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그때 남궁수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숙부님께선 이해해 주실 게다.”
적화가 뒤를 돌아보자 수민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오늘의 네 선택이. 바로 내일의 남궁이 될 것이다.”
“아버님은 교주께서 준비한 선물을 알고 계셨군요?”
“부정하지 않으마.”
“이렇게 갑자기 제게 가주직을 물려주신 것도, 그 때문이시겠죠?”
수민은 부정하지 않았다.
“내게는 엄한 분이시지만 네게는 너그러우신 분이니.”
“알겠어요.”
마음을 정한 적화가 지휘대 아래로 내려온 적화는 철용을 지나 연화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저는 이들을 용서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혹시나 하며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남궁신이 반대했다.
“이들의 죄는 제께서 정하신 일입니다. 그분의 명을 어기실 생각이십니까?”
“창검단주. 아니, 오라버니.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할아버님은 이들에게 벌을 주신 게 아니에요. 기회를 주신 거죠.”
“하지만 결국 만겁제에게 현혹되어 모시며 도제를 능멸하였습니다. 이들의 목을 베어 안휘에 남궁이 제의 뜻을 따르고 있음을 알리십시오.”
적화는 남궁신을 쳐다보았다.
소가주직을 물러난 이후로, 남궁신이 이 정도로 확고한 의견을 낸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남궁신이 분노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나, 적화는 대답 대신 연화를 향해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홍연화입니다.”
이어 연화가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아이들만이라도 살려주세요. 맹세컨대 아이들에게 무공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부디 남궁의 가주께서 자비를 베풀어 저희의 목숨으로, 긴 악연의 고리를 끝맺어 주세요.”
십 년 전, 홍검파의 멸문과 함께 사라졌던 홍가의 여식이 9살이라 했던가.
이제 열아홉의 앳된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어 그녀의 두 뺨을 양손으로 쥐었다.
뺨에 닿는 손길에 흠칫 놀란 연화는 이윽고 자신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는 따스한 손길을 느낀다.
안심하라는 듯, 연화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는 적화.
일어선 그녀가 이곳에 모인 무림인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여러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남궁은 분명 오늘의 일을 감당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 제게 결정을 맡기셨음에도, 저는 먼저 여러분께 허락을 구하고자 합니다. 이들을 용서해 주세요.”
가장 먼저 포로들을 잡아 온 신교의 단리소희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원한의 고리가 이어진 셈. 비록 본교의 오랜 율법이긴 하나, 원한을 끊어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싹을 도려내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무릎을 꿇렸지만. 가주께서는 남궁에 앙심을 품은 이들이 미래에 어떤 짓을 저지를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교주님. 하지만 그 또한 남궁이 감내하겠습니다.”
감내하겠다니 달리 할 말이 없어진 소희는 알아서 하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보다 못한 능소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들이 저지른 일을 보십시오. 어찌 남궁의 일이겠소? 남궁의 의기는 알겠으나, 정의는 엄격한 단죄 아래 더 견고해지는 법이오. 협객의 마음은 잠시 뒤로 두고, 무림일가의 가주로서 다시 고려해주시길.”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능 문주님. 하지만 소녀는 이들의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남궁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적화는 무림맹주 하진삼을 바라본다.
헌데, 그는 왠지 굉장히 초조한 표정으로 가면을 쓴 재희를 주시하고 있었다.
뒤늦게 적화의 눈길을 알아챈 그가 말했다.
“맹은 언제나 남궁의 뜻을 지지하며, 가주의 결정을 존중하겠소.”
재희와 함께 만겁제를 물리치는데 일조한 그였다.
만약 진삼이 반대했다면 적화도 어쩔 도리가 없어졌을 터.
깊이 안도한 적화는 마지막으로 철용의 목에 칼날을 대고 있는 남궁신을 쳐다본다.
“안휘를 위하는 창검단주의 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이들 또한 남궁이 품어야 할 안휘의 백성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만겁제를 따른 이유는 약자에겐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에요.”
과거를 회상한 그녀는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할아버님께서 오시기 전의, 과거의 남궁처럼요. 그분이 남궁을 용서하셨던 것처럼, 저도 이들을 용서하고 싶어요.”
그 말이 단호했던 남궁신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칼을 거둔 그는 적화를 향해 포권을 올렸다.
