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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제귀환록-241화 (241/282)

241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행동력.

검후 한상아라는 여인은 이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협객이었다.

그리고 바로 상아의 그 행동력이, 최근 며칠간 재희를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지난 술자리가 끝난 후 상아는 곧바로 재희의 처소로 짐을 들고 오더니 그대로 눌러앉아 버렸다.

그녀는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겠다는 듯 반드시 재희를 자신의 시야 안에 두었다.

문제는, 혹시 자신이 잠이 들었을 때 재희가 포정사로 쳐들어갈 것을 염두에 둔 그녀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재희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눈앞에 사저가 있는 생활이 꿈만 같았지만, 재희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사저, 진짜 가지 않는다니까요? 이제 그만하셔도 됩니다.”

아직 내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인 상아.

재희는 나날이 초췌해져 가는 그녀가 걱정되었다.

그러나 상아는 요지부동이었다.

“가셔도 돼요. 저는 같이 가려고 기다리는 거랍니다.”

한시도 몸에서 검을 떼어놓지 않고 있는 상아.

만약 다른 이들이 본다면 허세를 부린다고 오해할 수도 있겠으나, 그녀는 분명 진심이었다.

재희는 그런 상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저 약속했잖아요. 전 사저에게 거짓말하지 않아요.”

“제게 황태자를 죽일 계획을 숨겼잖아요.”

“그건….”

“거짓말이랑 다르지 않아요.”

상아는 이번 사건으로 재희를 완전히 불신하게 된듯했다.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한 채 한숨을 내쉬는 재희.

재희의 처소 한쪽에 앉아있던 남궁신이 말했다.

“인과응보라는 거다 화룡.”

남궁신의 맞은 편에 앉아 차를 홀짝이던 서풍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우릴 방심시키려고 술이나 마시자며 태연한 척하더니, 빈도는 실망이 큽니다 선배님.”

상아만 해도 머리가 아팠던 재희가 버럭 소리쳤다.

“너희는 그냥 나가주면 안 되겠냐? 응?”

“안됩니다. 맹주님께 두 분이 돌발행동을 하지 않도록 잘 감시하라는 부탁을 받았거든요.”

“그럴 거면 나가서 감시해도 되잖아?”

“두 사람 모두 예측할 수 없는 종류의 분들이니 반드시 꼭 붙어서 감시하라는 당부도 하셨습니다.”

이 눈치 없는 후배는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한 재희는 남궁신에게 따졌다.

“이봐. 창검단주님. 이러고 있기엔 넌 바쁜 거 아냐?”

“걱정마라. 합비의 치안은 신교가 손을 보태주기로 했다. 교주께서 친히 널 잘 감시하는데 전념하라더군.”

“온 무림이 날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이구만.”

“무림맹이든 신교든, 그만큼 널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거다. 남궁세가도 마찬가지고.”

“고마워 죽겠네 아주.”

이럴 줄 알았으면 당장 해치워 버릴걸.

재희는 괜히 마지막이랍시고 여유를 즐기려던 지난날을 후회했다.

방안은 다시 어색한 침묵에 잠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풍이 숨이 막힐 듯한 무거운 공기를 참지 못하고 슬그머니 재희에게 다가갔다.

재희가 앉아있는 침상의 근처에 서성거리던 그가 재희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저기, 선배님.”

“왜?”

“한 선배님과 쭉 같이 계신겁니까?”

“그런데.”

“밤에 도요?”

“그렇지.”

잠시 문 앞에 등을 기대고 있는 상아의 눈치를 살핀 서풍이 다시 속삭였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뚱한 얼굴을 하고 있던 재희가 서풍을 얼굴을 쳐다보았다.

평소의 재희답지 않게, 몹시 당황한 표정이었다.

무언가 눈치챈 서풍이 상아를 쳐다보았다.

살짝 고개를 돌린 그녀의 귓불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 아하하. 아닙니다. 제가 괜히 실례가 되는 질문을. 하하하하.”

이러다 재희와 상아가 방안을 뛰쳐나갈 것 같았던 남궁신이 화제를 돌렸다.

“계속 이렇게 시간만 낭비하고 있을 셈이냐?”

이어서 남궁신은 지금 밖에서 진행되고 있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남궁과 신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싸우기로 했다. 무림맹도 찬성은 했지만, 가장 중요한 백도검문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한 모양이더군. 무림의 운명보다, 칠제의 명을 중요시하는 이들이 있어.”

