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방천극?
요즘에도 저런 걸 들고 다니는 문파가 있던가?
단창이나 철창도 아닌 사람 키보다 긴 방천극이다.
산서무림의 사도문파들은 사파라는 이름에 걸맞게 온갖 기기괴괴한 무기를 사용하기로 유명했지만, 방천극은 그런 그들조차 낯선 무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저렇게 긴 창을, 그것도 방천극이라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무기를 사용할만한 곳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염병, 군관인가?”
“그렇겠지. 나라 녹을 먹는 분께서 여긴 왜 왔데?”
“군관도 군관 나름이지. 어디 군부일까?”
“어디긴, 인마! 눈매 살벌한 거 안 보여? 분명 거기 출신일 거야 거기.”
“그렇지? 역시 거기겠지?”
하지만 모든 이들이 조윤의 출신을 눈치챈 건 아니었다
“뭔 소리 하는 거야. 거기가 어디야?”
단검으로 적대 문파의 복부를 찔렀던 남자.
최근 산서 남부 일대에 악명을 떨치고 있는 철전회의 기병호는 북방과 거리가 먼 절강성 출신이었다.
대체 저 여인이 뭔데 겁을 지려 먹는지.
그는 쓰러진 탁자와 의자를 세우고 자리에 앉는 조윤을 쳐다보았다.
벽에 붙어 이리 오라며 손짓하는 서풍을 보며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저 머저리들이랑 같은 일행인가?
‘한심한 새끼들.’
팔을 걷어붙인 기병호는 조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이!”
쾅!
조윤이 세워놓은 탁자를 걷어찬 그가 팔짱을 끼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던 서풍이 입을 틀어막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아차한 다른 일행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가는 순간.
쓰러진 탁자를 눈을 깜빡이던 조윤이 기병호를 올려다보았다.
“제게 볼일이라도?”
“볼일? 하. 맹랑한 년 같으니라고. 분위기 파악이 안 돼? 주위를 둘러봐라.”
그제야 조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식기와 탁자는 멀쩡한 것이 없고, 바닥에는 피가 낭자했다.
게다가 칼부림을 하다말고 멈춘 수십 명의 무림인들이 모두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괜히 알짱거리다 피 보지 말고 눈치껏 꺼지란 말이다.”
“그렇군요.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대협.”
“친, 친절?”
일어선 조윤이 일행들 쪽을 향해 걸어갔다.
어처구니없는 병호는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하지만 화를 내기엔 무언가 애매하다.
마치 아무것도 아닌 취급을 당한 거 같은면서도,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그는 입을 뻥긋거리다 다시 조윤을 불렀다.
“어이, 계집!”
뒤돌아선 조윤의 무표정한 얼굴이 기병호를 향했다.
“계집. 저를 부르신 겁니까?”
“그래. 건방진 년.”
“저는 건방지게 굴지 않았습니다. 혹시, 제가 어떤 무례를 저질렀다면 용서하십시오. 아직 무림엔 익숙지 않아, 무림의 객잔은 본래 이런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반쯤 내리깐 눈이 기병호를 쏘아보았다.
“계집이라. 태어나 처음 듣는 말이군요. 사과해 주시겠습니까?”
“이 건방진 년이 아주 사람을 미치게 만드네. 돌았어? 비명횡사 한번 당해볼테냐? 내가 누군지 알아? 나 철전회의 철질견(鐵鑕犬) 기병호다!”
터벅터벅 돌아온 조윤이 기병호의 바로 앞에 섰다.
견자가 붙은 별호답게 기병호가 외소한 것도 있었으나, 그녀가 웬만한 사내보다 큰 키를 가진 탓에 조윤이 기병호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자신을 내려다본다는 사실이 더 기분 나빠진 기병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단이 일어날듯한 분위기를 감지한 재희가 재빨리 뛰어와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자자, 실례하겠습니다. 하하. 죄송합니다 철질견 대협. 제 누이가 정말 무림초졸이라, 부디 무례를 용서해주시겠습니까?”
“어이 뺀질이.”
“뺀질이… 나? 아! 네 뺀질이 맞습니다. 하하. 말씀하십시오.”
“이제보니 네 누이란 자가 얼굴이 괜찮군. 여기 싸움이 끝나는 대로 찾을 테니 저기 보이는 곳에 앉아있어라.”
