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제귀환록-224화 (224/282)

224화.

철용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분명 태룡의 실검기에 온몸이 꿰뚫리는걸 보았는데?”

서있는 것조차 힘겨울 상태여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멀쩡히 서 있는 것도 모자라 성문 위에서 뛰어내리는 것까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대체 얼마나 괴물 같은 인간인 건가.

그의 회복력은 경악을 넘어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이럴 줄 알았다면 숨을 끊어 놓을 것을.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이다.”

자신들을 맞서기로 했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천하사룡.

녹림도황 뿐만 아니라 화룡을 비롯한 다른 네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칠제의 시대 이후 새롭게 떠오른 젊은 영웅들을 죽이는 게 가슴 아프긴 했지만 무림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는 대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철용 잠시 주춤한 수하들에게 다시 진격명령을 내리려는 찰나.

우익을 맡고 있던 철옹채주 만호가 자신의 수하들을 데리고 다가왔다.

“뭐야? 반병신이 되었다더니 멀쩡하잖아? 어떻게 된 일이오. 백 대장?”

“분명 만겁제께서 근맥을 끊어 놓았었소.”

“근맥을 끊어 놓았다고?”

녹림도황을 쳐다보며 피식 웃는 만호.

오랫동안 지찬을 대두령으로 모셨던 그는 저 거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허세를 부리고 있군. 잘 됐다. 저 멍청이는 우리가 처리하겠소.”

“철옹채주. 사룡들도 함께 있소. 모두가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고수들이니 합공을 해야 하오.”

“녹림도황 저자만 없다면 사룡이든 뭐든 우리 식구 오백이면 충분하오. 그리고 나도 공을 세워야 만겁제께서 한자리 내주실 거 아니요?”

전에 보였던 두려움은 어디 갔는지, 만호의 눈은 공적에 대한 탐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가자 철옹채의 형제들! 저 녹림의 이름을 더럽히는 놈을 우리가 직접 처리하고, 명예를 되찾자!”

“우와아아!”

만호는 철용이 허락을 내리기도 전에 수하들을 이끌고 녹림도황을 향해 달려나갔다.

과연 이게 옳은 것일까.

철옹채의 녹림도들을 바라보며 수심에 잠겨있던 철용은 곧 머리를 흔들며 고민을 떨쳐냈다.

‘모두 대의를 위해서다. 쓸데없는 생각을.’

그렇게 다짐한 철용의 눈에는 만호와 똑같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때, 들판 위로 불어 닥친 돌풍이 철용의 등을 때렸다.

휘이이잉-.

분명 전장의 열기에 맺힌 땀을 식혀줄 반가운 바람일 텐데.

철용은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져 왔다.

감기라도 든 걸까?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

문득, 그의 시선이 지찬을 향했다.

철컥.

바람을 맞으며 칼자루를 쥐는 독림도황.

그 순간 오랫동안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무인으로서의 감각이 경종을 울려왔다.

“모두 엎드려!”

쉐에에엑!

바람을 가르는 투명한 칼날이 엎드린 철용의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촤아아악-!

고기가 잘려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비릿한 혈향이 잔바람을 타고 코끝을 스쳤다.

다시 몸을 일으킨 철용은 넋이 나간 얼굴로 전방을 주시한다.

철옹채의 녹림도들이 두 동강이 난 채 널브러져 있었다.

“… 삭풍.”

불가해의 삭풍이.

도제의 제자에 의해 다시 무림에 나타난 순간이었다.

* * *

“흑룡의 기운은 인간을 홀리는 게 아니오. 단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욕망을 키워 이지를 집어삼키는 것일 뿐이외다.”

지찬이 펼친 삭풍이 만들어낸 참상을 쳐다본 금와공자가 이어 말했다.

“삶의 대한 본능 또한. 인간의 욕망이라오.”

요컨대 압도적인 공포로 그들의 생존욕을 키우자는 전략.

아직도 도제 남궁적이라는 절대자가 이루어낸 무게와 경외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삭풍보다 훌륭한 수단은 없었다.

“효과가 있는 듯하군.”

남궁신이 목소리에 재희는 앞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성벽을 향해 진군하던 기세는 어디 갔는지, 녹림도들의 시산혈해를 앞에 둔 만겁제의 군세는 싸늘한 정적 속에 죽은 듯 얼어붙어 있었다.