백도검문의 의견을 한데 모으지 못한다면 무림맹은 반쪽이나 다름없었다.

백도검문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재희는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쪽은?”

“어제 청성괴협의 전서구가 도착했다. 야협들을 모아 합비로 오겠다고.”

“그 선배님은 아직 정정하신가 보구만.”

“여전히 협객들의 대형이 되시는 분이지.”

“화룡. 조광 문주님께서 검문의 의견을 모으기 위해 악양으로 가셨다. 백도검문 쪽은 어떻게 되든 조만간 결론이 날 거다.”

“….”

“너만 남았어. 그날 네가 말했지. 네가 백아를 쥐든, 쥐지 않든 결국 맹과 황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거야. 온 무림이 힘을 모을 거다. 그리고, 그들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은 이 무림에 한 사람밖에 없어.”

이제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맹주님께 백아를 받아라.”

“이봐 남궁신. 쌍룡성주님께서 하신 말씀 기억나? 무림이 이기더라도, 일 할만이 남을 거라 했지.”

“단지 그분의 예상일 뿐이다.”

“그래. 이 할이라고 치자. 그러면. 황태자로부터 무림을 지킨다 하더라도 뭐가 남지?”

그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일어났던 커다란 전쟁.

그리고, 장가계에서의 혈투.

두 전쟁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었다.

개중에는 무림의 기둥이 될거라 의심치 않았던 협객들, 그리고, 재희의 혈육도 있었다.

“죽어버리면 무슨 소용이야.”

“하지만 피할 수 없다.”

“그러게 내가 몰래 황태자의 목을 딸 때까지 모른 척하고 있으면 됐잖아?”

“네 희생이 당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림과 황실은 영원히 증오를 품고 살아가겠지. 마치 백도검문과 신교처럼.”

네가 원하는 게 그런 강호냐?

남궁신이 눈빛으로 물어왔다.

남궁신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재희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은 누구보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한 그였다.

다만 어떻게 싸울 것인가.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들과 달리, 싸우지 않을 방법을 찾고 있었다.

자신의 방법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결국 재희는 생각해두었던 차선책을 꺼냈다.

“내게 방법이 있어.”

“황태자를 포로로 잡고 협상을 할생각이라면….”

“먹힐 리가 없지. 내가 보기엔, 그는 이미 내 생각을 알고 있을 거야.”

“무슨 말이지?”

“그가 미치지 않고서야, 금위군의 일부만 이끌고 합비에 머물고 있겠어? 무림의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는 거라고.”

“그는 황좌를 물려받을 황태자다.”

“고귀하신 황태자꼐서 나 같은 놈이 아니란 법도 없지.”

비록 직접 얼굴을 대면한 적은 없으나, 청해왕야에게 건너들은 이야기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 대단한 북적마저도 그러다 절멸하지 않았던가?

무림을 손에 넣겠다는 건 아무리 보아도 황태자가 야욕을 부린다기엔 터무니없는 야심이었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무림을 증오하고 있지. 황태자는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다.”

재희도 과거에 그런 경험이 있었다.

단지 과거의 그와 달리 황태자에겐 그 증오를 해결할만한 힘과 권력이 있었다.

“어쩌면, 내가 황태자의 목을 베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 황태자 본인일지도 몰라.”

자신의 목숨으로 황실과 무림 사이에 증오를 심어, 언젠가 무림이 황실 아래 무릎을 꿇을 미래를 그렸을지도 모른다.

“내게도 그렇듯, 그에게도 신하와 황군을 희생시키지 않을 방법이라 생각한 거지.”

가만히 듣고 있던 상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걸 알면서도 실행에 옮기려 했던 건가요?”

“사저. 다들 날 위대하신 칠제의 대리인쯤으로 보고 있지만, 난 그렇게 대단한 놈이 아닙니다. 저는 확신 했거든요. 제가 없어도, 사저와, 그리고 내 벗들이 있는 무림은 황태자의 예상대로 쉽게 흘러가지 않을 거라 고요.”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재희가 말했다.

“하지만 글렀네요. 난 언제 죽어도 후회가 없지만, 사저는 절대 안 되거든요.”

“당신은 정말….”

재희는 이제야 상아를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상아가 남겨지는 것에 얼마나 큰 아픔을 지니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재희는 눈물을 글썽이는 상아를 꼭 안아주었다.

“죄송합니다.”

