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제귀환록-249화 (249/282)

249화.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것일까.

갑자기 소년이 사라지자 당황해하던 일행들은 곧 소년의 정체를 짐작해내었다.

“쌍룡성의 제자로군.”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절기들이 있다지만, 바로 앞에서 천하사룡의 눈을 속이고 모습을 감출 수 있는 무공은 쌍룡성의 암룡답영보가 유일했다.

쌍룡성이 일행들에게 눈을 붙여 두었을 거라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일.

하지만 재희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혀를 내둘렀다.

쌍룡성의 무공을 난생처음 겪은 서풍은 소름이 끼쳤는지 양팔을 접어 자신의 팔뚝을 쓸며 말했다.

“어떡하죠?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다고 들었는데….”

쌍룡성이 자신들의 행적을 황실에 일러바치기라도 한다면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터.

그러나 재희는 굳이 쌍룡성을 경계하여 괜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원수를 처치하는 것 말고는 일절 관심 없는 치들이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쌍룡성이 무림을 적대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

돌이켜보면 지난날 그의 스승인 남궁적이 쌍룡성의 무림에 대한 증오를 가라앉혀준 것이야말로 무림에 남긴 가장 큰 은혜일지도 몰랐다.

재희는 소년이 건네주었던 종이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호의인지 함정인지는, 찾아가서 확인해보면 될 일이고.”

종이에 적힌 객잔으로 갈 생각인 듯한 재희의 말에 소룡이 미심쩍은 투로 물었다.

“그들을 믿나?”

“글쎄? 반반?”

어깨를 으쓱이는 그의 행동에 일행들의 의심은 더 깊어져 갔다.

그때 거지 노인이

“가보자 꾸나. 굳이 거절해서 밉보일 필요는 없잖으냐. 헌데 이놈은 모시러 왔다면서 홀라당 사라져버리면 어쩌누?”

투덜거린 거지 노인이 재희의 손에서 훽 종이를 뺏어 들었다.

“멀지 않은 곳이구나. 내 복건성의 길을 아니 따라오거라.

* * *

객잔에 적힌 객잔은 의외로 복건성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문제라면, 복건성의 중심에는 세 개의 산이 있었고, 그 산자락 깊숙이 자리 잡은 객잔은 그야말로 변방의 야행길을 걷다 마주할 만큼 낡고 허름한 외관을 하고 있었다.

발로 툭 차면 무너질 듯한 대들보. 듬성듬성 빠진 기와와 그 아래 그물처럼 처진 거미줄.

문 앞에 걸린 평운객잔이라는 간판과 영업중이라는 팻말이 아니었다면 일행들도 흉가라 착각해 지나쳤을 정도였다.

“저기, 꼭 들어가야 할까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객잔을 힐끔거리는 서풍.

“귀신이라도 나올까 봐? 이놈아. 너 도사는 맞냐?”

“어르신. 저는 퇴마술 같은 거 못 배웠다니까요.”

그런 서풍을 한심하게 쳐다본 재희가 말했다.

“당연히 안 가르쳐 줬겠지. 귀신같은 건 없으니까.”

“귀신이 왜 없습니까? 음양의 이치에 따르면, 귀신은 존재합니다. 이런 곳에요!”

“퍽이나 있겠다.”

비아냥거린 재희는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잡고 밀었다.

끼이익-.

낡은 경첩이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객잔의 문이 열렸다.

싸늘하리만큼 조용한 객잔의 내부.

“이딴 객잔에 손님이 있을 리 없지.”

가장 먼저 성큼성큼 객잔 안으로 들어서던 재희가 큰소리로 외쳤다.

“계십니까! 주인장! 손님 왔습니다 손님!”

“2층으로 올라가시면 돼요.”

그때 들려오는 나직한 음성.

아무런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재희가 깜짝 놀라며 물러섰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홱홱 돌리던 그는 서풍의 바로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소년을 발견한다.

성문 앞에서 보았던 그 소년이었다.

“언제….”

“쭉 같이 있었어요.”

소년은 알고 있잖냐는 듯 서풍의 그림자를 가리켜보았다.

뒤늦게 소년의 존재를 알아차린 서풍이 비명을 내질렀다.

“히익! 귀, 귀신!”

“귀신 아니에요. 암룡답영보 인걸요.”

누가 쌍룡성의 제자 아니랄까 봐.

한숨을 푹 내쉰 재희는 소년에게 따지고 들었다.

“역시 쌍룡성이었군. 여긴 쌍룡성의 복건지부인가?”

