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그러니 고민하지 마라. 버림받은 이들의 그늘이 되어준다 해도, 악역을 자처한 네 벗의 계획에 따라 일곱이 모두 함께 사그라든다 하여도. 네가 무엇을 결정하든. 그 또한 섭리의 일부다."
노야는 두 가지의 경우를 얘기했지만, 자신이 천곽의 뜻을 꺾는다는 경우는 말하지 않았다.
불가능하다는 뜻이겠지.
적은 멍하니 검은 잔을 내려 보았다.
검은 술잔에 든 술의 수면 위에는 마치가 비가 내리듯 작은 파문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속내를 알 수 없는 저 신비한 존재의 유혹임을 알고 있음에도, 남궁적은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밤, 네가 알고 싶어 하던 것. 그리고, 네 앞에 남겨진 벽을 넘을 실마리. 그 모든 게 이 잔 안에 담겨있다."
잔을 앞두고 고민하던 남궁적이 물었다.
"제게 시험을 준다 하셨습니다. 혹, 제가 그 시험을 통과한다면, 신선이 되는 겁니까?"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지.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염려 마라. 최소한 저 거짓부렁이들 같은 노괴가 되지는 않을 테니."
아직도 잔을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남궁적.
그를 향해 혀를 찬 노야가 다시금 속삭인다.
"내 어찌 강요만 할까. 일단 마셔본 후에 내 시험을 볼지 선택해도 된다. 그래. 이건 내 선물이다."
언제나 그랬듯, 결국 마시게 되겠지.
단념한 적이 말했다.
"노야.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고?"
"이 잔 안에 담긴 삶은, 저의 몇 번째 삶입니까?"
그동안 쌓아왔던 의심을 해결하고 싶은 의도가 담긴 질문.
노야는 선심 쓰듯 답해 주었다.
"너의 영혼이 겪었던, 그리고 지금도 겪고 있는. 수많은 삶 중에 하나일 뿐이다."
고개를 끄덕인 남궁적의 손이 검은 술잔을 잡았다.
끝내 머뭇거리던 그가 술잔을 들이켰다.
잔 속에 내리는 빗소리가 청각을 잠식해온다.
이윽고 남궁적의 의식도 빗소리 속으로 스며들었다.
* * *
투두둑. 투둑. 후두둑.
거센 빗발이 죽립을 치고 튕겨 나갔다.
사내. 그리고 그와 함께 관도 주변에서 몸을 추스르고 있는 한 무리의 죽립인들.
비를 맞지 않도록 품속에 숨긴 무기를 꼭 움켜쥔 사내들의 얼굴엔 긴장감이 역력했다.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눈동자들의 공통점은, 한구석 나무둥치에 몸을 기댄 사내를 주기적으로 힐끔거린다는 것이었다.
죽립 아래로 뿌연 연기를 태우고 있는 남자.
낭인 계가 아무리 넓다지만 칼밥 먹는 인생에 제 목숨 사리는 법에는 유독 민감한 이들이 낭인이었다.
모든 낭인들이 눈치를 보고 있는 사내.
얼굴을 본 적 없어 확신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무성한 소문과 사내의 모습은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다.
일대세력을 이룰 만큼의 명성을 얻었지만 결코 군림하지 않는 자.
죽지 않는 자. 불사(不死)의 낭인.
그러나 죽음에 가장 가까운 자.
무림은 그를 일컬어 낭왕(郞王)이라 불렀다.
담배연기만 뻐금뻐금 내뿜던 그가 잔뜩 긴장한 낭인들을 향해 한 소리 퍼부었다.
"곧 뒈질 놈들만 모아왔나? 바짝 쫄아있는 꼴이 칼질하다 제 불알 두 쪽이나 벨 놈들뿐이군."
쇳소리처럼 거친 목소리.
낭인들은 숨을 쉬기 위해 벌리고 있던 입까지 꾹 다물었다.
참다못한 사내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그의 앞으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노 선배님께선 그 낭왕이 맞으십니까?"
"네놈들이 죽을 자리 제대로 찾아왔으면 내가 낭왕이 맞겠지. 그러니깐 눈알 좀 그만 굴려라. 거사를 치르기 전에 뽑아 버리는 수가 있다."
"진짜 낭왕이라니."
그나마 이중엔 칼밥을 오래 먹은 편인 사내의 말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낭인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한마디라도 붙여보고자 낭왕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섬서에서 온 광추라고 합니다! 낭왕께서 낭인대를 만드시면 꼭 들어가고 싶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낭왕!"
