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크아악!”
속절없이 쓸려나가는 병사들.
복면의 검객들은 하나하나가 검강을 다루는 엄청난 고수들이었다.
지휘사는 갑자기 습격을 가한 검객들에 당황한 표정으로 부관들을 다그쳤다.
“뭣들 하느냐! 역도무리를 구경만하고 있을거냐. 당장 저놈들을 커헉…!”
휙- 퍼걱!
어디선가 날아온 금빛의 섬광이 지휘사사의 가슴을 꿰뚫고 나왔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참사.
지휘사의 가슴을 꿰뚫은 흑빛의 이기어강. 휘르르 떠오르자 정신을 차린 부관들이 사색이 된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흐어어! 도망쳐!”
지휘첨사가 가장 먼저 도망쳤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가 도망친 방향에서 죽립을 쓴 검객이 걸어오고 있었다.
잠시 멈칫하는 지휘첨사.
그리고.
스컹-!
단칼에 지휘첨사를 일도양단한 검객은 부관들을 향해 걸어간다.
그의 검에서 검은 검기로 뒤덮이며, 작은 검강의 조각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휘날렸다.
검객이 죽립을 살짝 들어 올리는 순간.
한줄기 섬광을 그리며 날아간 흑의 매화들이 부관들의 심장을 관통했다.
촤라락-! 털썩.
동시에 쓰러지는 산서 지휘사사의 수뇌들.
무심히 그사이를 지나친 검객이 재희와 일행들 앞에 섰다.
설마하는 표정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던 재희는, 죽립을 벗은 그의 얼굴을 보고 땅이 꺼져라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재희를 향해 입꼬리를 올린 검객이 말했다.
“정의문주 종오가 대백천검가의 가주를 뵙소.”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천산에 있는 거 아니었어? 그리고 뭐? 정의문주?”
그 순간. 수풀 속에서 한 무리의 건장한 사내들이 뛰어나왔다.
“석두야!”
부리나케 달려온 사내가 석두를 부둥켜안았다.
석두는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석호 형? 형이 여기 왜…?”
“회주님이랑 감옥에 갇혀있던 형제들과 같이 왔다. 정의문이 구해주었어!”
석호의 말처럼 회주와 형제들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석호현의 흑명회가 회주의 앞으로 달려가 눈물을 흘렸다.
“회주님!”
“고생 많았다. 고생 많았어.”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관군 놈들이 고문 같은 걸 한건 아니겠죠?”
“괜찮다. 너희야말로 다친 데는 없느냐?”
해후를 나누는 흑명회를 본 재희가 미심쩍은 눈으로 종오를 쳐다보았다.
그가 아는 종오와 개벽이 이런 일을 할 인간이 아니었던 탓이었다.
그리고, 정의문?
재희의 의뭉스런 눈빛에 종오가 능청스레 말했다.
“일부는 천산에 있소. 정의문은, 산서지부의 이름이랄까.”
“천산조차 눈속임이었다는 건가. 아주 대단하시군.”
“온 천하에 눈을 두고 있는 자들을 피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소?”
검제가 칠제가 없는 강호를 위하여 직접 검법을 전수하여 키운 비밀결사. 개벽.
도대체 그 뿌리와 출처를 알 수 없다는 정의문의 정체가 바로 개벽이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재희는 지끈 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러댔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그 지독하다는 쌍룡성 조차도, 설마 개벽단과 종오가 쌍룡성의 고향이자 그 중심지인 대동에 떡하니 있을 줄 알았겠는가.
포기를 모르는 쌍룡성도 쌍룡성이지만 개벽도 못지않게 대단한 인간들이었다.
“이젠 더 이상 정의문주로 있을 수 없게 되었지만. 개벽의 주인인 검가주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걸고 구하러 왔는데, 어떻소?”
“어떻긴, 구해줄 거면 진작에 구해주지 그랬어?”
“그럴려고 했소만, 가주께서 생각지도 못한 짓을 저리는 바람에.”
설마 기름이 흥건한 와중에 불을 지를 줄이야.
종오와 개벽단 조차도 사룡의 자살이나 다름없는 과감한 행동에 꽤나 당황했다.
