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제귀환록-177화 (177/282)

177화.

사후의 무심한 눈빛에도 재희는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등 뒤로 쥔 손은 땀으로 흥건했다.

일생에 이렇게 긴장되었던 게 몇 번이나 되었을까.

심지어, 그날 밤 검제의 앞에 섰을 때도 오늘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비록 검제의 명령으로 이어진 인연이라고는 하나, 사후와 재희는 부자 관계였다.

단언컨대 사후는 재희에게 부족하지 않은 아버지였다.

심지어 그에게 검가의 소가주로서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으며, 오직 재희가 검가에서 잘 적응하도록 배려해주었다.

정도맹의 맹주와 검가의 가주를 겸하며 일분일초가 바쁜 시간을 내어 직접 재희에게 검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반면 재희는 그런 사후에게 단 한 번도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사후를 아버지라 인정하고 싶지않았다거나 하는 치기어린 마음이 아니었다.

사후의 가장 절친한 벗을 잃게 만들고, 그가 맹의 이익을 위해 신교와 전쟁을 일으킨 무정한 인간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것이 바로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그 죄책감 때문이었다.

곁에서 사후를 지켜봤기에 재희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가 바라는 강호가 무엇인지, 왜 그가 신교와 전쟁을 바라는 건지를.

사후의 오랜 숙원이자 꿈이었다.

그리고, 지금.

재희는 그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부자는 아무런 말 없이 시선을 마주치고 있을 뿐이었다.

제갈성연이 그런 사후를 갑갑하다는 듯이 흘겨보았다.

하지만 성연의 질책어린 눈빛에도 사후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한숨을 내쉰 그가 사후를 대신하여 재희를 질책했다.

"이재희. 그대는 대 백천검가의 소가주요. 검가의 소가주로서, 그리고 정도맹의 악양 순찰대장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행하시오."

이제 성공리에 마무리 되어가는 만담회에 허튼 수작을 부리지 말고 조용히 물러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순순히 물러날 재희가 아니었다.

"때문입니다. 제가 검가의 소가주이기 때문에, 백도검문이 하려는 일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어찌 대 검가의 소가주란 자가 대의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알고 있습니다. 제갈 책사님. 다만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방법이 틀렸다는 겁니다."

"방법이 틀렸다? 하하하! 그러면 소가주가 생각하는 옳은 방법이란 무엇이오? 검가를 멸한 신교를 용서하고, 평화를 도모하자는 뜻이오?"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은 그가 악양루 아래에 모인 무림인들을 향해 물었다.

"동도 여러분. 여러분도 여기 소가주와 같은 생각이십니까? 진정 우리가 평화를 위해 인내하고 희생을 감수해야만 한다고 보십니까?"

촤락!

부채를 펼친 그가 일렀다.

"10년 전. 우리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사천에서의 잔혹한 살육을 눈감아주고. 함께 염제의 죽음을 기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비의 대가는 무엇이었습니까? 돌아온 것은 잔혹한 복수였으며, 우리를 공포에 떨게 했던 청화의 재림이었습니다."

백도검문과 정도맹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청화를 휘두르는 염제 단리강과 신교의 율법사자, 그리고 청화 수호대들.

고작 일백도 되지 않는 그들을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바야흐로 신교의 푸른 불꽃이 복수라는 이름으로 맹과 무림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검가의 멸문은 대가입니다. 화근을 제거하지 못하고, 어설픈 자비를 베푼 대가입니다."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는 일장연설에 악양루에 모인 무림인들이 호응하기 시작했다.

"총 책사님의 말씀이 옳소! 오늘 다시 용서하면, 신교는 또다시 청화를 앞세워 무림을 위협할 거요!"

"검제께서 너무 자비로우셨던 거지. 처음부터 믿을 수 없는 족속들이었소."

그들의 목소리에 심어진 뿌리 깊은 불신을 느낀 재희는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재희를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는 제갈성연.

그리고, 그런 그의 귓가로 사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게 도제는 믿을 수 있고, 나는 믿지 못할 사람이었느냐?"

화들짝 놀란 재희가 사후를 쳐다보았다.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부정하는 재희.

