야지. 무림의 지존이신데."
그러고 보니 두 낭인이 탁자 위에 올려둔 칼이 서로 모양이 달랐다.
하나는 양날의 검이었고, 하나는 외날의 도였다.
도를 올려놓은 쪽의 낭인은 친구의 말에 심기가 상했는지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자네 설마, 칠중제일이 검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검을 둔 쪽의 낭인은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되물었다.
"그러면, 검제가 도제의 아래라고?"
기분 좋게 한잔 걸치던 두 낭인.
평온했던 두 친구의 사이에서 험악한 분위기가 흐른다.
"검제의 무공이 하늘닿은 건 맞지. 하지만 삭풍은 천외천인 걸 모르나? 자네 무공 헛 배웠군."
"하. 거참. 내 살면서 들은 얘기 중 제일 무지한 얘기일세. 하늘이 곧 검제라 천검이네. 하늘 위엔 아무것도 없어. 자네는 왜 당연한 걸 몰라? 업적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당연히 칠중제일은 천검이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건 일행들만이 아니었다.
술 한잔 걸치던 무림인들이 하나둘씩 입을 보태기 시작했다.
"검제께서 강호에 더 오래 계셨기에 그리 착각들 하지."
"삭풍은 무적이야."
"쯧, 이래서 낭인들이란. 그러니 낭인질이나 해 먹고 다니지."
"이보쇼 검객 나으리. 누가 들으면 당신이 아주 백도검문의 문주님이신 줄 알겠소?"
"검제께서 고금제일임은 저자의 다섯 살 난 어린아이도 아는 사실이잖아? 도가 어떻게 검을 이겨?"
"나는 이길 거 같소만. 한번 해보시겠소?"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기 시작하는 객잔.
그러나 화제의 당사자가 포함된 일행들은 태연히 차를 마실 뿐이었다.
광주를 떠나 호북까지 오는동안 아주 질리도록 들어왔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영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입가를 씰룩이고 있었다.
"다 때려 패버릴 깝쇼?"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정말 삼십 명 정도의 무림인들을 때려눕혔던 지찬이었다.
진삼은 왜 호들갑이냐는 듯 무심한 투로 말했다.
"강호의 풍문이란 원래 그렇다. 소란 만들지 말고 놔둬."
"듣고만 있으라고? 저 건방진 것들이 하는 얘기를?"
홱 고개를 돌린 지찬이 눈빛으로 남궁적의 허락을 구했다.
적은 껄껄 웃어보일 뿐이었다.
"이 또한 강호의 유흥이 아니겠느냐. 내가 들어도 재밌는 건 사실이구나."
상아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저들이 뭘 알고 칠중제일을 논하고 있겠습니까? 심려치 마시옵소서."
광주에서 호북까지 단숨에 달려온 일행들에게는 이 잠깐의 휴식이 너무나 소중했다.
일행들이 상강의 풍경을 즐기며 피곤한 몸을 달래고 있던 한때였다.
벌컥-!
일련의 무인들이 객잔의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왔다.
그들의 등장에 무림객잔에 모인 무림인들의 시선이 모였다.
하얀 무복의 가슴에 박힌 바를 정(正)자가 그들의 소속을 말하고 있었다.
손안에 흥건한 땀을 닦아낸 정도맹의 무인은 종이 한 장을 꺼내 객잔의 기둥에 붙였다.
그와 동시에 다른 자가 객잔의 지붕을 흔들 기세로 외쳤다.
"급보요! 이사후맹주님께서 무림령을 선포하셨소! 정도맹의 의협들은 모두 무림령에 응하시오!"
* * *
정도맹 지부의 급사들이 온 중원의 성과 마을을 쏘다니며 무림령을 알리고 있었다.
큰성의 성문과 저자에 어김없이 정도맹의 집결을 알리는 포고문이 붙어있었으니, 이제 막 호남에 진입하여 정도맹으로 향하던 일행들이 소식을 알게 된 것도 당연한 순서였다.
상아는 급히 청로에 들러 자세한 내용을 알아왔다.
"소문이 사실이라고 합니다."
무림령의 선포와 함께 백천검가가 하루 밤 사이에 멸문지화를 당했다던 터무니없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천하의 일대검호로 불릴만한 기라성 같은 검객들이 강바닥의 자갈처럼 모여있다는 백천검가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검제 이천곽이 백천검가를 세우자 수많은 젊은 강호들이 검가에 몸을 담았다.
검제는 그런 무림인들에게 검법과 가르침을 아낌없이 베풀었으며 검가의 제자가 된 무인들은 열과 성의를 다해 그의 가르침을 받들었다.
그렇게 벌써 수십 년의 세월 지났다.
열망과 뜻을 지녔던 젊은 강호들이 대검호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천하제일검가. 과거 남궁세가의 명성을 가져간 백천검가였다.
검법의 공부와 경지에 있어서만큼은 옛 남궁의 이름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그런 백천검가가 하루아침에 멸문을 당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진삼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대체 누가 그런 짓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악양성은 중원에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커다란 도시였다.
게다가 백천검가의 주위엔 검가에서 뻗어 나온 수많은 백도검문이 터를 잡고 있었으니, 어떤 세력이 그들의 눈을 피해 검문을 습격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었다.
상아는 처참한 표정으로 들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마침 맹주님과 검가의 고수들이 정도맹의 훈련을 참가 중이었다 합니다."
"그래도 말이 안 된다. 장로들께선 대부분 검가에 계셨을 텐데."
부정하는 진삼에게, 상아는 흉수로 지목된 자들을 언급했다.
"검가의 하늘에 푸른 불꽃의 용이 나타나 검가의 지붕에 불씨를 뿌렸다 합니다. 저도 믿기지는 않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목격하였다고…."
