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머저리. 평소라면 그 소리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저 머저리란 말이 왜 이렇게 귀에 거슬리게 들리는 걸까.
입술을 짓씹은 재희가 삐딱한 시선으로 진삼을 노려보았다.
"그럼. 고명하고 현명하신 하 선배님께서 의견 좀 내주시지."
"모두가 전쟁을 원하는 건 아니다. 최소한 과거를 기억하는 야협들은 정도맹과 신교의 전쟁을 원하지 않아. 그들을 설득하고, 모아서 논담에 나서라."
"말은 참 쉽게 하시는구만. 다들 그걸 몰라서 입을 다물고 있는 줄 알아? 내가 아무리 떠들어봤자 씨도 안 먹힐 거라고."
"왜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잔뜩 신경질을 내다 단번에 합죽이가 된 재희.
왜 안된다고 묻느냐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자신의 진짜 이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재희가 아무리 호소해봤자, 결국 천산신교의 핏줄이 신교의 편을 든다고 여길 게 분명했다.
차마 자신의 입으로 꺼내기 힘든 재희는 한참 동안 뜸을 들이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건…."
그마저도 끝내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에 진삼은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단리재희라서?"
재희는 부릅뜬 눈으로 진삼을 쳐다보았다.
이내 시선을 회피한 그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진삼이 말했다.
"지금의 넌 백천검가의 소가주 이재희다."
"그게 뭐 어쨌다고. 누가 인정해주기는 하나?"
"머저리야. 사람들이 널 경시하는 건 네 핏줄 때문이 아니야."
"하지만 결국은 핏줄을 따지고 들겠지."
"그게 어때서? 왜?"
"난, 검제가 아니라 염제의 손자이니까."
얼마나 자괴감과 죄책감에 찌들었으면 아직도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걸까.
진삼은 지금까지 잘못 되먹었던 이 머저리의 정신상태를 고쳐 놓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래. 넌 칠제의 핏줄이지."
그는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입으로만 칠제의 후예라 떠드는 저 얼간이들이랑 달리, 진짜 칠제의 후예다. 그리고, 대 백천검가의 유일한 후계자다. 잘 들어라. 지금 악양에는 모두가 검가의 후계를 자처하여 그 자리를 대신하고 싶어하지만 아무도 그럴 수 없다. 왜인지 아느냐?"
그는 창밖을 가리켰던 손가락으로 재희를 이마를 눌렀다.
"너. 그리고 본인은 아니라 하지만, 맹주의 양녀나 다름없는 상아. 그리고 맹주님이 계시기 때문이지. 그들은 널 경시하는 게 아니라, 경시하고 싶은 거다. 진짜는 바로 너니까."
재희는 화등잔만 하게 뜬 눈으로 진삼을 응시했다.
그가 이어 말했다.
"지난날, 나는 악양루에서 천산신교의 소교주와 천산마도라 불리는 거인을 보았다. 그날, 천산의 어린 주인은 본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지."
"그때는…."
"뭐가 다르지? 신분? 다시 말하지만 넌 대 백천검가의 유일한 소가주다. 칠제의 이름? 도제께서 내어 주셨다. 누가 도제를 경시할 수 있단 말이냐?"
그리고 진삼은, 소교주의 곁에서 그의 검을 자처하던 굳건한 사내를 회상했다.
"내가, 나 쾌검일절 하진삼이 그날의 천산마도를 대신해 네 옆에 서겠다. 그때는 애송이였지만, 지금의 나는 그에 비해 부족한 검객이 아니야."
이마를 찍고 있던 손가락을 뗀 진삼이 등을 돌려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뭐 하고 있지? 어르신께서 벌어주신 귀중한 시간이다. 움직여."
"잠깐, 진삼, 아니 하 선배."
멈춰선 진삼이 고개만 돌려 재희를 돌아보았다.
재희가 그에게 물었다.
"어째서 내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야?"
그의 또 다른 별호가 괜히 냉정검이 아니었다.
검가에 몸을 담고 있어 정도의 무인이었지만, 웬만한 사파의 거두보다 더 잔혹하고 냉정한 성격을 가진 사내가 진삼이었다.
오늘의 진삼은 수많은 세월 동안 함께 해온 재희에게도 생소한 모습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린 진삼이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널 위해서가 아니라, 빚을 갚는 거다."