하지만 사후는 실망한 얼굴로 재희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나는 정도 무림을 대표하는 정도맹의 맹주다. 옳지 않은 방법이라 하더라도, 언제나 최선을 선택해야 한다. 나를 찾아와 네가 아는 것을 알렸다면 나는 감안했을 것이다."

너의 불신과, 도제를 끌어들인 섣부른 선택이 이러한 결과를 만들었다.

사후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변이 일어나지 않을 분위기에 착석해 있던 백도검문의 가주들이 하나둘씩 의자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스쳐보는 그들의 눈에 섞인 조소.

재희의 머릿속에는 그들의 소리 없는 비웃음 소리가 메아리쳤다.

재희는 멍한 눈으로 악양루의 아래를 내려보았다.

그리고, 그들과 섞인 한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한곳에 모인 협객무리들.

그 가운데 상아가 재희를 올려보고 있었다.

협객들은 다른 무림인들과 달리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마치, 재희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재희는 악양루에서 내려가려는 문주들과 사후를 향해 소리쳤다.

"제가 이 자리에서 신교의 범행이 아니란 것을 입증하면 되겠습니까?"

그리고는 악양루의 난관을 붙잡

그대로 악양루의 아래로 뛰어내렸다,

파라락-!

옷자락을 휘날리며 악양루 아래로 착지한 그.

바로 앞에는 비어있던 터라, 앞쪽에 모인 무림인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재희는 망설임 없이 열왕신공을 발현했다.

화르르륵-!

그의 발치에서 생겨난 새빨간 불꽃이 온몸을 휘감았다.

"부, 불!?"

"열왕신공이다! 소가주가 열왕신공을 사용했어!"

아래쪽에서 일어난 소란에 자리를 떠났던 백도검문의 문주들이 다시 난관 앞으로 모여들었다.

객잔을 호위하던 맹의 무사들이 달려와 재희를 포위했다.

불꽃에 휩싸인 재희.

그가 좌중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교는 불꽃을 두려워하고, 신교의 핏줄은 힐난하는 동도들께 묻습니다. 당신들이 두려워하는 푸른 불꽃을 지녔고, 당신들이 경시하는 핏줄이었던 염제도 당신들에겐 그저 이교도이며, 이방인이었습니까?"

대답은 위쪽에서 들려왔다.

"갈! 누구와 비교를 하느냐! 애초에 무림을 구하셨던 분은 염제셨지, 신교가 아니었다. 염제를 제외하고 신교의 그 누가 북적의 항전에 참여하였느냐? 우리가 믿을 수 없는 것은 염제가 아닌 천산의 불이다!"

백도검문. 성검문의 문주의 외침에 다른 문주가 동의하며 보태었다.

"보아라. 염제께서 돌아가신 후, 청화가 검가를 멸하였다. 고수를 가리지 않고, 내공을 불태우는 저주받은 불꽃이다. 염제가 아닌 자가 그 저주받은 불꽃으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누가 아느냐?"

"그렇다면 당신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신교가 아니었군요. 신교가 지닌 청화군요."

침을 삼키며 재희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그리고, 그의 새빨간 불꽃은 점점 푸른빛을 물들어갔다.

이윽고, 완연한 푸른 불이 재희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악양루는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청화에 곧 난장판이 되었다.

그러난 재희는 상관하지 않고 악양루의 위를 올려보며 소리쳤다.

"저는 그날, 검가를 습격한 흉수들과 싸우기 위해 청화를 사용했습니다. 그날 밤, 목격자들이 본 청화룡은 다름 아닌 저의 불꽃이었습니다."

그가 말을 하는 와중에도 재희를 포위한 무인들의 검이 점점 좁혀져 오고 있었다.

"그래도 천산의 청화가 두려우십니까?"

돌연, 그는 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소인 백천검가 소가주 이재희이자, 전 천산신교의 소교주 단리재희가 부탁드리겠습니다.

허리에 단 칼을 뽑아 땅에 박고, 그 옆에 자신의 목을 숙였다.

"맹주님. 그리고 백도검문의 문주님들. 이 자리에서 두려움을 제거하시고, 신교와 평화를 도모해주십시오."