종오의 기세에 긴장하고 있던 일행들은 재희가 잘 아는 사이인 듯 하자 안도하며 눈치를 살폈다.
수백을 헤아리던 병사들을 눈 깜짝할 새에 정리한 검객들이 종오의 뒤로 몰려들었다.
눈치를 살피던 소룡이 서풍의 들을 쿡 찔렀다.
깜짝 놀란 서풍이 돌아보자 소룡이 턱짓으로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울상을 지은 서풍이 슬금슬금 재희의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저기, 선배님. 정의문의 고수분들과 아는 사이셨습니까?”
“….”
왠지 기분 나쁜 표정을 짓는 재희.
그러나 미처 그의 표정을 보지 못한 서풍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다시 물었다.
“혹시 백천검가의 비밀단체라거나….”
“원수다.”
“예?”
“원수 사이라고.”
검가의 비밀단체?
백천검가를 멸문시킨 당사자들이 아닌가.
다만 재희가 그들을 향해 칼을 겨누지 않는 것은, 검제가 그 모든 책임을 안고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내버려 두었으면 한다는 스승님의 바람도 있었고.
따지고 보면 검제에게 직접 검을 전수 받았으니, 재희와 상아의 사형제 이기도했다.
하여튼 개벽과 그는 딱히 한 단어로 정립할 수 없는 복잡한 사이였다.
그러나 개벽의 입장은 달랐다.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납도한 그들이 일시에 무릎을 꿇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염병.”
질색하는 재희.
그 모습이 썩 유쾌해진 종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가주를 유일한 주인으로 알고 생각하는데, 너무 박대하시는 거 아니요?”
“누구 마음대로?”
“꽤 곤란한 상황이라고 들었소만, 가주의 한마디면 우리가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소.”
“알아서 돕진 못하는 거야? 이봐. 그 인간도 이런 일을 우려해 당신들을 만든 거 아니냐고.”
“그 인간? 언행애 주의해 주시겠소?”
“그 인간이 그 인간이지. 나한테 뭘 바래?”
하하하!
결국 폭소를 터트린 종오가 말했다.
“우리는 그분께서 벼린 칼이오. 어찌 칼이 스스로 움직이겠는가. 주인이 쥘 날만을 기다릴 뿐이지.”
“미안하지만 내 칼은 아닌 듯하군.”
“우린 지금 목숨을 걸고 가주를 뵈러 왔소만, 섭섭하외다.”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만 이어지자 참다못한 남궁신이 입을 열었다.
“이보게 화룡. 대제 저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저만한 고수들이 목숨을 걸어? 큰일이라도 생기는 건가?”
“곧 알게 될 거야.”
지금도 그들의 눈이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재희의 예상은 정확했다.
쉬이이익-!
거대한 창 한 자루가 섬뜩한 파공음 과 함께 종오의 등을 노리고 날아왔다.
즉시 등을 돌리며 검을 휘두르는 종오.
쾅!창과 흑의 검기가 부딪히며 폭발을 일으켰다.
흡사 창이 아니라 포탄이 작렬한듯한 사태에 일행들이 경계를 갖추었다.
그러나 재희가 그들의 제지하며 말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절대 상관하지 마.”
“도움을 받았잖아?”
“괜히 끼어들었다간 사자성에 도착하지 전에 저승부터 들러야 할지도 몰라.”
“대체 저들이 누구이고 무슨 사연이 있길래?”
잠시 고민하던 재희는, 폭발이 일으킨 먼지 속에서 걸어오는 거구의 남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칠제의 망령들. 그들의 싸움이다.”
쌍룡성의 척살대주. 무정이 튕겨 나간 철창을 땅에서 뽑아내며 중얼거렸다.
“찾았다. 쥐새끼 같은 놈들. 용케도 숨어 있었구나.”
각오하고 있었지만, 쌍룡성에서도 가장 골치 아픈 인간이 나타날 줄이야.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 종오.
단원들을 물린 그가 검은 매화를 일으켰다.
* * *
투척했던 철창을 쥔 무정은 등에 메고 있던 또 하나의 철창은 꺼내 남은 손에 쥐었다.
뇌룡쌍창 무정.
그의 별호답게, 두 개의 창에는 푸른 뇌전이 파지직 거리며 불똥을 튀었다.