비통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던 지찬이 말했다.

“족제비.”

“왜.”

“신세 좀 지겠다.”

재희는 칼을 늘어뜨린 채 서 있는 지찬의 등을 쳐다보았다.

삭풍을 쓰며 상처가 터졌는지 그의 온몸에 감긴 붕대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지찬이 남에게, 특히 사형제지간은 커녕 원수처럼 지내는 사제에게 신세를 진다고 말할 정도면 상태가 심각한 수준을 넘어섰다는 의미.

하지만 그는 끝내 두 다리를 땅에 디딘 채 버티고 서있었다.

“신세는 무슨. 엄살이라도 좀 부려봐라. 뒤지면 아프다고 소리 질러도 들어줄 사람도 없어.”

“시끄러. 진정한 산형제는 죽으면 죽었지 절대 꼴사납게 굴지 않는다.”

“그게 짐승 새끼지. 사람 새끼냐?”

지찬에게 쏘아붙인 재희가 사룡들에게 말했다.

“가자.”

재희가 먼저 쏘아져 가자, 곧바로 따라붙은 서풍이 물었다.

“저, 선배님 아직도 수만 명입니다. 저들이 도망가지 않으면 어떡하죠?”

“어떡하긴. 냅다 꼬라박는 거지.”

“예? 다음 작전이 있는 거 아니었어요? 그런 말씀은 없으셨잖습니까?”

새까맣게 몰려있는 만겁제의 군세를 쳐다보며 고개를 젓는 서풍.

남궁신이 그런 서풍에게 전했다.

“남궁의 일이다. 너와 소룡은 지금이라도 빠져도 좋다.”

그러자 소룡이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직도 남궁의 일 타령이야? 이젠 무림의 일이다.”

그에 서풍도 두 손을 저으며 황급히 주절거렸다.

“도망이라뇨! 아닙니다. 이렇게 선배님들과 함께하여 영광이죠!”

이제 접촉 전까지 불과 일 분도 남지 않는 거리.

하하하! 웃음을 터트린 재희가 외쳤다.

“빠질 사람 없는 거지? 좋아 친구들. 기억해. 만겁제인가 뭔가, 그 자식이 제대로 겁먹도록, 화려하게!”

두 눈동자가 금빛으로 물든 남궁신.

“명심해라. 무림인이 아닌 민초들을 해치면 안 된다.”

소룡은 양손에 열 개의 철표를 집어 들었다.

“알아서 할게. 알아서!”

내공을 두른 서풍의 소매가 격하게 펄럭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들!”

화르르륵-!

온몸에 푸른 화염을 두른 재희가 도약했다.

뛰어오른 허공에서, 그의 몸을 둘러싼 청화가 덩치를 키우더니 거대한 용의 머리로 변하였다.

“화룡출도!”

푸른 화룡이 군세의 중간에 작렬했다.

* * *

“만겁제인가 하는 녀석. 이제 나올 때 되지 않았어?”

철용은 목 아래 드리운 칼날에 눈을 질끈 감았다.

청화룡이 군세 사이를 비집고 날뛰는 순간 혈림의 대부분이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청화룡만이었다면 어떻게든 손을 써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른 사룡들의 무공 역시, 강호에 알려진 소문보다 곱절은 더 뛰어났다.

끝까지 저항하던 그와 합비무림의 후예들은 사룡의 손에 무참히 학살당하다시피 했다.

누군가에겐 그저 죄인들일 테지만, 철용에겐 10년을 세월을 함께 동고동락한 가족들이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저항을 포기하고 백기를 드는 수밖에 없었다.

수만의 군세가.

겨우 넷. 아니 다섯에 의해 무참히 패배한 것이다.

처참한 심정으로 고개를 떨구는 철용.

목에 칼을 더 바짝 들이댄 재희가 말했다.

“어이. 백 선배님. 어차피 다 끝났잖아?”

“말하지 않겠소.”

“이렇게 나오면 재미없어. 당신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든, 난 봐줄 생각이 없거든. 내가 직접 찾아보게 만들지마.”

“만겁제께서 여기 계셨다면, 절대 지금과 같은 상황은 나지 않았을 거요.”