“가주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밧줄을 풀어라.
그의 나직한 명령에 창검단이 나서 죄인들을 포박한 밧줄을 끊어내었다.
그와 동시에 관망하던 무림인들이 하나같이 적화의 자비에 환호했다.
“과연 남궁의 그릇은 다르구만!”
“괜히 푸른 기와의 남궁이 협객의 고향이라 불리겠는가?”
무림인이 아닌 합비무림의 이들도 적화의 결정을 자랑스러워하며 남궁의 이름을 불렀다.
사람들의 환호로 시끄러워진 대연무장.
자유가 되었지만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던 철용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지금의 이 풍경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남궁에 대모님께서 돌아오셨구나.”
중얼거리는 그는 자신을 향하는 거대한 기운을 느끼고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가면의 사내.
화룡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왜 나를?
화룡은 우리의 사면을 용납하지 못하는 건가?
일순간, 초조한 마음으로 화룡을 쳐다보던 그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가면 안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물드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제왕안?’
가면의 사내.
도제는 철용을 향해 고개를 몇 번 끄덕여주더니, 그대로 인파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철용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 감사합니다.”
오랜 시간 끝에.
“감사합니다….”
죄인들은 용서받았다.
* * *
“너 인마.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냐?”
“뭐가?”
“그 뭐시냐, 제사인가 행진이가, 너 스승님 대신 그거 참석하러왔잖아?”
“아~ 그거. 스승님께서 직접 하신대서.”
“아. 그러면 다행이네. 어. 뭐라고? 얌마.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스승님이 합비에 계셔!?”
깜짝 놀라 고함을 질러대는 소리에 귀를 틀어막은 재희가 투덜거렸다.
“아우 새끼. 환자가 돼도 목청은 그대로네. 목은 왜 안 다쳐가지고.”
그러다 온몸에 감긴 붕대를 풀려는 지찬을 발견하고 황급히 그를 제지한다.
“놔라. 이대로 누워있다간 스승님께 살해당할 거야!”
“알고는 있구만?”
그의 스승이 매년 단아가 물고오는 편지를 받으며 담소를 주고받았던 제자들은 적이 조카손녀를 얼마나 아끼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찬은 감히 적화에게 청혼을 한 셈.
아무것도 모를 때야 별 생각이 없었지만 기련산에서 삭풍을 수련하며 남궁적의 성격을 알아챈 그는 살기 위해 기어이 박살 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으허헉! 아프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내 반드시 살아서 장가가고 만다!”
그런 지찬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재희가 입을 열었다.
“혼인식을 하고 기련산에 들리라고 말씀하시더라.”
“엉?”
“허락하셨다고 멍청아. 그러니까 그냥 누워있어.”
“정말?”
“힘줄이고 근육이고 다 박살 난 상태라며? 병신이 돼서 장가갈 거야?”
“와하하! 장가간다! 나 마지찬. 한번 정한 목표는 반드시 이루고야 마는 사내! 드디어, 남궁소저한테 장가간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풀었던 붕대를 다시 감기 시작하는 지찬.
심드렁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서 그를 쳐다보고 있던 재희는 짧은 한숨을 뱉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런 재희에게 지찬이 붕대를 꽉 동여매며 물었다.
“너는?”
“뭐?”
“한 여협. 딱 보니 아직도 제자리로군.”
“뒤지게 패버리기 전에 입 다 물어라.”
“얌마. 찬물도 순서가 있지. 사형이 먼저 장가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 뭐 그렇게 아니꼬운 표정이야. 싸가지 없는 새끼. 그래. 기분 좋으니까 오늘은 특별히 봐준다. 너무 섭섭해 하지 마라.”
그 말이 오히려 재희의 심통을 돋구었다.
“사형이 먼저가? 찬물도 순서가 있어?”
재희의 머리 속으로 지찬이 혼인을 한 후에 이제 사제인 네 차례라고 낄낄거릴 모습이 떠올랐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니. 내가 먼저다.”
벌떡 일어난 그는 그대로 지찬의 침소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래도 사형제라고, 모두가 바쁜 이때에 유일한 말동무가 되어주던 재희였다.
하지만 지찬은 섭섭해 하기는 커녕, 후련한 표정으로 침상에 몸을 뉘였다.
