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천강의 턱을 정확히 후려친 재희의 주먹,
뇌가 흔들리는 느낌과 함께 천강은 의식을 잃었다.
털썩.
천강이 쓰러지자 협곡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정지했다.
재희가, 10년 전 신교를 떠났던 소교주가 교주를 쓰러트렸다.
재희는 죽은 듯이 누워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그의 귓가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죽여라.”
고개를 돌리자, 단리천향을 비롯한 율법사자들이 싸움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천향이 말했다.
“네가 교주를 죽여야 끝이 난다. 희야. 어서.”
다시 고개를 돌린 재희의 눈이 천강을 향했다.
검을 꽉 움켜쥔 그의 동공은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목숨을 걸고 이루었던 평화를, 한순간에 짓밟아 버린 마인이었다.
무시무시한 화염을 휘두르며 목을 옥죄어 오던 악마였다.
그리고, 아버지였다.
“당신은 절대 이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정신을 잃은 천강이 들을 수 있을리는 없겠지만 재희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칠중염제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셨으며, 제겐 존경스러운 아버지셨습니다.”
그랬던 당신이 이렇게 미쳐버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이 있었을지, 재희는 감시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제 그만 쉬십시오. 감히 용서는 바라지 않겠습니다. 아버지.”
그래도 어쩌면, 아버지가 저승에서 이성을 되찾게 된다면 자신을 용서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검을 치켜든 재희가 천강의 심장을 향해 검을 내려찍었다.
검끝이 가슴에 닿는 순간.
감겨있던 천강의 눈이 뜨였다.
쿠웅-! 화라라락!
검은 불꽃과 함께 몰아치는 돌풍.
재희의 검은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에 가로막혀 그의 심장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흰자위 없이 새까맣게 변한 천강의 눈이 재희를 향했다.
그 새까만 동공과 마주친 재희는 즉시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파아아악! 화르르륵!
폭죽더미에 불을 붙인 듯 단리천강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불꽃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끝없이 솟구친 불꽃은 곧, 거대한 용의 형상을 갖추었다.
지금까지 천강이 부렸던 흑화룡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크기.
진짜 용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도 되지 않은 재희가 천강의 상태를 살폈다.
불꽃 용의 몸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천강.
그는 마치 실에 걸린 인형처럼, 늘어진 팔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검은 불꽃이 협곡을 포위했다.
불의 진속에 갇히게 된 협객들과 율법사자들이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상아를 비롯한 일행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숨을 쉬기조차 힘겨운 듯, 두 손으로 목을 감싸 쥐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검을 든 재희가 천강을 향해 달려들었다.
머리를 내린 흑룡이 재희의 앞을 가로막았다.
흑룡은 거대한 입을 벌려 재희에게 말했다.
“화룡이여. 내 의무를 방해하지 마라. 관조자께서 정하신 섭리를 따르라.”
분명 천강의 목소리였지만 천강이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재희는 알지 못하는 미지의 존재.
어쩌면, 먼 옛날 천산의 첫 선조께서 인연을 맺었다는 화룡이 바로 눈앞의 존재가 아닐까?
마른 침을 삼킨 재희가 물었다.
“당신은 뭐죠?”
“사람만상에 닿지 못한 죄인아. 너는 아직 알 자격이 없다.”
흑룡의 대답에 재희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야.”
“…?”
“좋아. 네가 내 아버지에 씌인 귀신이건 진짜 용이건 내 알 바 아냐. 할 만큼 했잖아. 이제 좀 꺼져.”
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재희는 흑룡이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 대의 화룡의 주인은 당돌하구나. 선대의 주인도 그랬지. 나는 그가 마음에 들었었다.”
“화룡의 주인? 내 할아버님을 말하는 거야?”
“그래 단리강. 그 자. 검종에게 살해당했던 화룡의 주인.”
“이런, 할아버님과 아는 분이셨군. 이거 실례했소. 음… 뭐라고 불러야 하나. 용 대협? 할아버님과의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이쯤 해 주시면 안 되겠소? 이러다가 내 친구들이 다 죽게 생겨서 말이오.”