"빚?"
"그런 게 있다."
그러고는 훌쩍 계단을 내려가 버리는 그에게 재희가 볼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솔직히 좀 말해주지. 쑥스러워하긴."
진삼을 말을 들으며 무언가 생각할 거리가 많아졌지만, 역시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그가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두 사람이 내려간 후, 바닥에 배를 깔고 있던 금와동자가 눈을 깜빡였다.
"천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의 속은 모른다더니. 정말, 인간이란 참으로 흥미롭소. 그렇지 않소?"
그가 고개를 올려 지찬을 올려보았다.
그런데 지찬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진창이었다.
"크흑, 크윽. 쓰읍-."
코를 들이마시고 소매로 눈물을 훔쳐낸 그가 말했다.
"내 친구는 정말 멋진 녀석이야. 그렇지?"
그리고는 먼저가 두 사내를 쫓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신형을 따라 눈을 움직이던 금와동자.
지찬까지 계단을 내려가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알 수 없구만. 알 수 없어."
* * *
어시장과 무역장. 악양에는 두 개의 큰 시장이 있었다.
상아는 그중에서도 온갖 외지인들로 북적거리는 무역장을 걷고 있었다.
무역장의 끝에 악양의 첫 번째 청로 지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립을 눌러쓰고 무역장을 가로지르는 그녀.
그러나, 고아한 기품과 한겨울의 얼어붙은 호수 마냥 차가운 기세는 숨길 수 없었다.
당연히, 악양의 상인들과 무림인들은 그녀를 알아보고 길을 비켰다.
그녀의 귓가로 장터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제와 함께 돌아오셨다지?"
"아무렴, 정도맹의 간판이자 자랑인 척마대주가 아닌가!"
"하지만, 도제는 지금 검제와…."
"어허 이 사람아! 협객이 대협객을 모시는 게 이상한가? 오해할 소리 하지 말어."
귀에 거슬리긴 했으나, 겨우 저런 소리에 흔들릴 상아가 아니었다.
진정한 협객이 되기 위해 오랫동안 갈고닦은 수양은….
"그러고 보니, 소가주도 같이 있었지."
"아. 화화공자. 그렇지. 줄곧 함께 도제를 모셨다고 그랬네. 으음? 혹시 그건가?"
"그거라니?"
"소가주의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던 척마대주가 그와 이렇게 오래 붙어 다닐 수 있다니, 드디어 화화공자의 마음을 받아준 게 아닐까."
"얼씨구, 선남선녀 납셨네."
"거 여보 쇼들. 다른 협객들이 들으면 칼 맞소. 말도 안 되는…. 히익!"
풍문에 박차를 가하던 무리들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상아와 눈이 마주치곤 기겁하여 입을 다물었다.
지그시 그들을 노려보던 상아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무역시장을 끝에 위치한 청로에 도착한 그녀는 기이한 광경을 목격한다.
수십의 야협들이 청로의 처마 아래 등을 대고 모여 앉아 있었다.
"왜 들어가지 않고…."
청로로 걸어간 상아가 입에 지푸라기를 물고 질겅거리고 있는 야협에게 물었다.
"안에 자리가 없습니까?"
턱에 손을 괸 야협은 고개도 들지 않고 시큰둥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제부터 열지 않았소."
"청로 일 호점에 변고라도 생겼나요?"
"변고는 무슨. 청주들은 축제지 아주. 어제 도제께서 악양에 오셨잖소. 그래서 영업 안합답니다. 염병, 검제께서는 매일 악양에 계시는데도 잘만 영업을 해 놓고는."
그제야 상아는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지.
칠제가 있는 곳에서는 누구도 협객을 자처할 수 없다.
본래 청로의 규율이었다.
단, 늘 협객들이 붐비는 악양에는 특별히 검제가 명을 내려 청로의 문을 열게 했다.
하지만 검제는 검제. 도제는 또 다른 칠제이니, 악양 청로의 주인들이 규율을 내세워 문을 닫은 것이다.
하지만 야협들은 졸지에 터를 잃어버린 셈이었다.
보는 눈이 없는 야산이라면 얼마든지 노숙이 가능했지만, 쥐뿔도 없으면서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그들이 보는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노숙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야협과 낭인의 차이인 것이다.