그가 종오를 노려보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놈. 매화의 색깔이 달라졌구나. 마기가 느껴진다. 안 본 새에 마공을 익힌 것이냐?”
“그대들을 상대하기 위해 여러 무공을 섭렵하다 보니 깨달음이 있었소.”
“마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소리는 하지 않는구나. 하긴, 산서에 길바닥에 치이는 게 마공이긴 하지. 크큭. 천하의 검제의 맥을 이은 자가, 마공에 손을 댔다 라. 아주 갈 데까지 가버렸군.”
그의 조롱에 살짝 자존심이 상한 종오가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말했다.
“본래 천검께서는 무공에 차별을 두지 않으셨소. 한낱 살수의 식견으로 천검의 공부를 폄하하지 마시오.”
“하하하! 그래 차별을 두지 않는 인간이었지! 둘도 없는 벗마저도, 마두마냥 베어버렸으니!”
종오는 무정에게 당장 매화를 날려 곤죽을 내고 싶었으나 인내하며 주위를 먼저 살폈다.
무정과 같은 절세고수도 고수지만, 쌍룡성의 진정한 무서움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혹시나 숨어 있을 살수들의 기습을 차단해 단원들의 목숨을 최대한 살리는 게 먼저였다.
그런데 돌연 무정이 두 개의 창을 다시 허리에 매는 게 아닌가.
의도를 알 수 없어 눈살을 찌푸리는 그에게 무정이 말했다.
“하지만. 오늘만은 우리의 이 지독한 원한을 잠시 미뤄두겠다. 가라.”
그냥 보내주겠다고?
뇌룡쌍창 무정을 상대하는 것만 해도 여기 있는 단원들의 절반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할터.
더구나 그가 자신을 그냥 보내준다는 것은 그동안의 긴 싸움의 경험으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의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 종오.
무정은 아예 싸울 의지가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서 있다.
“진심이오?”
무정의 시선은 흑명회의 무리.
그중 회주 무동을 향해 있었다.
“의절을 했으나 그래도 내 사형이시다. 무동 사형을 살려준 보답이라고 해두지. 다음에 마주치면 반드시 죽일테니, 행운으로 알아라.”
진심이라는 걸 알아챈 종오가 미심쩍은 단원들을 향해 턱짓했다.
검을 거둔 단원들이 무정을 경계하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종오가 재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주의 명이라면 우리는 언제든 강호를 위하여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소.”
“지들 목숨 챙기기도 바빠 보이는구만 뭘. 보내 준다잖아. 빨리 가버려.”
손까지 휘휘 젓는 재희의 모습에 피식 웃은 종오가 단원들을 이끌고 산을 내려갔다.
흑명회. 일행들. 그리고 무정. 세 부류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제일 먼저 무동이 무정에게 걸어와 말했다.
“정아. 나는….”
“우리 사이의 남은 연은 방금 모두 갚았소.”
냉정히 그를 지나치는 무정
스스로 쌍룡성을 나온 무동으로선 사제를 볼 면목이 없어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이 거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고심하던 재희는 애써 밝은 미소와 함께 포권을 올렸다.
“오랜만입니다 무정 선배님! 쌍룡성의 도움은 정말 감사….”
그러나 무정은 재희마저도 지나쳤다.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조윤의 앞이었다.
무정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굳어있던 조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쌍룡성? 당신이 어째서…? 거짓말. 거짓말이야.”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현실을 부정하는 조윤,
입술을 잘근 씹은 그녀가 소리쳤다.
“왜죠? 왜 당신이! …. 제게 서찰을 보내어 진실을 알린 것도 당신인가요?”
일행들 모두가 처음 보는 조윤의 모습에 숨을 죽인다.
죄책감. 그리고, 측은한 눈으로 조윤을 내려다보던 무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말이 많겠지.”
무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았다.
하늘엔 그의 오랜 벗이자, 전서응인 늙은 매가 상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조윤도 그 매를 알아보고 얼굴을 감싸 쥐었다.
털썩 주저앉은 그녀는 먼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도, 가끔 꿈속에서 꾸던.
지옥 같았던 북경에서의 유일한 자유를 느끼던 소중한 추억.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먼 기억 속에, 무정의 얼굴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