일순간 소란이 멎으며 정적이 내려앉았다.

* * *

"신교에 청화가 없다면 이미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지금 청화를 제거해야 합니다."

부채로 입을 가려 소리를 죽인 성연이 사후를 재촉했다.

하지만 사후는 재희의 몸 위로 타오르는 푸른 불꽃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맹주! 대의를 생각하시오."

보다 못한 성연은 직접 무인들에게 신호를 주어 재희의 목을 쳐라 명령을 내리려 하였다.

그러나,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아당겨 제지했다.

제갈성연을 치워낸 진삼이 사후를 불렀다.

"하진삼입니다."

성연의 말에는 미동도 하지 않던 사후의 고개가 진삼을 향했다.

사후와 눈이 마주친 진삼이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진삼. 자네도 저 아이의 의견에 동의하는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잠시 뜸을 들인 그가 이어 말했다.

"의형께서 또 후회하실까 걱정이 될 뿐입니다."

사후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재희를 내려보았다,

무릎을 꿇고 목을 내민 꼴이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보였다.

"조흥은 아무 잘못이 없었네. 하지만 죽어야 했지."

사후의 마음을 짐작한 성연이 소리쳤다.

"사후! 새 강호를 위해 무엇이든 감수하겠다고 나와 약속하지 않았는가!"

사후가 대답했다.

"늦었네 성연. 이제 아무도 재희를 죽일 수 없어."

"그게 무슨…."

성연은 말을 잇다 말고 아래쪽에서 점점 커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가주를 살려주시오!"

"소가주를 살려주시오 맹주!"

"정도맹은 참사의 진상을 다시 조사하시오!"

협객들로부터 시작된 목소리.

악양루에 모인 야협들, 낭인들. 그리고 심지어 백도검문의 무인들까지.

어느새 그들이 한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성연이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글러버렸군."

재희가 무림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진삼도 얼떨떨한 얼굴로 난관 앞에 붙어 재희를 내려보았다.

재희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무인들이 난감해 할 정도로, 재희를 죽이지 말라는 목소리가 동정호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보게 진삼."

진삼이 고개를 돌리니 사후의 입가에 좀처럼 보이지 않던 미소가 맺혀있었다.

"저 아이가 언제 저만큼 자랐는가."

사후가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란 것을 알았던 까닭에 진삼은 대답하지 않았다.

주위의 목소리를 들은 재희는 어느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런 재희를 한참 동안 내려보던 사후가 등을 돌렸다.

"총 책사는 신교에 보낼 서신을 준비해주게."

그리고 넋이 나가 있는 백도검문의 문주들을 향해 일렀다.

"아쉽지만 돌이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문주님들. 빠른 시일 내에 회의를 가져야 할 듯하군요."

몇몇은 납득한 듯 연락을 기다리겠다며 흔쾌히 수락했다.

그들도 재희의 의기에 적잖이 감동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몇몇은 재희를 노려보다 끝내 등을 돌렸다.

그렇게, 일이 마무리되어 가는 듯했다.

악양루의 옆 주루 지붕에서 날아온 검은 불덩이가 악양루의 삼층 지붕을 집어삼키기 전까지는.

콰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터져나가는 지붕.

그와 함께 떨어져 나온 검을 불씨가 빼곡히 모여있던 무림인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몸에 붙은 검은 불꽃은 단숨에 사람을 집어삼키며 몸집을 불렸다.온몸이 불타는 고통에 끔찍한 비명소리를 내지르는 사람들.

불을 꺼주기 위해 달라붙는 다른 이들 역시 검은 불꽃이 옮겨붙으며 악양루는 삽시간에 지옥으로 변했다.

"끄아악! 살려줘, 살려줘!"

"습격이다! 맹의 무인들은 습격에 대비하라!"

"불이 붙은 사람들은 호수 속으로 뛰어드시오! 불이 붙지 않은 사람들은 물을 퍼오고!"

재희는 아수라장 속에서 검은 불꽃의 주인을 찾았다.

악양루의 옆 주루의 지붕 위.

그곳에 검은 비단 장포를 걸친 사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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