퉤, 지푸라기를 뱉어낸 사내가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늙은이들, 도제께 물어라도 보던가."
"제께서는 분명 문을 열라고 하셨을 겁니다."
"소저 생각에도 그렇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늙은이들이 꾀를 낸 거라니까."
"어쩔 수 없지요. 규율은 규율이니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상아의 입장에서도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었다.
청로에서 협객들의 협조를 구하려던 그녀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한숨을 내쉰 그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상아를 올려본 야협이 기겁하며 입을 벌렸다.
"협중보…."
급히 옆에 있던 야협이 그의 입을 틀어막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처, 척마대주님 아니십니까. 하하하. 청로엔 웬일로…."
"청주들께 도움을 구할 일이 있어 들렀는데, 이렇게 되었군요."
"도움… 말입니까?"
청로 앞에 앉아 있던 야협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처음 상아와 대화를 하던 야협이 물었다.
"혹시 도제께서 명하신 일입니까?"
상아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의 아주 개인적인 사정입니다."
"협, 아 아니. 척마대주님의 개인적인 사정이라."
서로 눈을 맞춘 협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모인 야협들의 대장 격인, 이마에 커다란 흉터가 있는 야협이 상아를 향해 물었다.
"의뢰하시겠소?"
상아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협행이 아닙니다만."
"상관없소. 가끔은 협객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지."
거절하기엔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잠시 고민한 상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아마도, 지금쯤 청성의 도사가 되지 않았을까 하네요."
"청성의 도사님? 거, 속세의 이름을 버리셨다면 알기 힘든데."
"그래서 제힘으론 찾을 수 없겠다 싶었습니다."
고심하는 낭인들.
그들이 다시 물었다.
"왜 찾으시오? 혹시, 도사님들이 속세를 떠나기 전에 지은 죄로 목을 벨 이유라면 곤란해서."
"저라고 아무나 목을 베지 않습니다."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고. 하여튼 척마대주님께서 도사를 찾는 이유도 궁금해서 그렇소."
상아는 난감한 듯 시선을 굴리며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다, 야엽이 혹시나 해서 물었다.
"혹시, 청성의 도사님들이요?"
"아마도…. 요?"
"두 명이고?"
"그렇습니다."
"누군지 알겠군. 척마대주가 어린 시절에 잃어버린 두 오라비들을 말하는 거겠지."
어라?
이들이 왜 이렇게 잘 알고 있지?
의아해하는 상아.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뒤늦게 깨달은 협객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그 도사들이 워낙 유명한 사람들이라."
"저는 왜 한 번도 듣지 못했을까요?"
"한 여협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거요. 몇 번 얼굴도 마주쳤을 거고. 그 사람들이 당신 앞에만 서면 입을 다물고 있어서 그렇지."
"예?"
"청성의 일결 제자면서 야협질을 하고 다니는 괴짜 도사들이 있소. 공교롭게도, 지금 여기. 악양에 있지."
"혹시?"
"그렇소. 송죽쌍협. 그들이 바로 당신이 찾는 사람들이요."
상아는 미묘한 표정을 짓다 곧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몇 번 보기는.
저번에 악양을 떠나기 전까지 함께 협행을 다녀온 도사들이었다.
"어쩐지, 청성에 한씨 성을 썼던 도사들이 있냐고 물었을 때 아무 말도 않더라니."
낄낄 웃는 야협들.
그들은 그동안 송죽쌍협이 애써 지켜온 비밀이 까발려지자 통쾌한 웃음을 지었다.
안타깝기도 하고, 보는 입장에서 속이 타 들어가는 기분이도 했었다.
상아는 문득 두 도사들의 정체를 밝힌 야협이 누군이지 궁금해졌다.
지금까지 비밀로 해왔다면 필시 다른 협객들도 협조가 있었을 터,
최소한 송죽쌍협이 분노하든 꿈쩍도 하지 않을 사람일 터였다.
"헌데, 선배님께서는 누구시기에…."
야협이 대답했다.
"본인은 청성괴협이라 불리는 사람이오. 그놈들의 대사형이지."
눈을 치켜뜨는 상아.
도제를 존경하여, 청성의 절기인 검이 아니라 도를 연마하여 경지에 올랐다는 괴짜에 대한 소문은 그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군자도와 같은 세대에 활동한 대선배이자 유명한 야협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