화룡은 커다란 머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나는 이미 그를 위해 집행을 미루어 주었다. 허나 화룡을 수호하는 너의 혈족들을 위해서라도,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그러니까, 미룰 수 없다면 뭘 하겠단 말씀이시오.”
“생명을 불태워 천산에 고인 악기를 정화해야 한다.”
흑룡의 대답을 천천히 곱씹던 재희가 말했다.
“꼭 오늘 해야 합니까? 언제 좋은 날로 잡아서….”
“너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하아. 산 넘어 산이라더니.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사나운 팔자를 탓한 재희가 청화를 일으켰다.
이윽고, 재희의 몸을 감싼 불꽃이 푸른 용의 형태를 갖추었다.
흑룡에 비하면 반도 되지 않는 크기.
승산이 없음을 직감했지만 재희는 흑룡의 머리를 향해 달려갔다.
‘후회는 없어.’
정말 최선을 다했다.
이제 재희는 이대로 죽는다 하더라도 여한이 없었다.
다만, 한가지는 마음에 걸렸다.
‘사저랑 진삼, 지찬. 그리고 청성괴협선배님과 의협님들.’
물론 누구도 재희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도와주러 온 모든 이들이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생각하니 가슴이 쓰라려 왔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그의 청화룡이 흑룡과 격돌하기 직전, 재희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혹시 다음 생이란 게 있다면, 또 당신들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커다란 용의 아가리가 청화룡과 함께 재희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뒤에서 나타난 누군가가 재희를 밀어내었다.
* * *
“지금이 적기인 것 같습니다만, 검은 불꽃이 저렇게 벽을 치고 있으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군요.”
제갈성연의 말에 동의한 문주들이 다 함께 침음을 삼켰다.
성벽처럼 협곡의 중간을 가로막은 검은 불꽃.
교주의 경지는 그들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지켜보길 잘했군. 소가주와 협객들이 아니었다면 하마터면 우리가 저 불 속에 휘말릴 뻔하지 않았소?”
청백검문주의 말에 다른 문주들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불꽃을 응시하고 있었다.
맹주 이사후.
성연은 불안한 표정으로 계속 사후를 곁눈질을 했다.
결국 그가 사후에게 조언을 올렸다.
“목림대왕을 처단한 것만으로도 큰 수확입니다. 맹주. 오늘은 철수하시는 게 옳을 듯합니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 사후가 성연을 빤히 쳐다보았다.
“성연.”
불길한 예감이든 성연이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되오. 부디 당신이 책임져야 할 형제들을 생각하시오 맹주.”
“지휘를 부탁하네.”
“이사후! 자네가 다짐했던 대로, 강호의 미래를 먼저 생각하게!”
하지만 사후는 결국 근처에 메어 두었던 자신의 말 위에 올라탔다.
그는 검은 불꽃이 피어오르는 곳을 눈을 두고 말했다.
“하지만 어쩌겠나.”
성연이 온몸으로 사후의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자네도 헛되이 죽을 셈인가!? 조홍처럼? 거 참 보기 좋은 의리로군! 하지만 사후. 안되네, 그는 일개 야협이었지만, 자네는 대백천검가의 가주이며, 정도맹의 맹주일세!”
“조홍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어.”
고개를 돌린 사후가 검문의 문주들을 바라보았다.
과거, 그들 중 일부는 척마대주였던 조홍이 정도맹의 맹주가 되길 원했었다.
“나는 맹주가 될 재목이 아니었지. 보게,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지만, 조홍은 남겼네. 협객, 그리고 아이들을 말이야.”
사후는 기어이 고삐를 내려치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저 아이들이 미래일세. 강호의 미래가 저곳에 있네.”
사후의 말이 불꽃을 향해 내달렸다.
백천검가를 상징하는 순백의 기마. 숙백의 장포가 휘날렸다.
새하얀 섬광처럼, 진열을 뚫고 간 사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불꽃의 벽에 도달했다.
