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하여튼 변한 게 하나도 없다니까. 훌쩍이다가도, 금세 해맑아져서는.”
지금도 도제가 지켜보고 계실지도 모른다며 축제준비에 열을 올리던 적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재희는 콧노래를 부르며 남궁세가를 쏘다녔다.
그러다 고개를 돌리며 남궁세가 곳곳을 살피며 자신을 쫓아오는 거지 노인에게 말했다.
“뭐하시오?”
“내가 남궁세가에 들어오게 될 줄이야. 감회가 새로워서 말일세. 협의를 뜻하는 푸른 기와라. 이거, 팔아먹을 이야기가 산더미구만 껄껄껄.”
“하하! 10년 전에 남궁세가를 복구할 때 나도 손을 거들었소.”
“오? 정말로?”
“어…. 기와 3장 정도?”
낄낄거린 재희는 계속 세가 안을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대연무장에 도착해있었다.
연무장에는 마침, 세가로 복귀한 남궁의 무인들이 오후 수련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연무장을 가득 메운 푸른 물결을 본 거지 노인이 감탄을 흘렸다.
“다들 축제 때문에 바쁠 텐데, 수련을 빼먹지 않는구만. 역시 남궁답네.”
“그러게요. 열심이네.”
괜히 수련에 방해가 될까, 재희가 슬그머니 방향을 돌리려던 차였다.
“화룡!”
연무장의 지휘대에 서 있던 남궁신이 재희를 불러세웠다.
재희가 그를 쳐다보자, 신은 손을 저으며 재희를 지휘대 쪽으로 부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귀찮은 일을 감지한 재희가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진작에 그런 재희의 속내를 알아챈 신이 그의 도주를 차단했다.
“오늘 내게 신세를 졌지?”
“젠장. 방에 가만히 박혀있을걸.”
한숨을 내쉰 재희가 신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러자 신이 다짜고짜 남궁의 무인들을 향해 말했다.
“화룡은 도제의 제자이니, 세가의 어른이다. 오늘은 세가의 어른이신 화룡 단리재희께서 가르침을 주실 예정이다.”
“이봐. 상의 정도는 해주겠어? 그리고 세가의 어른이라니, 낯간지럽게.”
재희가 투덜거렸지만 신은 들은 척도 않으며 이어 말했다.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는 분이니, 배울 것도 많겠지.”
괜히 쑥스러워진 재희가 원망스런 눈으로 신을 쳐다보았다.
평소라면 장난스럽게 자신이 천하제일이라 너스레를 떨었겠지만, 오늘 남궁세가엔 진삼을 비롯한 무림의 쟁쟁한 고수들이 모여 있었다.
“그렇게 해버리면 나더러 어쩌란 거야?”
“창검단원 몇몇이 화룡을 꼭 만나보고 싶다고 며칠 전부터 노래를 부르더군. 화룡이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아니, 나를? 누가?”
신이 턱짓으로 연무장 한 켠을 가리켰다.
그곳에 익숙한 얼굴의 여인과 그녀의 옆에서 약관이 된 청년이 재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다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누구시더라?”
“염서현입니다 은인. 소림에서 저와 누님을 도와주셨잖아요?”
그제야 과거 소림에서 인연을 맺었던 장군가의 남매를 떠올린 재희가 활짝 웃어 보였다.
“그때 그 맹랑한 꼬맹이! 몰라보게 컸구나!”
“은인들 덕분에 이렇게 남궁의 협객이 되었습니다.”
이제 어엿한 창검단원으로서 어엿한 남궁의 일원이 된 서현이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서현을 보며 뿌듯해진 재희.
그때 재희의 어깨를 툭툭 두들긴 신이 검을 내밀었다.
이래도 거절할 거야?
그렇게 말하는 신의 눈빛에 재희가 한숨을 내쉬며 검을 받아들었다.
“알았어. 그래서, 오늘 내가 뭘 가르치면 될까?”
“도제께 남궁의 무공을 전수 받지 않았나?”
“응? 아. 신법 정도는?”
“검법은?”
재희가 허리춤에 달린 칼집을 툭툭 치며 말했다.
“난 이제 검 안 써. 남궁의 검법보다는, 남궁의 검법을 토대로 개량한 실전도법을 배웠다고나 할까.”
“뭐든 공부가 되겠지. 오늘만 할 것도 아니고.”
“친구. 혹시 축제가 끝날 때까지 날 계속 여기 세울 셈이야?”
