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166)

“저거…….”

“신규 해당자 맞아?”

그런 윤재의 모습을 본 마천루의 해당자들은 잠시 싸우는 것도 잊고 혀를 내둘렀다.

그들 역시 대강 정황을 들었고, 길을 안내하는 윤재가 아브람의 실험실을 발견한 신규 해당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윤재에게는 실험실로 향하는 길 안내 그 이상의 역할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지금 윤재가 보여 주는 모습은 도무지 신규 해당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다른 클랜원들에 비해 뒤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진짜 저건…… 규격 외라는 생각밖에 안 드는군.’

윤재를 주목하고 있는 건 엘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키메라들을 향해 검을 빼 들고 달려들 때, 실력을 제대로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

어지간한 1, 2년 차 해당자들도 벅찰 키메라들을 도륙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물약의 효과인가?’

아브람이 만든 물약.

그것을 먹었다고는 들었다.

덕분에 신체적인 능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마력의 절대량과 회복률, 증폭률도 상승했다고.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라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뭔가 또 있군.’

엘빈은 윤재의 손목에 채워져 계속해서 작은 떨림을 토해 내는 팔찌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되는 마력 증폭률과 전달속도. 그건 저 팔찌 때문인가?’

기본적으로 해당자들의 강함은 육체적인 능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육체적인 능력은 기본적인 바탕이고, 거기에 마력의 절대량과 그 마력의 운용과 증폭률에 따라 강함이 결정되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마력이 철철 넘쳐흐르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쓰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윤재가 차고 있는 팔찌는 그 마력을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빠르게 전달시키고 있었다.

‘탐낼 만도 하군.’

저 정도의 마력 증폭률과 전달률을 가진 아이템이 아브람의 손에 넘어간다면?

만약 아브람과 같은 대마법사의 마력을 증폭시킬 정도의 내구력을 가지고 있다면?

‘뭐, 그런 이유로 탐내는 건 아닌 것 같았지만.’

아브람은 저 팔찌를 꽤 자세히 아는 것 같았다.

그리고 팔찌를 원했을 때 보였던 눈은 단순히 대단한 아이템을 바라는 느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저 정도 효과를 가진 아이템은 찾아본다면 찾을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물며 대마법사인 아브람임에야.

무언가 사연이 있다.

엘빈은 윤재가 가진 팔찌와 아브람의 관계에 제법 흥미를 느꼈다.

‘이번에 알게 되겠지.’

더불어 궁금한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윤재가 가진 다른 능력들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엘빈 씨, 앞에!”

윤재는 자신의 싸움에 한눈이 팔린 엘빈에게 외쳤다.

엘빈이 달려가는 방향에서 또 다른 키메라 무리가 덮쳐 오고 있었던 것이다.

점차 실험실에 가까워지는 만큼 그와 비례해 나타나는 키메라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었다.

“쯧. 귀찮게…….”

엘빈은 눈앞을 가득 메운 수십의 키메라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올려 키메라 무리를 향해 뻗고는, 허공에 일자로 선을 그었다.

키에에에에엑-!

수십의 키메라들이 일제히 엘빈을 향해 덮쳐 왔다.

“지금 뭐 하는…….”

윤재는 키메라 무리를 눈앞에 두고도 미동도 보이지 않는 엘빈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곧이어 키메라들 무리가 엘빈을 덮치는 순간이었다.

피잇-

엘빈의 시야에서, 손끝을 따라 만들어졌던 하나의 가느다란 선.

그 선을 따라 허공이 베어졌다.

사아아아아악-

촤아아악-!

수십의 키메라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순식간에 토막 났다.

그 앞에 있던 나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공간 자체가 베어진 것이다.

덮쳐 오는 키메라들을 보고도 무기조차 꺼내 들지 않는 엘빈을 걱정했던 윤재는 허- 입을 벌렸다.

‘대단하잖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허공에 슥 선을 그었을 뿐인데, 그 선을 따라 키메라들이 베어졌다.

마력을 어떻게 움직인 건지, 대체 무슨 스킬을 쓴 건지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마천루의 다른 해당자들도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저건 차원이 다르잖아?’

