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제귀환록-199화 (199/282)

199화.

눈 덮인 기련산 마루.

그 산마루를 그대로 그려놓은 호수의 풍경을 감상하는 이때는 노부부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나란히 앉아 호수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 두 남녀.

남궁적과 신혜는 고즈넉한 기련산의 풍경처럼, 조용히 서로의 어깨를 기대고 있었다.

그렇게, 두 제(帝)가 여느 때처럼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음?”

문득 고개를 올려 태양을 쳐다보는 남궁적.

그의 기척에 적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든 신혜가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가가?”

“단아가 돌아왔구려.”

“단아요? 아. 오늘이 남궁세가에 다녀오는 날이었나요?”

남궁적의 부탁으로 일 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합비에 갔다 오는 단아였다.

“어제였소. 하루 늦은 걸 보니 소식을 가져왔나 보오.”

큰 변고가 없다면 합비의 하늘만 둘러보고 돌아올 터.

하루가 늦었다는 적의 대답에 신혜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남궁에 큰 변고가 없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단아의 날갯짓에 여유가 넘치는 걸 보니 좋은 소식일 듯하오.”

남궁적의 말처럼 태양 속에서 호수를 향해 활강한 단아가 여유롭게 호수의 수면을 스치며 물보라를 일으켰다.

촤르르륵-!

단아가 일으킨 물보라를 뒤집어쓴 신혜가 소리쳤다.

“단아야!”

“삐익-.”

그러나 그녀의 호통에도 단아는 장난기 가득한 눈동자를 돌리며 딴청을 부릴 뿐이었다.

적과 신혜가 혼인을 맺은 후부터 자신에게 소홀해진 두 사람에게 종종 심술을 부리기 시작한 단아.

그런 녀석의 심정을 알기에 적과 신혜는 단아를 더 다그치지 않았다.

적은 총총 걸어온 단아가 자신의 노고를 알아달라는 듯이 남궁적의 품에 머리를 비볐다.

“그래. 고생했다.”

“빼액!”

“아무렴, 항상 고맙구나. 그래. 적화가 서신을 달아주던?”

냉큼 몸을 반 바퀴 돌린 단아가 엉덩이를 치켜 올렸다.

단아의 꽁지깃 끝에는 고운 비단첩 하나가 묶여있었다.

남궁적이 비단첩을 풀어 거두자 다시 몸을 돌린 단아가 남궁적의 품속에 머리를 비볐다.

“알겠다. 내 조금 이따 술을 나눠주겠느니라.”

그제야 남궁적의 품속에서 빠져나온 단아가 만족한 듯 신혜의 옆으로가 배를 깔고 앉았다.

그 교활한 행태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신혜가 중얼거렸다.

“나이를 먹을수록 꾀만 늘어가니, 단아가 남궁세가에 폐를 끼치지 않았나 걱정이에요.”

적은 신혜의 걱정에 그저 쓴웃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단아가 합비에 다녀오는 날이면 깃털에 윤기가 흐르니,

사실 남궁적은 녀석이 남궁에 갈 때마다 적화에게 있는 힘껏 신세를 지고 온다는 건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여리고 착한 적화가 단아에게 얼마나 너그러울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뻔했다.

신혜가 그 사실을 눈치채고 단아를 혼낸다 한들 그만둘 단아도 아니였고, 세가에 찾아온 단아를 소홀히 대할 적화가 아니었기에 모른 척 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신혜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 적당히 얻어먹고 오라며 단아에게 눈초리를 주었다.

물론 그런 단아와 남궁적의 작당을 애써 모른 척하는 건 신혜의 몫이었다.

“적화가 어떤 서신을 보냈나요? 빨리 읽어보세요.”

신혜의 재촉에 남궁적은 적화가 보낸 편지를 펼쳐 읽어내렸다.

편지를 읽던 그가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남궁세가를 찾았던 때가 10년 전 이맘때쯤이었구려.”

“그때 크게 야단을 치셨다 하셨죠?”

“그랬다오. 헌데… 남궁에서 그 날을 기억하고자 10년마다 축제를 연다하오. 적화가 초청장을 보냈군.”

“어머, 축제요?”

안휘항전에 목숨을 바친 남궁의 영웅들을 위해 제사를 지낸다는 이유로 민초들에게 협비를 뜯어내던 안휘의 협객들.

적화는 부끄러운 과거로부터 안휘무림이 다시 깨어난 날을 기억하기 위해 축제를 열기로 한 것이다.