“뭐야? 여기 없다는 거야?”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어차피 태룡의 힘으로 모은 오합지졸들.

단 네 명에게 무참히 무너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사실 합비성에 있는 무림인들이 모두 저항한다면 패배할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예상은 했다.

“화룡. 그리고 천하사룡들이여. 그대들은 과연 무림의 영웅이며, 의로운 분들이오.”

철용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눈동자.

재희는 아직도 흑룡의 기운에 사로잡혀있는 그의 눈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생존을 향한 욕망보다.

더 거대한 무언가가 그의 눈동자 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말해. 뭐가 더 남았지? 무슨 꿍꿍이를 숨겨두고 있는 거야!”

입을 연 철용이 나직이 말했다.

“천하.”

광기로 물든 철용의 눈은 합비성을 향하고 있었다.

“혼란. 그리고, 그 위에 세워질. 새로운 세상.”

설마.

급히 등을 돌린 재희는 합비성을 돌아보았다.

* * *

“여기예요 태룡!”

합비성의 북쪽 성벽.

그 구석에 있는 작은 수로 앞에서 연화가 손짓했다.

수로로 걸어온 태룡에게 연화가 말했다.

“10년 전. 저랑 백 아저씨가 성을 빠져나왔던 곳이에요. 여기라면 아무도 모르게 성안으로 잠입할 수 있어요.”

좁은 수로는 성인 남자 한 명이 간신히 기어 들어갈 만큼 비좁았다.

말없이 수로를 내려다보던 태룡이 연화에게 말했다.

“넌 이제 돌아가.”

“네?”

“나 혼자면 충분해. 그리고, 위험해.”

“싫어요! 저도 도움이 되고 싶어요.”

억지를 부리는 연화의 어깨를 감싸 안은 태룡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벌써 도움이 됐어. 연화. 네가 안전해야 내가 안심하고 계획을 실행할 수 있어.”

역시 도움이 되지 않는 걸까.

연화는 못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요 태룡. 저는 작전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꼭 성공하셔야 돼요.”

“걱정 마. 금방 다녀올게.”

그러고는 곧바로 수로의 깊은 수심 안으로 잠수하는 태룡.

연화는 물속으로 사라진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우두커니 선 그녀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주섬주섬 겉옷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 * *

성벽 아래를 관통하는 수로는 생각보다 길었다.

철용이 말하길.

과거 그는 어린 연화를 안고 이 수로를 빠져나왔다고 했다.

물에 익숙한 자신이야 쉽게 헤쳐나가고 있었지만, 이 긴 수로를 헤쳐나왔을 어린 연화와 철용을 생각하니 다시 울분이 치솟았다.

이윽고, 긴 수로를 지난 그는 합비의 성안을 관통하는 물길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남문 쪽에서 일어난 소동 때문인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촤르륵. 찰박. 찰박.

물 밖으로 나온 태룡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물길을 따라가면 커다란 길이 나온다고 했어. 그리고, 그 길 끝에는.’

철용이 알려준 대로 물길을 따라가자 합비의 대로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한참 시끄러울 대로는 싸늘할 정도로 고요했다.

굳게 닫힌 상가와 객잔의 문.

축제를 위해 달아둔 빈 연등만이 바람에 쓸쓸히 흔들렸다.

간혹, 오가는 사람들 몇이 보였지만 그들 모두 검을 찬 태룡에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태룡은 그대로 대로를 따라 합비의 중앙을 향해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태룡은 마침내 자신의 목적지로 의심되는 곳 앞에 도착했다.

뚝, 뚝.

그의 젖은 머리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길바닥의 마른 벽돌 위를 적셨다.

세가의 후문을 지키던 푸른 무복의 무인들이 남궁세가를 빤히 올려보는 태룡을 발견했다.

그들은 손님이라기엔 무척 수상한 몰골의 태룡에게 정체를 물었다.

“세가엔 지금 들어오실 수 없소. 업무나 약속이 있으시면, 밖의 상황이 모두 끝난 후에 다시 찾아오시오.”

태룡은 자신에게 말을 건 두 수문무사들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그들의 경고를 무시한 채 세가 안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수문무사들이 칼을 뽑아 드는 순간.

태룡의 온몸에서 수백 개의 검은 실검기들이 뻗어 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