“흔치 않을 기회잖아? 천하제일인의 특강.”
그는 도제의 제자라는 빌미로 뽕을 뽑아먹을 생각인 듯했다.
재희는 급격히 피곤해지는 한편 조금이라도 세가의 무인들을 위해 애를쓰는 신의 열의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좋아. 따지고 보면 사부님께 배운 것들은 남궁에게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니, 나도 베풀어야 옳겠지.”
검을 잡고 지휘대 위에선 재희가 외쳤다.
“남궁의 것은 아니지만, 백천검가의 고절한 검법은 어떠시오 형제들?”
재희의 뜻밖의 선언에 연무장이 술렁거렸다.
신이 진심이냐는 듯 물었다.
“남궁에 검가의 것을 베풀어도 괜찮은가?”
“잊었나본데, 내가 검가의 가주야. 누가 뭐라겠어?”
“그렇군. 고맙네 화룡.”
신은 감사의 의미를 담아 재희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어깨를 으쓱인 재희가 오랜만에 잡아보는 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감사하긴 일러 친구.”
중얼거린 그는 기대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가의 무인들을 향해 외쳤다.
“오늘 남궁에게 보여줄 검가의 검법은 검학총론이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실망한 기색이 흘렀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결국 그나마 인연이 있는 염서현이 나섰다.
“검학총론은 이미 세가에서도 연마하고 있는 검법입니다. 검가에 고절한 검법이 많기로 유명한데, 굳이 검학총론을….”
“검학총론을 잘 알아?”
“자신 있습니다.”
“그렇겠지. 검학총론은 협객들의 필수교양이니까. 하지만, 잘 아는 건 아닐걸?”
재희는 서현에게 손짓해 그를 지휘대 위로 불렀다.
그리고, 가장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세가의 무인하나를 집어 불러내었다.
그들이 교단 위로 올라오자 재희는 본격적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검학총론은 무공이 아니라 공부다. 이런 말은 많이 들어봤을 거야. 아마도, 누군가 검가의 검객이 하는 얘기를 가지고 멋대로 떠들고 다니다 퍼진 이야기겠지. 서현. 왜인 것 같나?”
서현 역시 들어본 얘기였다.
그는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 소신껏 말했다.
“단순한 방어초식의 집합체이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외우고, 몸으로 익혀 사용하면 그만인 무공이죠.”
“맞아. 하지만 잘못된 낭설이기도 해. 검가의 검객들은 말야, 검제의 무학을 몇 가지 등급으로 나눠 분류했어. 무학의 고절함이 아니라, 얼마나 익히기 까다롭냐를 기준으로.”
“검제께서 창안하신 무학은 모두다 고절하기 때문입니까?”
“그래. 사저의 회력선녀검이 대표적인 최상급이지. 그쯤 되면 사람이 익힐 수 있는 난이도가 아니야. 무공서 첫장만 펼쳐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거든. 당연히 익힌 사람이 검제 말고는 없으니, 가르쳐 줄 사람도 없어. 그렇기에 우리 사저가 검가 안에서도 인정받는 검객이 될 수 있었던 거다. 우리 사저 대단하지?”
뜬금없이 사저 자랑을 한 재희는 이어 말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꼭대기에 있는 무공이 하나 있다. 검가는 물론, 강호의 모두가 알고있지만, 아무도 완성하지 못한 무공. 그게 바로 검학총론이고, 그런 까닭에 무학이 아니라 공부라 물렀던 거다. 외워서 완성 되는 게 아니라, 아무도 완성하지 못할 만큼 너무 어려워서.”
재희는 확언했다.
“검제는 그가 창안한 최고의 무학을 검가가 아닌, 강호에 베풀었다. 하지만 우리가 무지하여, 알아보지 못하는 거야.”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서현.
그러나 함께 올라온 남궁의 무인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검가의 검객들이 검제의 가르침을 베풀기 아까워 만들어낸 낭설 아닙니까?”
씩 웃은 재희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검을 뽑아라. 보여주지.”
당황한 서현이 걱정스런 투로 물었다.
“둘 다요?”
“둘 다. 난 검학총론의 초식만 사용할 거야.”
“괜찮으시겠습니까?”
재희는 걱정하는 서현과 달리 잔뜩 화가 나 있는 검객을 쳐다보았다.
함께 덤비란 말이 모욕적으로 들린 듯했다.