아브람과의 싸움은 워낙에 금방 끝나서 엘빈이 어떻게 싸우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단지 마력을 이용해 아브람의 마법을 강제로 빼앗아 역공을 취했다는 것만으로도 꽤 강하구나, 생각했을 뿐이었다.

“지금 누굴 걱정했던 거냐?”

옆에 있던 다른 해당자가 혀를 내두르는 윤재를 나무랐다.

“우리가 전부 달려들어도 엘빈 씨 털끝 하나 못 건드려.”

그는 진짜 괴물을 앞에 둔 듯 엘빈을 바라보았다.

‘그 말이…… 진짜였을지도 모르겠어.’

이면세계에 처음 들어온 신규 해당자들을 앞에 두고 엘빈이 했던 말.

“니들 같은 햇병아리들은, 나 혼자도 다 죽여 버릴 수 있으니까.”

전에는 그 말이 단순히 겁주려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신규 해당자들은 그 말을 듣고 엘빈에게 잔뜩 위축되기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보니 단순히 겁을 주려는 것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짓 한 번에 수십 마리의 키메라들을 베어 버리는데, 그보다 약한 신규 해당자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지금껏 어떤 학살에도 겁을 먹지 않던 키메라들이 엘빈의 손짓 한 번에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다.

압도적인 마력과 힘.

살아남은 키메라들은 엘빈에게 다가가는 것을 본능적으로 꺼려하고 있었다.

“뭐야, 더 안 오냐?”

엘빈은 키메라들을 보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크르르르-

그 웃음에 키메라들이 다시 이빨을 드러냈다.

“싱겁기는.”

엘빈은 재미있다는 듯 말하고는 키메라들을 향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세 걸음째.

엘빈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며 키메라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피잇- 촤아아악-!

수백 마리씩 몰려오던 키메라들이 일제히 베어져 사방으로 피를 뿌렸다.

키메라들 사이로 길이 생겨났다.

마천루의 해당자들은 ‘그럼 그렇지’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단 한 명.

윤재만 제외하고 말이다.

‘진짜 이름값을 하긴 하는구나.’

윤재는 연신 속으로 감탄을 내뱉기에 여념이 없었다.

방금 전 키메라들을 도륙하며 어디 가서든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은 참이었다.

이 정도면 제법 강해진 것 아닐까?

그런데…… 엘빈을 보니 알겠다.

‘아직 한참 멀었어.’

물론 욕심이었다.

자신은 아직 이면세계에 들어온 지 1년도 되지 않은 신입이었으니까.

마천루 클랜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인 엘빈을 눈에 둔다는 건 비교 대상이 잘못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못 넘을 벽으로 보이는 건 아니었다.

확실히 지금 당장은 무리다. 하지만 그렇다고 못 넘을 벽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반드시 따라잡을 수 있다. 아니, 넘어설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더 가야 하지?”

단숨에 길을 튼 엘빈이 윤재를 돌아보며 물었다.

윤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이 바로 앞입니다.”

윤재는 대답과 함께 바로 눈앞에 보이는 절벽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 위로 아브람의 실험실로 들어가는 작은 통로가 보였다.

“바로 저깁니다. 아브람이 있는 곳이.”

16592448704082.jpg

키에에에에엑-!

수십만의 키메라들이 멜른을 덮쳐 왔다.

이미 멀리서부터 울음소리가 흘러들어 온 탓에 멜른의 해당자들과 거주민들은 한참 전부터 겁에 질려 있었다.

“저, 저게 다 뭐야?”

“괴물? 아니, 사람?”

“오, 온다!”

멜른 해당자들의 태반은 이면세계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들이었다.

그중에는 지금껏 마을 밖으로 한 번도 나가 보지 않은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기존의 해당자라 할지라도 멜른에 괴물이 쳐들어오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경우였다.

당연히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도, 도망쳐!”

“여기가 마을인데 도망칠 데가 어디 있다고! 싸워, 싸우라고!”

도망치는 사람, 싸우려는 사람.