“한 번만 봐주는 거다.”
그렇게 지찬이 침상에 누워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였다.
잠시 후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뉘쇼? 볼일 있으면 알아서 들어오쇼.”
그의 침실로 들어오는 두 명의 사내.
다름아닌 천하사룡 중의 두 명. 당소룡과 서풍이었다.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이 두 명이 왜?
의아해하던 지찬의 눈이 뒤따라 들어오는 왜소한 사내에게 꽂혔다.
“초계림 너 이새끼!”
지찬의 고함소리에 화들짝 놀란 초계림이 즉시 서풍의 뒤로 숨었다.
“아이고 도사님!”
“시주님. 이래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시주님이 직접 저희에게 부탁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혹시 사단이 일어나려 하면 저희가 막아줄 테니 조금 더 용기를 내십시오.”
주저하던 초계림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옮겨 지찬의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죽여주십시오 대두령! 제가 그때 뭐에 홀렸는지, 저는 정말 대두령을 찌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으아아!”
빠드득! 빠득! 쿵!
굳어있던 몸을 일으켜, 침상 아래로 발을 찍은 지찬이 쌍심지를 켜고 초계림을 노려보았다.
지찬의 무시무시한 기세를 읽은 소룡이 서풍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거, 큰일 나겠는데?”
서풍도 아차 싶었는지 당황한 눈치로 속삭였다.
“저는 부상이 심각하다길래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이제 어떡하죠?”
두 사람은 일어나기도 힘들다는데 설마 죽이기야 할까 라고 생각했던 안일함을 깨달았다.
한편 쌍심지를 켜고 침상 아래에 머리를 받은 초계림을 내려다보던 지찬이 말했다.
“감히 날 배신하고, 제발로 날 찾아와? 간덩이가 아주 부었구만. 그래. 안 그래도 몸이 낫는 대로 널 찾아갈 생각이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대두령!”
“하. 영리한 놈인 건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선수를 쳐서 목숨이라도 살아보시겠다?”
“아닙니다!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고개를 든 초계림은 정말 후회가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놈이 잠시 훼까닥해서 대두령님을 배신하였지만은, 저는 정말 대두령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사실 계림은 그와 함께 지찬을 배신하였던 호왕채의 형제들을 대표하여 온 것이었다.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호왕채가 모실 두령은, 오직 대두령 한 분이십니다!”
“그놈들이 아직도 나를 두령으로 생각한다고?”
“물론입니다! 대두령 기억하십니까? 과거시험에 낙방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던 저를, 그러다 이리떼에게 물려 죽을 뻔한 저를 대두령께서 살려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랬던가? 아. 그게 너였냐?”
“저는 그때부터 나랏님 대신 평생 대두령을 모시기로 맹세한 몸입니다. 호왕채의 형제들 역시, 호왕채가 쥐굴 만한 산채였을 때부터 함께한 형제들이잖습니까?”
어이구, 거 서생나으리 말솜씨 한번 좋네.
이때다 싶은 서풍이 나섰다.
“아마도 흑룡의 기운 때문일 겁니다 선배님. 기운이 약한 자일수록 쉽게 홀려 드니, 서생인 초 부두령은 저항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딴 게 뭔 상관이냐!”
버럭 소리친 지찬이 초계림을 향해 말했다.
“형제는 한 번 정도 봐준다. 그러니까. 너도 이번 한 번만 봐준다.”
초계림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났다.
“감사합니다 대두령! 정말, 정말 평생토록 모시겠습니다요!”
“부담스럽게 굴지 말고 나가라. 그리고 다른 산채에도 연락 돌려놔. 내가 호왕채에 복귀하는 대로, 만겁제에게 붙어먹은 놈들 다 죽여 버리로 간다고.”
“당연합니다! 녹림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다시 한번 각인 시켜줘야지요! 헌데, 언제쯤…?”
“한 3년?”
“네?”
“뭐? 나도 신혼은 보내야할 거 아냐 인마.”
“아. 아……. 축, 축하드립니다 대두령! 네! 3년 후에 나서도록 준비 하겠습니다요!”
소룡과 서풍은 뭔가 좀 기분이 나빠졌지만, 일단 잘 해결된 것 같으니 다행이라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