모두 이제 갓 낭인 노릇을 시작한 삼류낭인들이었다.
반면 같은 삼류낭인이긴 했지만 경험이 많던 사내의 표정은 딱딱히 굳어갔다.
그가 한껏 겁에 질린 얼굴로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낭왕이 기대고 있던 나무 위에서 한 명의 사내가 툭 하고 떨어지며 나타났다.
그는 죽립을 쓰고 있었지만,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복면을 하나 더 걸치고 있었다.
"목표가 오고 있다. 다들 위치로 이동해라."
복면인의 말대로 기수들의 호위를 받는 마차 한 대가 관도를 타고 다가오는 게 보였다.
낭인들은 즉시 미리 지정된 자리로 이동해 몸을 숨겼다.
그러나 낭왕은 여전히 나무둥치에 몸을 기댄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복면인을 향해 말했다.
"한 놈만 빼고 전부 쭉정이들만 모아왔군."
"당신에게 그 편이 더 편하지 않소? 그리고, 쭉정이가 아니라면 의뢰금만 보고 의뢰를 받을 낭인은 없소."
"그렇긴 하지."
발굽 소리가 빗소리보다 크게 들릴 때쯤, 죽립인들은 숙이고 있던 몸을 일으켜 마차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이히힝-!"
갑작스런 기습에 놀란 말이 앞발을 들어 올렸다.
고삐를 거칠게 내려쳐 간신히 말을 진정시킨 호위대장 곽평.
그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대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감히 어떤 자들이 대 백천검가의 마차를 습격한단 말인가?
악천후에 놈들의 기척을 읽지 못한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만약을 대비하지 못한 안일함은 큰 실책이었다.
곽평은 재빨리 말에서 뛰어내려 선두의 죽립인을 단칼에 베어 내었다.
"그저 도적무리인가?"
악천후가 그들의 기척을 지워주는 동시에 습격자들의 눈마저 가려버린 게 틀림없다고 여겼다.
검가의 깃발을 알아보지 못한 섬서의 사도 무리쯤일 터.
백천검가의 이름이라면 한낱 도적무리는 알아서 흩어질 것이다.
그가 근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멈춰라! 대 백첨검가의 행차다. 지금 물러나면 죄를 묻지 않겠다!"
평소라면 모조리 베어 검가의 명예를 지켰겠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마차 안에 모시고 있는 분의 안전이 최우선 생각해야 했다.
과연 그의 예상대로 검가의 이름이 나오자 습격자들은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검가? 설마. 속은 건가?"
"아, 안돼. 도망 가야돼!"
안심한 곽평이 수하들에게 칼을 거두라고 수화를 보내려는 찰나.
"으아아아!"
이제 약관도 안되어 보이는 청년이 죽립을 집어 던지고는 박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광평은 청년의 일검을 받아내다 한걸음 물러섰다.
그것이 그의 가장 큰 실수였다.
"제길, 이미 글렀어! 다 죽여!"
차라리 단번에 목을 베어 본보기를 보였어야 했다.
이를 지켜본 죽립인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다급해진 곽평은 수하들에게 자리를 지키라 소리 지르곤 선두에서 죽립인들을 베어내었다.
빗물인지 핏물인지 모를 액체가 볼을 스치며 튀었다.
또 베고 또 베어냈다.
학살에 가까운 싸움은 반 각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끝이 정리되었다.
홀로 수십의 습격자들을 베어 죽인 곽평.
그는 숨을 고르며 이 기묘한 습격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이들의 정체, 그리고 목적이 마차 안의 귀인이었다면 어떻게 정보를 얻었는지에 대하여,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보를 얻기 위해 시신들을 살펴보려 고개를 내리려던 차.
빗소리 외에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다.
"다친 자가 있는가?"
분명 그 외에도 스무 명에 달하는 호위무사들이 있었을 텐데도 대답이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의 눈앞엔, 습격자들과 함께 처참히 쓰러진 수하들의 시체가 들어온다.
그리고.
"꺄아아악-!"
마차 안에서 들려오는 비명.
마차의 창문을 뚫고 칼날이 튀어나왔다.
낡은 박도의 칼끝에 묻은 피가 비에 씻겨 바닥으로 떨어졌다.
칼날은 천천히 다시 마차 안으로 사라졌다.
곽평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멍하니 마차를 바라보았다.
투투두두둑.