그들이 패닉에 빠진 사이, 우르르 몰려온 키메라들은 더욱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들이 막 해당자들을 향해 이빨을 들이대려는 순간.

카가가가가각-

쿵, 쿵쿵-

거대한 장막이 솟아나 키메라들을 가로막았다.

“이건…….”

“마천루 클랜?”

해당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그들은 이 중 유일하게 키메라들을 향해 한 발자국씩 다가가는 젊은 여성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특히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규 해당자들이라면 그녀의 얼굴을 모를 수가 없었다.

수십만 명에 달하는 신규 해당자들을 한데 가둬 두었던 마천루 클랜의 간부.

맥 로이스.

그녀가 키메라들을 막아선 것이다.

“지금부터 멜른은 비상사태에 돌입합니다.”

마력이 담긴 그녀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목표는 멜른의 방어와 생존. 괴물, 키메라들의 섬멸입니다. 각 구역의 해당자들은 우리 마천루 클랜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웅, 우웅-

로이스의 목소리는 작지만 넓게 퍼져 나갔다.

거대한 멜른 전체에 퍼질 만큼.

서울과 같은 규모를 가진 거대한 도시다. 그 넓은 전 지역에 걸쳐 목소리를 전달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의 마력이 깊고 넓다는 뜻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로이스는 멜른을 향해 쏟아져 온 키메라들을 바라보며 손을 움켜쥐었다.

우득, 우드드득-

“……키메라 박멸을 시작합니다.”

콰직, 콰직-

키메라들의 몸이 짓눌리고, 찌그러졌다.

거대한 장막 안에 갇힌 채로.

로이스의 등장 이후 키메라들은 멜른에 단 한 발자국도 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됐다.

패닉에 빠졌던 해당자들이 다시 정신을 차렸다.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한 명에 의해서.

그녀가 자신들의 편에 서서 싸운다는 사실 하나로 두려움이 다소 사라진 것이다.

‘이게…… 기존 해당자의 힘?’

그리고 그런 로이스의 능력에 정규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현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개 개인의 무력이, 이 정도까지 이를 수 있다니.

심지어 엘빈과의 대화를 떠올려 보면 로이스의 전공은 공격이 아닌 방어였다.

그런 로이스가 저 많은 키메라들을 단숨에 제압했다.

그렇다면 대체 아브람을 잡으러 간 엘빈은 얼마나 강하다는 말인가?

‘한참…… 멀었네.’

정규는 다른 해당자들과 섞여 앞으로 나아갔다.

어쩌면 정말, 엘빈을 따라갔으면 자신이 방해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타닥-

파아앗-

지면을 박찬 정규는 몰려드는 키메라들을 향해 선두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곧 해당자들과 키메라들이 한데 섞여 싸우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에엑-!

“죽어!”

“이 새끼들, 뭐 이리 강해?”

“아악, 내 팔―!”

키메라와 해당자들의 싸움.

로이스는 계속해서 몰려드는 키메라들을 정리해 나가며 그 모습을 조금씩 지켜보았다.

그들 중 단연 돋보이는 사람은 역시나였다.

‘물약의 효과인가?’

아브람이 만든 물약을 복용한 덕분인지 정규는 다른 해당자들보다도 훨씬 수월하게 키메라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움직임 면에서는 어중간한 1, 2년 차 해당자들은 우습게 볼 수 있을 정도.

경험이 조금 부족하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다른 기존 해당자들보다 나았다.

윤재와 정규는 이미 아브람의 실험실에서 키메라들과 숱하게 싸운 상태였으니 말이다.

‘이쪽은 어떻게든 될 것 같고…….’

이 정도라면 막아 내지 못할 건 없다.

당장 막는 정도라면 로이스, 그녀 혼자서도 할 수 있을 정도니.

‘문제는 아브람…… 그를 잡는 거겠지.’

이 많은 키메라들을 만들어 낸 존재가 바로 아브람이다.

결국 그를 잡지 못하면 지금과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될 뿐이었다.

16592448704082.jpg

실험실에 들어오고 만 하루가 지났다.