재희는 급격히 몰려오는 두통에 엄지로 미간을 문질렀다.
“실례지만 철질견 대협. 그쯤 하시는 게 신상에 이로울….”
“도망치면 그냥 안 끝날 거야. 네놈들 다 잡아다 노역장에 넘겨버리고 이년은 사창가에 팔아 버릴 거다.”
조윤의 표정을 살핀 그가 말했다.
“선 넘었다 병신아.”
재희가 한걸음 뒤로 물러서는 순간이었다.
화살처럼 뻗은 조윤의 손날이 기병호의 목을 향해 뻗어 나갔다.
하지만 기병호 역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무림의 싸움꾼.
몸을 숙인 그가 손에 쥔 단검을 조윤의 복부를 향해 내질렀다.
턱!
이미 기병호의 움직임을 예상한 조윤은 그의 손목을 잡아채,
그대로 꺾어 위로 치켜들었다.
탱그랑! 우당탕!
“크억!”
팔을 꺾어 기병호의 몸을 돌려세운 조윤은 그대로 그의 등을 밟았다.
나무 바닥에 얼굴이 처박힌 기병호가 동료들을 향해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악! 뭐해! 어서 이 년을….”
주춤거리다 칼을 겨누는 철전회의 무인들.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쓸어본 조윤이 재희를 쳐다보았다.
재희는 이제 나는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뒤에서 남궁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여도 되는 버러지들이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조윤이 기병호의 손목을 완전히 뒤틀었다.
뿌드득. 비틀린 팔이 뽑혀 나가는 소리와 함께 기병호의 비명이 객잔 안을 울렸다.
등에 걸린 방천극을 뽑아 짧게 쥔 그녀가 철전회 무리를 향해 걸어갔다.
처음 기병호에게 단검을 찔린 사내.
이 구역을 책임지는 흑명회의 단장이 다급히 소리쳤다.
“우리는 관련 없는 일이다. 흑명회는 무기를 버리고 물러서라!”
빠른 손절.
그의 현명한 대처에 재희가 휘파람을 불며 칼을 뽑아 들었다.
다른 일행들도 각자의 무기를 쥐고 철전회의 무리를 향해 걸어갔다.
칼을 들자마자 급격히 변하는 사룡의 기세에,
외부에서 온 낭인 무리라 여기고 있던 철전회의 얼굴에 낭패가 어렸다.
“잠, 잠깐. 일단 대화를….”
피식 웃은 재희가 말했다.
“선 넘었데도. 거기 흑명회인가 뭔가 하는 분들. 깔끔하게 처리해줄 테니 입구 좀 막아주쇼.”
궁지에 몰린 철전회는 괴성을 지르며 일행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해드려야 할지.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그가 단검에 찔려 내장을 쏟아내는 모습까지 보았던 재희는 신기하다는 듯이 볼을 긁적였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분명 아까 많이 다치신 거 같은데.”
“하하하. 괜찮습니다. 익숙한 일이죠. 사실, 제가 배운 무공이 괴마혈혈공이라고. 심장이나 목을 다치지 않는 이상 죽을 걱정은 없다고 보셔도 됩니다.”
이름만 들어도 아랫동네 쪽에서는 기겁하여 당장 척마대를 보내 추살할 마공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산서에서는 흔한 일인지, 객잔에 있는 사람들 모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오직 일행들 중에 마공이란 말에 남궁신이 미간을 한껏 구길 뿐이었다.
재희가 확인차 물었다.
“마공이오?”
“마공입니다만, 일 년에 서너 번 정신이 나간다는 것 뺴곤 괜찮습니다. 괴마혈혈공을 모르다니, 역시 중원에서 오신 분들이죠?”
“뭐, 그렇습니다.”
“보아하니 낭인들은 아닌 것 같고….”
“저와 뒤에 있는 치들은 강호를 떠도는 야협입니다. 여기 계신 누이는, 음…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셨군요. 함구하겠습니다. 흑명회의 강석두라고 합니다. 다시 한번 대협들의 도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곳마저 잃으면 회주님을 볼 면목이 없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이 동네 사정이야 관심도 없고.
일행들을 야협이라 소개했음에도 적대감을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꼈다.