“또 한 번 허튼 생각을 하면 죽여버리겠어요.”

“하하.”

애틋한 두 연인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남궁신이 물었다.

“그래서. 방법이 뭐지?”

상아를 품에서 떼어낸 재희가 대답했다.

“문제는 사자군인 거잖아? 사자군이 없다면, 황태자도 야망을 접을 거야. 최소한 훗날로 미루겠지.”

황태자 역시 관과 무림과 충돌하여 모두가 파멸하길 원치는 않을 터였다.

“내가 사자성으로 가 창제를 뵙겠어. 그리고, 그분을 설득해 볼게.”

“이미 온 무림이 창제께 황금사자패를 거두어달라는 서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답신조차 받지 못했어.”

황태자의 목을 치는 것보다 훨씬 더 터무니없는 계획이었다.

때문에 차선이었다.

그러나, 역시 남은 방법 중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도였다.

재희는 이미 지난 며칠간 상아와 시간을 보내며 각오를 마친 후였다.

“난 조금 다를지도 모르잖아?”

팔 위에 올린 손가락을 까딱이던 남궁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주님과 맹주님께 전하지.”

“부탁할게.”

회의가 한창일 가주전으로 가는 남궁신.

그가 문을 열려고 할 때쯤,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화룡을 뵈러 왔소.”

드르륵-.

문이 열리자, 의외의 인물을 발견한 남궁신이 놀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백 선배님?”

홍검파의 백철용.

처소 안에 있는 이들을 쓸어본 그가 말했다.

“어떤 분이 화룡과 천하사룡을 뵙고 싶다 하시어, 모시러 왔소.”

“누가…?”

“말할 수 없소. 하지만, 반드시 모시고 가야 하오.”

철용은 재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암시했다.

* * *

안휘에 위치한 이름 모를 야산.

그곳엔 자그마한 사찰이 있었다.

한때는 완전히 무너져 폐허가 되었지만, 한 사내가 수년간 사찰을 다시 복구하여 제법 번듯한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비록, 사찰의 역사도 기억하는 이가 없었지만.

사람들은 홀로 사찰을 다시 복구한 사내의 불심을 존경하여 발걸음하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부처를 찾는 이들로 번잡해야 할 사찰.

그러나 어째서인지, 사찰의 주지스님은은 지난 한 달간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재희와 사룡들을 안내한 철용이 사찰의 문을 두드리며 사찰의 고요한 적막을 깨트렸다.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스님.”

잠시 후 사찰의 문이 열리며 민머리의 중이 그들을 맞이하였다.

“사찰을 지키는 중인 여몽이라 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무림이 영웅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민머리가 되었으나, 재희는 바로 그를 알아보았다.

“당신은 그때 만났던….”

“화룡 대협께서 생각하시는 이가 맞습니다.”

도제에게 홍검파의 패악질을 고백하고, 사찰을 수리하란 벌을 받았던 사내.

과거 폐사찰이었던 이곳에서 수적들에게 잡힌 민초들을 데려가려 했던 홍검파의 제자였다.

그는 사찰을 고치며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 이어 세속을 벗고 불가에 귀의한 것이었다.

과거의 일을 떠올린 여몽은 감사와 반성의 의미를 담아 재희를 향해 반절을 올렸다.

“시주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소승은 아직도 미몽에서 헤매고 있었을 겁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된 것도, 부처의 은덕이지요.”

여몽 스님과 재희가 아는 사이였던걸 모르고 있던 철용이 물었다.

“화룡과 아는 사이셨소?”

“뭐, 예전에 조금.”

“우리 부랑촌이 힘들 때 도움을 주시곤 하셨던 분이오. 지금도, 스님께 아가씨와 신세를 지고 있소이다.”

철용의 말에 남궁신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주님이 그대들을 용서하셨소. 합비에 머물 자리도 마련해 줬을 터인데.”

“우리가 무슨 염치로 합비에 남을 수 있겠소?”

그들의 대화를 들은 재희는 사뭇 놀란 얼굴로 여몽을 쳐다보았다.

철용과 홍연화는 홍검파의 말단 제자였던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이제 중이 되었으니, 속세의 일일 뿐이겠지.’

여몽의 비밀을 지켜주기로 한 재희가 물었다.

“우리를 만나고 싶다던 분이 스님이시오?”

모른 척 넘어가 주는 재희에게 작게 고개를 숙인 여몽이 대답했다.

“제께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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