“아니요. 지부는 따로 있어요. 제가 여러분을 직접 모시지 못한 것도, 본문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음?

재희는 의아한 눈으로 소년을 쳐다보았다.

“쌍룡성의 내부에서도 의견이 달리하는 자들이 있는 거냐?”

“예.”

“누구지?”

소년은 더 이상 설명해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2층으로 가세요. 객실을 마련해뒀습니다.”

2층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가.

소년의 의도를 짐작한 일행들은 조용히 계단을 올랐다.

문이 열려있는 2층의 객실들.

그중에 단 하나의 객실만이 문이 닫혀 있었다.

닫힌 방 안쪽에 누군가 있다.

기척을 읽어낸 재희는 일행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방문을 열었다.

엉망진창인 외관과 달리 잘 정돈된 객실.

사룡을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늙은 매 한 마리가 활짝 열린 창가에 걸터앉아 고개를 꾸벅이며 졸고 있었다.

긴장해 있다가 기운이 턱 빠진 일행들은 매의 다리에 묶여있는 서찰을 발견한다.

매를 향해 걸어간 재희가 서찰을 풀어내며 말했다.

“뉘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정체를 숨기려는 걸 영 신뢰가 가질 않는데?”

어쩌면 이 방안에 모습을 감추고 있을 이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서찰을 펼쳐본 재희는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이건… 이봐 친구들. 이것 좀 봐봐.”

서찰에는 중원의 지도와 함께 현재 황군과 오호도독부의 군이 움직임이 상세히 적혀있었다.

더 해서 그들이 거쳐 가야 할 마을과 성. 그리고 이곳과 같은 안가의 주소지가 첨부되어 있다.

무언가 작당을 하기에는 너무나 담백한 정보만 적힌 서찰.

재희와 사룡들은 오호도독부가 이끄는 대군의 경로를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도와 그곳에 그려진 도독부의 움직임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소룡이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적혀 있는 게 사실이라면, 오호도독부의 대군이 어째서 안휘가 아니라 하남으로 모이고 있는 거지?”

서찰에는 정보만 적혀있었기에 사룡들이 직접 추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고심해도 황태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남궁신이 가장 직관적인 답을 내놓았다.

“남하 중인 사자군과 합세하기 위한 게 아닐까?”

재희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지금 무림인들이 모여들고 있는 합비나, 무림맹이 있는 악양. 그리고 천산이 있을 광주도 모두 하남 아래에 있어. 대군을 한 번 더 움직인다고? 군량을 징수하지도 않았는데, 황태자가 굳이 그만한 낭비를 할 이유가 없어.”

침음을 흘린 일행들은 잠시 입을 다물고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문득, 서풍이 하남의 중심을 손으로 찍었다.

“혹시, 황태자의 첫 번째 목적지는 안휘나 악양이 아니라 이곳이 아닐까요?”

서풍이 가리킨 곳은 장안.

바로 소림이 있는 숭산이 있는 곳이었다.

반신반의한 소룡이 재희에게 물었다.

“화룡. 소림이 맹에 합류하기로 했던가?”

“아니. 그런 소리는 듣지 못했어. 황실 굳이 소림을 건드려 불가의 분노를 사려 할까?”

10여 년 전 남궁적이 소림을 방문한 이후로 줄곧 묻을 걸어 잠그고 칩거에 들어간 소림이었다.

머쓱해진 서풍이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장안을 노릴 거라면 이곳밖에 없다 싶어서 요”

그때. 거지 노인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유야 충분하지.”

일행들이 거지 노인을 돌아보았다.

늙은 매를 보며 많은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사자성을 제외한다면, 아직도 칠제의 깃발이 걸린 유일한 곳이니. 그들의 목적이 소림이 아니라 그 깃발에 있다면 충분한 가치가 있다.”

과거에 북적이 무림을 정벌하기에 앞서 무림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았던 숭산을 불태웠던 것처럼, 황태자 역시 무림에 남은 마지막 칠제의 깃발을 꺾으려는 것이다.

자명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남궁신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합비에 이 소식을 전해야 한다. 숭산에 계신 권제와 소림의 제자들이 위험해.”

그러나 재희의 의견을 달랐다.

“연락은 합비가 아니라 숭산에 보내야 해.”

“당연하지. 하지만 소림은 숭산을 버리지 않을 거네. 무림의 도움이 절실할 거다.”

“아니. 네 생각보다 간단히 해결될 문제라서야.”

“무슨 뜻이지?”