거친 빗살이 그의 얼굴을 때리며 이 모든 상황이 꿈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윽고, 박도를 꼬나 쥔 사내가 마차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왼손에는 핏물로 흥건한 비단옷을 차려입은 미부인의 머리카락을 쥐고 있었다.
곽평은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시신의 머리카락을 잡고 끌어와 그의 앞에선 사내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사내. 곽평과 눈이 마주친 낭왕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일단 죽이긴 했는데. 이봐, 거기! 이 여자가 누구지?"
"이놈…."
"놈?"
"네 이놈! 네놈이 무슨 짓을 저지른 줄 아느냐! 그분은 대 백천검가의 안주인이시자 검제의 하나뿐인…."
"역시 검제의 부인이었군! 제대로 집었네."
"미친. 알고 저지른 짓이란 말이더냐."
"크하하하!"
광소를 터트리는 낭왕의 모습에 곽평의 분노가 폭발했다.
분노는 수년간 쌓아온 고명한 무공의 결정인 검기로 쏟아져 나왔다.
낭왕을 향해 쇄도한 곽평은 그의 머리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검가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수의 일 초식.
한 줌의 내공도 없는 낭왕에겐 곽평과 같은 고수의 절초를 막아낼 방도가 없었다.
급히 몸을 뒤로 빼며 박도를 앞으로 내밀었다.
탱강!
맥없이 잘려나가 버리는 낡은 박도의 도신.
곽평은 도신을 잘라낸 감각으로 낭왕이 내공 한 줌 없는 삼류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어서 곽평이 두 번째 검격을 날리려던 순간.
곽평의 검이 멈췄다.
낭왕이 곽평을 향해 여인의 시체를 집어 던진 것이다.
이대로 검격을 내지르면 낭왕의 목을 베겠지만, 부인의 시체를 훼손하게 될 터였다.
그가 머뭇거린 짧은 순간.
시체를 던지고 나려타곤을 펼친 낭왕이 소도를 꺼내 곽평의 왼쪽 발등과 무릎을 찢어 놓았다.
"이 악랄한!"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낸 곽평이 자신의 발치 아래로 굴러들어온 낭왕을 향해 검을 내려찍었다.
다시 몸을 굴려 검을 피해낸 낭왕이 곽평의 눈에 흙탕물을 뿌렸다,
철퍽!
그는 다리를 찢어 놓았던 소도로 곽평이 검을 쥔 팔뚝에 찔러 넣었다.
"끄아악!"
고통에 찬 비명.
그러나 낭왕의 소도는 멈추지 않았다.
팔뚝을 찔렀던 칼을 뽑아 그대로 팔을 서너 번 베어내며 타고 올라오더니 그대로 어깻죽지에 박아 넣었다.
우두둑-!
낭왕은 마지막으로 찔러넣은 소도에 힘을 주어 힘줄을 긁어낸다.
"크으윽! 죽여 버리겠다!"
극심한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져 가는 와중에도 곽평은 왼팔을 들어 낭왕의 안면을 향해 격공장을 내질렀다.
후웅-.
간발의 차이로 고개를 젖혀 격공장을 피해낸 낭왕.
실로 짐승 같은 반사신경이었다.
곽평은 낙심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바닥 아래로 짐승의 목이 그대로 노출되어있었다.
그대로 놈의 목을 향해 내공을 두른 손날을 박아 넣으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시도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낭왕의 이빨이 곽평의 손목을 꽉 깨물었기 때문이었다.
와드득!
한 팔은 힘줄이 잘려나가 움직이지 못하고, 또 다른 한 팔은 낭왕의 이빨에 물려 봉쇄되었다.
도저히 무인의 전투라 할 수 없었다.
마치 한 마리의 맹수를 상대하는 느낌.
자신의 손목을 악문 낭왕의 섬뜩한 눈빛을 마주한다.
살갗을 파고든 송곳니 아래로, 그의 손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곽평은, 난생처음으로 공포라는 감정을 느꼈다.
때문에, 반 쪽이 난 박도의 단면이 그의 목울대를 훑이고 지나가는 것도 알지 못했다.
분수처럼 터져 나온 피가 거센 빗발 뚫고 솟아올랐다.
퉤.
물고 있던 손목을 뱉어낸 낭왕은 아직도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곽평의 눈을 똑똑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훌륭한 검격이었어. 무공은 네가 이겼군. 하지만 이번에도 내가 살아남았지."
"낭…왕…."
털썩.
곽평의 인형이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