전진에 전진. 윤재와 엘빈을 비롯한 마천루의 해당자들은 쉬지 않고 실험실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콰지직-

펑, 퍼퍼펑-!

전격 계열의 광역 스킬.

마천루의 해당자, 라우스는 안쪽에서 우르르 몰려나오는 키메라들을 정리하고는 몸을 돌렸다.

“뚫렸습니다. 더 몰려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좋아. 휴식 끝, 다시 움직인다.”

엘빈의 말에 잠시 자리에 앉아 건량으로 끼니를 때우던 클랜원들이 하나둘 일어났다.

윤재 역시 남아 있던 육포를 입안에 욱여넣었다.

한 명이 키메라들을 상대하며 시간을 버는 사이 조금이라도 쉬어 가자는 것이 고작 5분이었다.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엘빈의 격려에 라우스는 고개 숙여 대답하고는 잠시 숨을 돌렸다.

그러고는 주위에 있는 키메라들의 시체를 둘러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젠장. 이 많은 것들이 다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실험실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아니, 실험실뿐만이 아니었다.

실험실을 비롯해 멜른 인근을 둘러싸고 있는 산맥.

그 전체가 키메라들의 소굴로 이루어져 있었다.

“게다가 지금껏 잠잠하던 놈들이 왜 이제 와서 움직이는 거지?”

“아마 이것 때문일 겁니다.”

중얼거리는 듯한 라우스의 불평에 윤재는 품에서 작은 돌멩이를 꺼내 보였다.

라우스는 그 푸른색 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시선이 모두 모였다.

마력을 다루는 해당자라면 돌멩이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마력을 모를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이건…… 뭐지?”

“키메라들의 심장을 대체하고 있는 마력석입니다.”

“이 작은 게?”

라우스의 놀람에 엘빈이 다가왔다.

그는 윤재에게서 마력석을 받아 이리저리 살피더니 말했다.

“그리 많은 양은 아니군. 일회성처럼 보이고.”

“애초에 키메라들이 강한 이유는 마력 때문이 아니니까요.”

윤재의 말에 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마력석의 용도는 피를 온몸에 순환시켜 주는 건가? 그 정도면…… 이만한 마력으로도 꽤 오랜 시간 써먹을 수는 있겠어.”

“그렇다 해도 이 많은 키메라들의 몸에 이런 게 전부 심어져 있다는 건…….”

“그만큼 오랫동안 준비했다는 뜻이겠지.”

몇 년.

아니, 몇십 년?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연구해 오고, 키메라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영혼을 옮겨 새로운 육신을 가지기 위한 연구.

키메라들은 단순히 그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 정도라고 보기 어려웠다.

단지 실패작일 뿐이라면 몸속에 이런 마력석을 만들어 심어 놓았을 리가 없을 테니까.

“대체 뭘 꾸미고 있던 거지?”

갈수록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

애초에 아브람은 비밀이 많은 인물이었다.

대마법사였음에도 인간 백정이라는 이름을 들을 만큼 살육과 연구에 미쳐 있었고, 어느 순간 어떤 제약에 묶여 기억을 잃었으니.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이라고는 과거 수많은 인간을 죽인 대마법사라는 사실뿐이었다.

하지만…….

‘아브람은 기억을 잃기 전부터 멜른을 공격할 생각이었던 건가?’

마력석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윤재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와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기억을 잃고 멜른에 묶여 있던 신세가 되었던 것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키메라들의 존재.

하나의 군대처럼 만들어진 키메라들은 단순히 실험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이해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들의 몸에 심어진 마력석 때문이었다.

“비밀이 많은 늙은이란 말이지.”

엘빈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윤재를 돌아보며 물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지?”

“이제 반 정도 왔습니다.”

“진짜 더럽게 넓군. 이만큼 왔는데…….”

윤재와 정규는 보름 동안 왕복한 거리였다.

하지만 엘빈을 비롯한 마천루의 해당자들은 조금의 휴식도 없이 전속력으로 실험실로 향하는 길을 통과하고 있었다.

키메라들이 막아서도 마찬가지였다.