즉시 입을 다문 진삼이 남궁적을 쳐다보았다.
푸른 불꽃의 용.
그것은 수천 년 무림의 역사에 오직 한 사람만이 펼칠 수 있었던 무공이었다.
남궁적은 그 무공의 정체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청화. 화룡진천."
염제 단리강이 직접 창안한 무공이었다.
죽은 단리강이 살아 돌아 왔을리는 없을 테니, 그 다음의 전승자가 가장 유력한 흉수였다.
백도검문은 이미 천산신교에 새로운 청화의 주인이 나타났고, 그를 필두로 한 신교의 정예들을 검문을 습격한 흉수로 단정하고 있었다.
상아는 어쩐지 딱딱하게 굳어있는 두 사내에게 열변을 토해냈다.
"말이 되질 않습니다. 분명 얼마 전에 어르신께서 신교의 교주를 천산에서 만나셨어요. 이건 정도맹과 신교를 이간질하려는 계략입니다."
하지만 신교의 전승자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청화를 부릴 수 없다.
혹시 기이한 사술로 청화를 흉내낸 게 아닐까.
세외에는 기상천외한 술법을 부리는 자들이 있다고 들었던 상아는 그렇게 추측할 뿐이었다.
그러나 진삼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한 후배. 소가에 관한 소식은 있던가?"
그 질문을 들은 상아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듯 화들짝 놀란다.
일행들보다 먼저 악양으로 떠났던 재희.
분명 그도 현장에 있었을 것이다.
"다시 알아오겠습니다."
진삼은 즉시 청로로 돌아가려던 상아를 붙잡았다.
"아니. 그러지 마라."
"하지만."
"아닐 거다."
"생사라도 확인해야지 않겠습니까?"
"재희는 괜찮을 거다."
진삼의 손을 뿌리친 상아가 빽 소리쳤다.
"차라리 시체를 확인했다는 소리를 들어야겠어요!"
검가의 사람들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묵인하고 있는 재희의 정체.
상아도 역시 검가의 사람이었기에 재희가 누구의 핏줄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신교의 교주가 아닌 누군가 청화를 이어받았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란 것도.
"소가주가 아무리 머저리라지만 그런 짓에 가담할 사람이 아니에요!"
"재희에 관해선 내가 너보다 더 잘 알고 있다."
"하 선배님. 당신은 재희가 청화를 이어받았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선배님께서 모르고 계셨을 리 없잖아요. 선배님께서 증언해 주세요. 소가주와 이번 사건은 아무런 관련이 없을 거라고요."
그러나 진삼은 침묵한다.
진삼은 청화를 이어받았는지는 모르나, 재희가 태양신공을 익히고 있다는 건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도 신교에 가담한 재희가 청화를 부려 검가의 멸문에 가담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마, 미지의 습격자와 싸우는 중에 청화를 부린 게 아닐까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진삼은 일단 공황상태인 상아를 진정시키기로 했다.
"내가 아는 소가주가 그럴 담이 있었다면 더 영악하게 일을 벌였을 거다. 신교가 의심받을 짓은 하지 않았을 테지. 나는 그보다 쌍룡성이 더 의심이 가는군."
그렇지 쌍룡성!
상아는 그들이 보였던 은신술을 기억했다.
게다가 쌍룡성주는 진삼마저 감히 범접하지 못할 기세를 뿜어냈었다.
어쩌면 검가의 장로들도 쌍룡성주의 상대가 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남궁적의 생각은 달랐다.
여지껏 혼란한 소식을 들으며 뒷짐을 지고 있던 남궁적이 물었다.
"천곽은 검가에 있었느냐."
"흉수가 누군들 검제께서 검가에 계셨다면 그런 불상사가 일어날 리 없습니다. 흉수는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추측건대 검제께서 출타중일 때를 노리지 않았겠습니까?"
"추측이로구나."
상아의 추측을 통해 남궁적은 확신한다.
흉수는 다른 이가 아닌 천곽이다.
남궁적은 그이 앞에 펼쳐진 상강의 전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벗을 벨 각오를 한 네게 제자들이라 하여 다르지 않았겠지. 허나 이 못난 친구야. 네 창자를 끊어서라도 이루고자 할 뜻이라면 어찌 나를 찾지 않는 겐가.’
긴 한숨을 내쉬는 그에게 진삼이 아뢰었다.
"곧 정비를 마친 정도맹 소속의 문파들이 악양으로 가기 위해 움직일 겁니다. 무림령의 결과가 신교와의 전쟁으로 번지기 전에 악양에 도착해야 합니다. 서둘러 배를 잡아보겠습니다."
진삼의 말대로 나중엔 배를 잡기도 힘들게 될 터였다.
하지만 남궁적은 고개를 젓는다.
"이미 엎어진 물이다. 우리가 서둘러서 악양에 도착한다 한들 방법이 생기는 건 아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뒷말을 흐리는 진삼.
적은 안심하라는 듯 장담한다.
"재희는 무사할 게다."
"지옥에 던져놔도 알아서 기어올 놈이긴 합니다."
피식 웃은 적이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수중에 여비가 얼마나 남았느냐."
"은자 삼십 냥쯤 있습니다."
"모두 털어 배 한 대를 미리 빌려두거라."
"달리 계획이 있으십니까?"
상아가 초조한 눈으로 묻자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적이었다.
"터질 둑이라면 막을 수 없다. 둑을 막으려 하기보단 물길을 트는 게 나은 법이겠지. 무림령에 응한 무림인들이 모두 악양에 모일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자. 지찬아."
지금껏 혼란스러워하며 멀뚱히 서 있던 지찬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넵, 스승님!"
"준비해둘 것이 있다. 네가 구해 오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