영웅들을 위하는 제사 대신, 과거를 반성하는 축제를 열기로 한 남궁.

10년의 기간을 둔 이유도 과거처럼 세가와 안휘의 민초들에게 부담이 가지 않도록 생각한 것이겠지.

과연 적화다운 발상이었다.

신혜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남궁적에게 물었다.

“가가. 내려가 보시겠어요?”

“마음은 당장이라도 안휘에 있고 싶으나, 알다시피 나는 이제 무림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소.”

투룡대전 이후 남궁적은 천곽과 함께 무림을 떠나기로 선언했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

그는 차근차근 새롭게 거듭나고 있는 무림에 다시 자신의 그늘을 덧씌우고 싶지 않았다.

편지를 접은 남궁적은 오두막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허나, 그 아이들이라면 분명 축제를 더 의미 있게 만들어 줄 것이오.”

간만에 편지를 써야겠군.

남궁적은 앉아있는 신혜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그러고는 그녀와 함께 오두막과 이어진 작은 오솔길을 걸었다.

* * *

“삐이이익-!”

“괴, 괴물이다!”

갑자기 하늘에 나타난 거대한 괴조가 산채의 나무방벽 위에 앉았다.

덕분에 때아닌 비상에 걸린 호왕채의 녹림호걸들.

활과 날붙이를 꼬나쥐고 산채 안에서 쏟아져 나온 그들은 사람 만한 커다란 금빛 매와 대치하고 있었다.

“저, 저게 뭘까요 조장님?”

“내가 어떻게 알아 인마! 빨리 대두령님이나 불러와!”

“예, 옙!”

허겁지겁 본채 안으로 뛰어가는 녹림도.

잠시 후, 본채 안에서 커다란 고성이 터져 나왔다.

“뭐? 주작? 주~작!? 갑자기 깨우더니 하는 소리가 웬 개소리야! 니들 뒤지고 싶냐? 엉!?”

쾅!

두꺼운 통나무 대문을 박차고 나온 거한.

그는 십만 녹림의 대두령이자, 칠중도제의 제자인 녹림도왕 지찬이었다.

사색이 된 얼굴로 산채의 앞마당에 모인 수하들을 쓸어본 그가 한심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집채만 한 호랑이가 나타나도 내단을 꺼내먹을 생각부터 해야지, 쫄아 있는 꼴하고는. 뭔데 그래?”

그의 곁으로 달려운 부채주가 한쪽 나무방벽 위를 가리켰다.

나무 방벽위에 선 단아를 발견한 지찬이 눈썹을 기울였다.

“엉? 병아리?”

“어떻게 할깝쇼? 한 번에 화살을 날려버릴까요? 내단은….”

와락!

부채주의 멱살을 낚아챈 지찬이 경고했다.

“내 친구한테 화살을 왜 먹여!”

“예? 친구요?”

다시 호왕채로 내려오기 전까지, 기련산에서 남궁적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지내온 마지찬이었다.

그와 단아는 인적이 드문 기련산 자락에서 원수 같은 사형제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벗이라 부를 수 있는 사이가 된 것이다.

“여~ 단아! 웬일이냐!”

“빼액!”

“빽 거리면 내가 어떻게 알아 인마? 옳거니. 이 형님이 보고 싶어서 왔구만. 거기! 어제 잡은 멧돼지 꺼내 와라. 어, 그래. 술도 가져와!”

어떻게 된 상황인지 혼란스러웠으나 일단은 지찬의 명령에 따라 고기와 술을 가지러 가기 위해 움직였다.

그때,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방벽 위에서 내려온 단아가 지찬을 향해 총총 걸어왔다.

지찬을 올려보며 도리도리 고개를 저은 단아가 날개 안쪽으로 부리를 집어넣더니 종이 한 장을 물어 내밀었다.

“엉? 이건 뭐냐?”

종이를 펼쳐본 지찬은 곧 편지가 스승인 남궁적의 서신임을 알아보았다.

글공부가 서투른 그는 어렵게 한 글자씩 편지를 읽어내렸다.

그러더니 활짝 핀 얼굴로 갑자기 소리쳤다.

“됐다! 으하하! 짜식, 스승님께서 내 고민을 알고 해결해주시려 널 보냈구나!”

“빼액!”

