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비록 만족할만한 대답은 얻지 못했지만 마림광은 물러나기로 했다.
애초에 그가 남궁적을 추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도 포기할 순 없었다.
"직접 답을 찾으란 말씀으로 알아듣겠습니다. 제의 말씀대로, 북풍검문은 뜻이 맞는 자들과 함께 악양을 떠나겠습니다."
북풍검문은 무림령을 외면한 최초의 백도검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백도검문으로 불리지 못할 터였다.
그만큼 진실을 알고자 하는 마림광의 각오는 완고했다.
남궁적 역시 그런 마림광을 말리거나 타박하지 않았다.
부디. 그가 진짜 해답을 찾았을 때까지 지금과 같은 협객으로 남아있기를 기원할 뿐이었다.
적은 이제 방을 나가려는 마림광을 향해 말했다.
"밖에 나가거든 일러주게. 풍화객잔을 찾는 손님들까지 막을 필요는 없다고. 주작각의 무인들이라고 하였더나. 그들도 안에서 객실만 지키는 게 덜 피곤하지 않겠느냐. 그대로 철수해도 좋고."
"그리 전하겠습니다."
마림광이 떠나고, 적은 다시 혼자 남게 된 객실의 창가에 섰다.
문들 돌아본 뒤에는, 입도 대지 않은 마림광의 잔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 * *
소득은커녕 쥐고 있던 유일한 동아줄을 잃어버린 재희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객잔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올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눈을 깜빡였다.
"어라? 다들 어디갔지?"
밤낮 할 것 없이 객잔을 지키는 정도맹의 무인들과 객잔에 들어가려는 무인들로 가득했던 객잔의 앞마당은 텅 비어있었다.
대신, 환하게 불이 켜진 객잔 일 층엔 북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일까 싶어 서둘러 달려가 문을 열어보니, 일 층엔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꽉 들어찬 무림인들이 술판을 벌이 있었다.
"주인장! 여기 백주 한 병만 주쇼!"
"백주 없소!"
"아니, 거기 뒤에 있는 건 백주가 아니고 뭐요?"
"마지막 단지요! 이건 제께 드실 술이외다."
"쳇, 탁주나 한 사발 주시게."
굉장히 시끌벅적한 분위기.
허름한 풍화객잔에 방음이 잘 될 리가 없다는 걸 아는 상아가 걱정스런 투로 중얼거렸다.
"어르신께서 소란스러운 걸 싫어하실 터인데,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로 듣기라도 한 듯, 일행들이 돌아온 것을 발견한 주인장이 하던 일을 놓고 달려왔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대협님들."
그는 일행들이 묻기도 전에 다급히 이 상황에 관해서 설명했다.
"제께서 손님을 받으라 명을 내리셨습니다. 정도맹의 대협들께서는 저기, 계단 앞을 지키고 계시지요."
그의 말대로 두 명의 주작각 단원이 팔짱을 끼고서 계단을 막고 있었다.
"소인도 이렇게 해도 될까 걱정이 되어 제께 직접 여쭈어보았습니다만, 좋은 술을 혼자 차지하기는 아까우니, 꼭 손님을 받으라 말씀하시지 뭡니까."
진삼이 연신 일행들의 눈치를 살피는 주인장에게 말했다.
"당신 객잔이요. 어르신께서 허락하신 일에 우리가 뭐라 말하겠소?"
그러고는 진삼은 훌쩍 위층으로 올라 가버렸다.
주작각의 단원들이 그를 막아서려다 후다닥 물러난다.
"쾌, 쾌검일절 선배님, 올라가십시오."
아무런 대꾸도 없이 계단을 밟는 그의 등을 쳐다보던 주인장이 불안한 눈으로 일행들을 쳐다보았다.
진삼의 태도는 누가 보아도 날이 서 있는 반응이었다.
상아가 진삼을 대신해 정중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조용한 걸 좋아하시는 분이라."
"허이구,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돈을 벌려고 한 건 아닌데, 오랜만에 객잔이 떠들썩해지겠다 싶어 덜컥 승낙한 것이 실수였습니다."
그러나, 고개를 좌로 기울인 재희가 말했다.
"조용한 걸 좋아하는 건 맞는데, 어라? 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상아가 제정신이냐는 듯 물었다.