하지만 상관할 재희가 아니었다.
“괜찮아. 하수들 한테는.”
스릉-.
검을 뽑아든 그가 외쳤다.
“남궁을 우습게 보신 걸 후회하게 될 겁니다!”
캉!
그의 초식을 가뿐히 막아낸 재희가 말했다.
“총론 삼장. 십 삼초식이다. 그리고, 내가 우습게 본 건 남궁이 아니라 너다.”
사람 속을 긁는 데는 특출난 그의 도발에 연이어 공격이 들어왔다.
“좌상. 수비세 육단 이초!”
캉!
검을 쳐내자마자 서현이 틈을 검객의 옆구리 쪽에서 비집고 들어와 검을 내질렀다.
매서운 공격.
함께 훈련한 창검단의 동료다게 더없이 훌륭한 합공이었다.
하지만 재희는 피하지 않고 정학이 서현의 검 끝을 내리치며 말했다.
“중하. 일단. 삼초.”
그 모습이 여유를 부리는 것같이 느껴진 검객이 결국 재희의 머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순간, 역수로 검을 바꿔 쥔 재희가 허리를 반대로 꺾으며 그의 공격을 쳐냈다.
“역수 좌상. 칠십단. 일초.”
아직 끝이 아니었다.
이제 서현도 이를 악물고 재희에게 달려들었다.
서현과 남궁의 검객. 두 사람의 검이 재희의 좌우로 동시에 치켜 들어왔다.
재희는 차분히 한걸음 물러서, 두 검이 가로지르는 지점을 향해 정확히 검을 내려쳤다.
깡!
교차하는 두 개의 검 사이를 가격한 재희의 검으로 인해, 두 개의 검이 동시에 멎었다.
두 칼날 사이에 목을 둔 재희가 말했다.
“십일단 사초식이다. 검가외인들은 삼초식에 비해 한걸음 물러서는 까닭에 효율적이지 못한 초식으로 알겠지만, 사실 이런 경우에 사용하는 초식이야.”
그의 말처럼, 검학총론을 공부한 검객들 대부분이 그 의미를 몰라 도외시하는 초식이었다.
단 하나의 공격도 피하지 않고 모두 받아쳐 낸 재희의 모습에 두 검객이 얼빠진 눈으로 재희를 응시했다.
재희가 계속하라는 듯 턱짓하며 말했다.
“검학총론 256개의 초식에 모두 용도와 의미가 있다. 다 보여줄 테니, 할 수 있는 검로를 모두 사용해 마음껏 공격해.”
어느새 두 검객은 가르침을 받는 태도로 공격을 펼쳐나갔다.
그들은 재희가 사용하는 검학총론의 수비초식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재희는 남궁적에게 남궁의 무공을 하사받은 방식으로, 다시 남궁에 검가의 무공을 알려주었다.
신을 포함한 연무장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이고 재희의 검과 자세에 집중했다.
대련을 빙자한 시범은 해가 저물 때까지 계속되었다.
재희는 그때까지 단 한 번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았다.
세가의 무인들은 비로소 깨달았다.
어째서 검가의 고수들이 검학총론을 가장 어려운 무공으로 손꼽았는지.
공부로 여겼는지를.
그리고, 그런 검학총론에 통달한 화룡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재희는 해가 떨어져 날이 너무 어두워져 지휘대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검을 거두었다.
지쳐 떨어진 서현과 창검단원은 바닥에 드러누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재희가 신에게 검을 돌려주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내일 시범을 보일 두 명은 네가 선별해줘.”
귀찮아하던 기색과는 달리, 무려 반나절 동안 검을 휘두른 재희였다.
신은 날이 다 빠져 고철이 된 검을 내려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그래. 기연이군. 고맙네 화룡.”
“됐어. 내가 사부님께 받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땀을 닦으며 고개를 돌린 재희는, 샛노란 빛을 뿜어내는 신의 동공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 물었다.
“어라, 자네 눈이?”
“눈? 탐랑이 깨어났군. 별거 아니다.”
“이젠 괜찮은 거야?”
탐랑에 사로잡혀 있던 못난 과거를 떠올린 신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하늘이 안휘와 남궁을 지키기 위해 내려준 재능이다. 네 검학총론에 반응했을 뿐이다.”
고개를 끄덕인 재희가 지휘대 뒤편의 창룡전 현판을 올려보았다.
십 년의 세월 동안, 남궁 역시 많은 것이 바뀌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