“어. 나도 남궁에서 축제를 계획하는 건 알고 있었지. 근데, 산적이라서 말야. 으하하! 가고는 싶은데, 어떻게 껴 볼까 방법을 찾던 참이었거든. 근데 스승님의 편지라니. 이거면 됐지. 암!”

“삑-. 삑.”

“남궁소저한테 흑심? 아냐, 인마! 연심이지 연심.”

괴조와 대화를 나누는 지찬의 모습에 그의 뒤에 서 있던 녹림도가 슬쩍 자신의 머리 옆으로 손가락을 들어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랜만에 단아와 대화를 나누던 지찬은 이제 가봐야 한다는 듯 다시 방벽 위로 뛰어오르는 단아를 향해 외쳤다.

“술한잔 하고 가!”

“빽-!”

“그래? 다른 녀석들한테도? 그럼 어쩔 수 없지. 가봐라. 다음에 한 잔 하자고!”

푸드드득!

단아는 힘찬 날갯짓과 함께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단아는 한 번도 땅을 밟지 않고 삼 일간 중원의 창공을 맴돌았다.

이윽고, 한곳에 시선을 멈춘 단아의 몸이 떨어지는 별똥별처럼 지상을 향해 낙하했다.

단아가 도착한 곳은, 사천 인근의 이름 없는 들녘이었다.

쿵-!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 속에서 몸을 털며 일어난 단아가 높이든 머리로 주변을 훑었다.

그러다, 나무 뒤에 숨어있던 작은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마주친 소녀의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활짝 웃으며 단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와! 단아다 단아!”

새가 지저귀는 듯한 목소리 달려온 소녀는 단아의 목을 껴안고 매달렸다.

단아는 자신이 가슴깃에 얼굴을 부비는 소녀의 행동에도 불쾌한 티 하나 내지 않고 가만히 받아주었다.

그때, 여인의 목소리가 소녀를 다그쳤다.

“소소야. 단아를 귀찮게 하면 안 된다고 했잖니.”

“앗! 미안해 단아야. 헤헤. 나도 모르게 그만….“

냉큼 단아에게서 떨어진 소소가 머리를 긁적이며 혀를 빼물고 웃었다.

그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걸어온 백의 여인.

협객들의 협객이라 불리는 대협객. 검후 한상아가 단아를 보며 싱긋 웃었다.

“오랜만이구나 단아야. 소란스럽게 등장하는 것도 여전하고.”

단아는 그건 온 중원을 돌아다니는 네 탓이라며 빽 울었다.

상아를 찾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한 단아는 곧바로 날개 죽지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주었다.

단아에게 편지를 전달받은 상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가 어르신께 단아를 통해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내는 건 자주있는 일이었지만, 단아가 편지를 가져오는 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편지를 읽는 그녀에게 제자인 소소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스승님, 스승님. 무슨 편지인가요? 혹시 재희 사숙이 보낸 편지에요?”

“기련산에서 온 편지구나.”

“네?”

“단아가 아니었다면 중요한 일을 놓칠 뻔했다. 남궁매가 청로에 연락을 넣어뒀을 텐데, 그동안 청로에 들리지 않고 무심했던 내 탓이다.”

“네? 남궁 고모님이 왜요?”

“남궁세가에서 축제가 열릴 모양이다. 어르신께서 당신 대신 우리가 가줬으면 한다구나.”

“네에~? 네에~~!? 축제요? 와아아!”

축제라는 말에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좋아하던 소소.

너무 즐거워한 걸 의식한 탓일까. 얼굴을 붉히며 멈춰선 소녀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서 말했다.

“에헴, 나는 축제가 기대되는 게 아냐! 엄연한 협객으로서 남궁세가에 가게 된 게 기쁜 거지! 오해 하지 마 단아야.”

자신을 흘겨보는 소소의 눈빛에 단아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단아의 대답에 만족한 소소가 다시 단아의 목을 껴안으며 안겨들었다.

“역시, 단아는 알고 있구나! 난 네가 너무 좋아!”

“빼액!”

그런 제자를 보며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 상아.

그녀가 단아에게 물었다.

“혹시 재희에게도 갔다 오는 길이니?”

단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재희에게 가는 길에 내 편지도 함께 전해주지 않으련?”

상아는 내키지 않는지 고민하는 단아에게 조건을 걸었다.

“다음에 어르신께 드릴 사천의 명주를 구할 때 네 것도 한 병 마련해 줄게. 그래도?”

단아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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