불꽃을 보고 겁에 질려 속도를 죽이는 백로.
사후는 그런 백로의 목을 두들기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한다.”
그러자 백로의 뒷발이 힘차게 땅을 박찼다.
높게 날아오른 기마가 검은 불꽃 속으로 뛰어들었다.
“히히히힝-!”
검은 불꽃에 휩싸여 고통스런 비명을 토해내는 백로.
불꽃에 휩싸인 건 백로만이 아니었다.
사후 역시, 검은 불꽃에 온몸이 잠식당해있었다.
내공을 끌어모아, 호신강기를 펼쳐 불꽃에 저항한 그의 눈에 흑룡에게 집어 삼켜지는 재희의 모습이 들어왔다.
재가 되어 사라지는 백로 대신 두 발로 땅을 디딘 그가 재희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용의 머릿속으로 뛰어들어 재희를 끄집어낸 그는 이제 살갗이 타 들어가는 고통을 참으며 검을 내질렀다.
철형십식(徹炯十識). 십초식. 평심(平心).
천검이라 불릴 정도의 희대의 재능을 갖추었던 검제.
그러나 하늘은 그의 아들에게 아비와 같은 재능을 허락하지 않았다.
때문에 사후는 어려서부터 그의 아비와 많은 비교를 당해야 했다.
나쁘지 않은 재능을 가졌음에도, 오직 검제의 아들이란 이유로 저울질 당하던 어린 시절.
하지만, 사후는 단 한 번도 너무 뛰어났던 그의 아비를 원망하거나, 검을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재능은 물려받지 못했으나, 그의 아버지가 가졌던 올곧은 성정과 집념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이었다.
천곽은 결국 천 가지 검법을 익히고 만 가지 검법을 창안하였다는 아비와 달리, 단 하나의 검법에 매진하여 완성해내었다.
그것이 바로 사후의 비전걸기. 철혈십식이었다.
단숨에 갈라지는 흑룡의 머리.
그러나 사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검은 불꽃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던 내공을 모두 끌어모아 발끝과 검에 분배한 그가 천강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두 손으로 움켜쥔 그의 검이 천강의 심장을 꿰뚫었다.
푹-.
피가 튀어오르는 동시에, 천강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은 불꽃이 일제히 사그라들었다.
“가주님!”
사후를 향해 뛰어온 재희가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청화를 품고 있는 자신이야 괜찮았지만, 사후가 검은 불꽃을 온몸으로 뒤집어쓰고도 멀쩡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후에게 달려온 재희는 천강이 죽으며 사라진 검은 불꽃에 안도했다.
그러나, 그 순간. 사후의 검이 재가되어 바스라졌다.
이어서, 그의 손끝부터, 천천히 재가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주님? 가주님의 몸이….”
온몸이 재가되어 흩어지는 와중에도, 사후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재희를 돌아보았다.
그는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재희를 보며 중얼거렸다.
“조홍이 죽은 후로, 다시는 소중한 것을 만들지 않기로 마음먹었거늘.”
사후는 사라진 오른팔 대신, 이제 검게 물들어가고 있는 왼팔을 올려 재희의 머리 위에 얹었다.
“문득 돌이켜보니, 너희가 상아와 네가 내 아들이고, 딸이 되어있더구나.”
“가주님 저는…. 저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재희의 손이 그의 왼손을 붙잡자, 재가되어 흩어졌다.
재희는 자신의 손에 남은 잿가루와, 사후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사후는 의식이 멀어지기 전, 아들에게 말했다.
“재희야. 너는, 내 자랑스런 아들이었다.”
이윽고, 모든 것이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때서야 재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어야 했는지 뒤늦게 깨닫고 주저앉아 버렸다.
친아버지의 시체 앞에서, 그는 재가되어 사라진 의부의 흔적 위에 눈물을 쏟아내며 흐느꼈다.
“아버지, 아버지….”
빌어먹게도 못난 아들이었다.
같은 날. 재희는 두 아버지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