"하 선배님의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요? 눈이 어떻게 되셨나요?"
재희는 오해말라는 듯 두 손을 내저으며 설명했다.
"아하하, 그게 아니라. 하 선배가 사람이 원체 삐뚤어져 있어서 그렇지, 원래 기분이 좋을수록 저럽니다. 사저는 잘 모르겠지만 한 선배는 엄청난 행동파거든요. 진짜 화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살기부터 드러내죠."
"그러면, 혹시 기쁜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
"아. 비슷하다고 할까, 그것보다는 즐겁다는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른다는 게 더 가깝군요."
그러고 보니 그런 거 같기도….
무언가 터무니없는 소리였으나 곰곰이 곱씹던 상아는 이내 탄식했다.
반면에 지찬은 대체 뭔소리를 하냐는 듯이 재희를 비웃었다.
"멍청아,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딨냐?"
"어디있긴, 이제까지 같이 있어왔잖아?"
"내 친구 미친놈으로 만들지 마라."
"네가 몰라서 그렇지, 악양에서는 쾌검일절하면 너 못지않은 미친놈으로 통해. 저 사람들 표정 보여?"
재희가 가리킨 곳엔 십년감수했다는 듯이 숨을 가다듬는 주작각의 단원들이 있었다.
"악양에서 날고 긴다는 놈들 치고 진삼의 칼에 안 찔려 본 놈이 없다니까."
"거, 화끈한고…. 위험한 친구였구만."
"너 빼고 다 알고 있었지. 사실 네가 살아있는 게 신기하긴 해."
물론, 재희야말로 그런 진삼을 약 올리며 목숨을 건 외줄 타기를 즐기는 미친놈 중에 진짜로 취급받는 건 굳이 꺼내지 않았다.
객잔에 들어선 일행들을 연신 힐끔거리는 이들의 눈엔 이 무리 자체가 커다란 벽력탄으로 보였다.
하나는 살짝만 건드려도 몸에 구멍을 내어놓는 민감성 살인마.
또 하나는 마두의 목으로 칠 층탑을 쌓은 마두백정.
나머지 하나는 유명한 또라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칭제까지 범하고 칠제의 제자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이상한 놈까지.
각각의 분야에서 최고의 미친놈들이 한데 모여 있지 않은가.
그들은 이 시끌벅적한 술판 속에서도 일행들을 의식하고 최대한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것이다.
당연히, 가장 주의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객잔주인이었다.
"제께서 적적하시지 않았겠습니까? 어서 올라가 보시지요."
"아, 그렇지. 어르신께 다녀왔다고 인사부터 하러 가야지. 고생하시오 주인장."
"허허. 푹 쉬십시오 대협님들."
일행들이 올라가는 걸 확인한 주인장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쳤다.
* * *
"고생이 많았구나. 그래서, 이제 어찌할 테냐?"
"일단은 마 숙부님이 걱정되서, 조언도 구할 겸 악양 외곽에 있는 북풍검문의 장원으로 가볼 생각입니다."
"아마 헛걸음할 게다. 오늘 너희가 없을 때 그가 나를 찾아왔었느니라. 악양을 떠난다구나."
"예? 마 숙부님이 악양을 떠나신다고요? 괜찮으시려나. 다른 문주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내가 보기엔 다른 이의 눈치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더구나."
남궁적의 후한 평가에 재희는 제 자랑인 것 마냥 즉시 반색했다.
"마 숙부님만큼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분을 드물 겁니다. 백도검문의 문주님들 중에는 유일하죠."
"녀석, 전에 그를 보았을 때는 껄끄러워하더니."
"아니, 뭐. 그때는 조금 어려웠다고 해야되나, 오해를 하고 있었다고 해야되나, 하지만 지금은 제 하나뿐인 숙부님입니다."
"하나뿐인 숙부라."
남궁적은 재희가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숙부를 떠올렸다.
그는 의숙인 마림광과 달리 재희의 진짜 친 숙부였다.
그러고보니 무림령이 발령될 만큼 무림이 떠들썩한데도 남궁의 소식이 없었다.
"재희야. 혹시 밖에서 남궁세가 관한 소식을 들은 바가 있느냐?"