“소림이 칠웅기를 내리면 돼.”

지난 기억을 떠올린 재희가 씁쓸히 중얼거렸다.

“소림엔, 제께서 계시지 않거든. 스승님께서 직접 확인하셨어.”

뜻밖의 진실에 사룡들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재희가 이어서 말했다.

“이렇게 깃발을 내리길 원치 않으셨을 테지만, 어쩔 수 없지. 소림도 생각이 있다면 자존심을 위해 피를 흘리려 하지는 않을 거야.”

심각한 이야기 중이었으나, 서풍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선배님, 권제께서는 열반에 드신 겁니까?”

“나도 몰라. 무림 어딘가에 계실 수도, 이미 열반에 드셨을 수도 있지. 내가 아는 건 권제께서 최소한 10년 전부터 숭산에는 계시지 않는다는 것뿐이야.”

“헌데 소림은 왜 아직도 칠웅기를 걸고 있습니까?”

“왜겠어?”

과거와 달리, 소림은 더 이상 무림의 정신적 지주가 아니었다.

이제 그들이 무림에 내세울 수 있는 건, 오직 태승이라 불리는 소림의 영웅이 전부였다.

“태산북두의 영광은 찾을 수 없으니, 다른 영광이라도 붙잡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그건 너무 어리석은 짓이잖아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소림사에 찾아가 부처의 목을 벤 스승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지.”

“그래서 베셨던 거군요.”

도제가 소림사에서 불상의 목을 벤 이야기는 이미 무림에 한번 화제가 되었던 이야기였다.

그 비사를 알게 된 사룡들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재희는 차라리 다행이라는 듯이 서찰을 접었다.

“소림사의 어리석음이, 의도치 않게 황태자를 헛걸음하게 만들었구만. 이걸로 시간을 더 벌수 있겠어.”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요?”

“좋게 생각하자고. 이번 기회에 소림도 더 이상 칠웅기를 걸고 있지 못하게 될 테니, 일석이조 아니겠어?”

“그, 그렇네요! 결과적으로 좋은 신호네요!”

애써 긍정적으로 여기려는 재희와 서풍.

하지만 소룡은 일행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부분을 지적했다.

“이보게 화룡. 황태자가 칠웅기를 노렸단 말은, 그가 칠제의 권위조차 고려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닌가?”

소룡의 말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남궁신이 일행들이 애써 부정하고 있던 의문을 입에 담았다.

“만약 소림에 권제께서 계셨다면, 권제를 죽이려 했을까?”

“서, 설마요! 하하하. 태승께서는 무림만이 아니라 천하의 스승으로 존경받는 분이시잖아요?”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황태자가 보인 행보라면, 어느 정도 짐작이 되었다.

“최소한 황태자나리께서 태승을 스승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군. 그건 황실의 문제가 아니겠어? 우린 우리가 해야할 일 만 기억하자고. 설마 사자군도 황실처럼 엉망이겠어?”

청해왕부를 오가며 사자군을 마주한 경험이 있던 소룡이 동의했다.

“창제에 대한 그들의 충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

“내가 만나본 사자군도 그래. 자자, 뉘신지는 모르겠지만, 쌍룡성의 조력자께서 묶을 곳도 마련해뒀으니. 오늘 밤은 푹 쉬고 가자.”

예상치 못한 조력자 덕분에 바쁘게 정보를 수집할 여력도 줄었겠다, 일행들은 다시 내일 새벽부터 복건을 떠나기로 기약하고 일찍 잠에 들었다.

달이 깊은 밤.

일행들 몰래 눈을 뜬 자명은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늙은 매에게 걸어갔다.

그는 이 늙은 매의 주인을 잘 알고 있었다.

“빚을 졌구나.”

지금껏 죽은 듯 잠들어 있던 매가 눈을 떠 자명을 올려다보았다.

늙은 매가 전한 서신은, 사룡이 아니라 그를 향한 전언이었다.

매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자명은 바지춤에서 염주를 꺼내 자신의 머리카락을 뽑아 묶었다,

그리고는 염주를 녀석의 다리에 묶어주며 말했다.

“이걸로 부처의 목이 다시 붙을지는 모르겠으나, 거짓된 깃발은 내릴 수 있겠지. 소림으로 보내거라.”

다리에 염주를 다 묶자, 늙은 매는 창밖으로 휙 날아가 버렸다.

그는 수심에 잠긴 얼굴로 바라보았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리고 오랜 고뇌에 빠져있던 매의 주인을 위해 불호를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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