그런 재희의 눈치를 읽었는지, 강석두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뭐 어떻습니까. 그 시절에 제가 코흘리개였기도 했고, 요즘 산서무림에도 옛날이야기는 옛날이야기일 뿐입니다.”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르네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 않습니까? 하물며 30년이 지났는데요. 많이 달라졌죠.”
칠제의 시대가 종막을 내리고, 이 강호에 변한 건 백도무림과 신교만이 아니었던 듯했다.
혹시 산서에서 지독히 시달릴까, 지난 걱정이 무색해진 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협객 환영받는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게다가, 저희 싸움에 휘말려 철전회와 척을 지게 되었으니….”
“걱정할 거 있습니까? 다 죽여버렸는데요 뭘. 대충 그쪽에서 처리했다고 하쇼.”
하지만 강석두는 그럴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어 보였다.
“손님들이 있었잖습니까. 분명 그중 누군가가 철전회에 은인들의 놈들을 처리했다는 사실을 팔아먹었을 겁니다.”
“여기 흑명회도 있잖습니까. 흑명회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런답니까?”
“죄송하지만, 여기는 그런 곳입니다. 철전회는, 최근 외부에서 몰려온 낭인 놈들이 결집한 녀석들입니다. 대체 뭘 하다 온 놈들인지, 산서출신들 보다 더 지독한 놈들이죠. 반드시 복수랍시고 은인들을 해하려 들 겁니다.”
굉장히 곤란해진 상황이었다.
대표로 강석두와 대화를 나누던 재희는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굉장히 미안해하는 조윤을 제외하고 정체만 들키지 않는다면 별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거지 노인이 보탰다.
“심심하진 않겠네.”
“아니, 영감님은 뭘 할 수 있다고요?”
“아까 못 봤어? 내가 사발로 한 놈 뚝배기를 깨버렸잖아.”
“괜히 그러다 칼 맞지 말고 얌전히 계시기나 하십쇼.”
됐구만.
대충 이야기가 끝난 재희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고마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도 시비가 트여 나선 거지, 딱히 그쪽을 도와줄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밥값 내준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닙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은인들이 저와 형제들의 목숨을 구해주신 거나 다름없습니다. 철전회가 은인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저희가 모시게 해주십시오.”
“알아서 하겠습니다.”
손을 저어 보인 재희는 일행들과 함께 객잔을 나서려 했다.
그러자 강석두가 재빨리 달려와 재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협객분들께서 사도잡배인 저희를 믿지 못하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자랑할 것 뭣하나 없는 우리도 의리와 은혜는 갑을 줄 압니다!”
“거 그 쪽을 위해서 거절하는 거요. 이쪽에 사파와 마두라면 치를 떠는 파란 짐승이 한 마리 있거든.”
발끈한 남궁신이 즉시 반발했다.
“파란 짐승? 설마 날 말하는 건가?”
“너라고 안 했어.”
그러나 강석두에게는 남궁신 쪽으로 턱짓한다.
“보다시피 성격이 별로 안 좋아서. 언제 칼 맞을지 겁이 나서 그러오.”
“그러니까, 척마대주 같은?”
“대충 그런 부류라 보시면 되오. 융퉁성 없고, 난폭하지.”
“그녀에게 다 이를 거다.”
“거기다 쪼잔하지.”
강석두는 살짝 두려움 섞인 표정으로 남궁신을 쳐다보았다.
그는 아까 철전회 무리를 회처럼 썰어 버리던 남궁신의 솜씨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리 하나로 세력을 일구고 버텨온 흑명회였다.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모시는 동안 협객님께서도 분명 저희에 대한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어랍쇼?
무슨 자신감일까.
재희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우리가 가야 할길이 바쁜데….”
“어디로 가시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디든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그에게 흥미를 느낀 건 재희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껏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달려왔으니. 하루 이틀 정도는 괜찮지. 배에 기름때가 껴본 지가 언젠지 모르겠구만.”
그가 마치 전부터 아는 사람인냥 강석두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걸어갔다.
“어디로 모시든 이 동네에서 음식이 제일 맛있는 곳으로 안내하게!”
“당연히 그래야죠 어르신. 마침 저희가 관리하는 객잔 중에 산돼지를 기막히게 하는 곳이 있습니다.”
“좋네, 좋구만 그려! 껄껄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