"없습니다. 남궁이면, 아직 재건에 바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일테지만,
혹여나 악양으로 오고 있다면 곤란한 상황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적의 염려를 눈치챈 상아가 조아렸다.
"소녀가 화에게 전서를 해보겠습니다."
"고맙구나."
고개를 끄덕인 적이 다시 재희를 보며 물었다.
"해서, 북풍검문의 도움도 수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할 테냐?"
재희는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적은 고심하는 그에게 일렀다.
"내가 천곽과의 결투로 이목을 끌긴했다만, 결국 천곽이 나타난 후에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다."
"예. 알고 있습니다."
남궁적의 묘수도 시간을 버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 직접 도움을 주고 싶으나, 그럴 수 없음을 너도 알 것이다. 내가 나선다면, 더 큰불로 번지거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가장 큰 난제를 해결해주신다 약속해주셨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희야. 천곽이 유독 네게 가혹했던 건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제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고민해 보거라."
적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남궁적이 방으로 들어가자 남은 일행들의 시선이 재희에게로 몰렸다.
재희는 가만히 앉아 남궁적의 말했던, 천곽이 자신에게 한 짓들을 짚어 보는 중이었다.
‘우연인 줄 알았지. 그동안은 내 실수와 우연이 이렇게 만든 줄 알았어.’
하지만, 종오의 회유. 그리고 그날 굳이 자신에게 검가의 최후를 보여주고자 했던 천곽을 생각한다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자신을 집어, 그의 가혹한 집행을 지켜보게 한 것은 분명 의도가 있을 터였다.
‘그 자식이 왜 나한테 왜 그랬을까?’
재희는 그가 했던 말들을 떠올려 보았다.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구나.
‘그럴 줄 알았으면 자고 있을 때 몰래 찾아가서 칼이라도 쑤셔보는 건데.’
그리고, 그의 상념은 아주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내게 검가를 빼앗아라. 그러면 신교를 살려주겠다.
‘어?’
검가가 불타올랐던 그 날도.
-나는 네게 검가를 뺏으라 말했다. 헌데 이제와서 무엇을 탓하는가.
재희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게, 무슨 뜻이었을까?
멍한 표정으로 고심하던 재희가 갑자기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고개를 떨군 채 잠에 빠져있는 손바닥 만한 금색 자라였다.
"야."
"흠냐냐."
"일어나봐."
"흐엉? 벌써 아침이요…?"
달콤한 잠에 빠져있던 와중에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금와동자.
그는 한껏 진지한 재희의 표정에도 짜증이 잔뜩 어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옛말에 잠자는 자라의 코털을 건드리지 말라 하였소."
"그러다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용봉탕이 되어있을 수도 있어."
"아, 그렇군. 경청하겠소. 말씀하시오."
"검가를 뺏으란 말이, 무슨 뜻이야?"
"그게 무슨 말이요? 이제 없는 걸 왜 뺏소?"
그의 대답과 동시에 상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금와동자의 조언을 구하자 했던 게 아무런 소득도 없이, 괜한 사람의 심기만 건드린 것이다.
"그래. 자라. 자."
"먼저 눈을 떠보니 용봉탕이 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주시오."
"생각해보고."
무어라 더 말하는 금와동자를 품속에 다시 집어넣은 재희.
그는 상아를 향해 머리를 긁으며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이 금수 놈이 뭘 모르고 이상한 소리를 하네요, 사저. 백천검가는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있는데 말이죠."
상아는 몸을 일으켜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사저? 아, 남궁소저께 전서를 붙이러 가십니까?"
"예. 그리고 나가서 찾아볼 생각입니다."
"뭘 찾아요?"
"방법이요."
재희를 힐끔 곁눈질한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한심하게 앉아서 궁상을 떨고 있으니, 발품이라도 팔아 보겠습니다."
"어, 어.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같이 갑시다."
"아뇨. 혼자 가겠습니다."
홱 계단 아래로 내려가 버리는 상아.
재희는 그녀를 향해 뻗었던 손을 거두어 머리를 긁적였다.
마침, 고개를 꾸벅이며 졸고 있던 지찬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 끝났냐? 우리 이제 뭐해?"
관망하던 진삼이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머저리들."
재희를 부탁한다는 어르신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혼자 움직였을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