막으면 죽이고, 뚫어 냈다.

두세 시간을 달리면 5분, 혹은 10분을 쉬는 게 고작.

그 시간조차도 마력을 회복하는 데 집중하느라 정신적인 피로는 풀기 어려웠다.

“쓸데없는 이야기로 지체했다. 서두르지.”

엘빈은 그렇게 말하며 윤재에게 다시금 마력석을 건넸다. 그러고는 안쪽으로 앞장서기 시작했다.

윤재는 품 안에 마력석을 넣고는 다른 이들처럼 엘빈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이야기라…….’

윤재는 마력석이 계속해서 신경 쓰였다.

더불어 키메라들의 존재도.

‘과연 이게 그냥 이대로 넘어가도 되는 문제인지.’

16592448704082.jpg

웅, 우웅, 우우웅-

아브람의 실험실.

그 거대한 공동이 계속해서 흔들리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

웅, 우우우우웅-

흔들림은 간헐적으로 강해졌다, 약해졌다를 반복했다.

공동 전체를 둘러싼 빛은 거대한 원을 중심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지 않군.”

아브람은 공동을 빙 감싸고 있는 원을 둘러보았다.

그것은 일종의 마법진이었다.

아브람의 마력을 매개체로 움직이는 마법진은 영혼을 빨아먹는 블랙홀과 같은 작용을 하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에게 집중한다면 살아 있는 사람의 영혼조차 뽑아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마법진.

하지만 아브람은 그것을 전혀 다른 용도로 이용했다.

이미 죽어 육체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난 영혼을 빨아들인다.

그렇게 하면 영혼을 빨아들이는 데 필요한 힘이 훨씬 적어지고, 보다 많은 영혼을 빨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거대한 공동, 실험실에 펼쳐져 있는 마법진은 멜른에서 죽어 가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놈들인가?”

생각보다 그리 많은 영혼이 모이지 않자 아브람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누군가 훼방을 놓고 있다. 모여드는 영혼의 숫자가 예상보다 적어도 너무 적었다.

적어도 수십만, 혹은 백만 이상이 죽었어야 한다.

물약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는 인간의 영혼.

수많은 인간의 영혼을 한데 모아 정제하고 추출하여 액체의 형태로 녹인다.

그것이야말로 마력 정제의 물약을 만드는데 가장 필요한 재료였다.

“뭐, 그래도 이 정도면…….”

똑-

아브람은 천장에서 한 방울씩 떨어져 모인 플라스크 안의 흰색 액체를 보며 중얼거렸다.

“하나 정도는 만들 수 있겠어.”

아무리 예상보다 적다지만 멜른에서 죽어 간 사람의 수는 이미 만 단위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 정도면 원래 준비했던 세 개는 무리지만, 하나 정도는 급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크르르르르-

공동 밖에 있는 키메라들이 낮게 울었다.

어딘가 겁에 질려 있는 듯한 울음소리.

아브람은 그들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쫓아왔군.”

실험실에 있던 키메라들이 빠르게 죽어 가고 있었다.

멀리서 마력 파장이 흘러들어 왔다. 익숙한 마력이 제법 섞여 있었다.

‘서둘러야겠어.’

다른 놈들은 몰라도, 두 명은 확실히 위험했다.

엘빈과 로이스.

그들은 제대로 된 힘을 찾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하기는 골치 아픈 상대였다. 그렇기에 여기까지 도망쳐 물약을 만드는 데 서두른 것이다.

‘이것만 완성되면…….’

아브람은 하얀 액체가 고여 있는 플라스크를 들어 올렸다.

수만 명의 영혼을 정제시켜 만든 액체.

새하얀, 무채색의 액체는 점차 푸른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16592448704082.jpg

5분의 휴식, 다시 전진.

그리고 다시 5분의 휴식.

시간과의 싸움인 만큼 엘빈은 강행군을 고집했다. 다른 이들 역시 그런 엘빈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아주 잠깐 눈을 붙일 정도의 시간도 없었다.

육체적인 능력이 극에 달한 해당자들은 하루 이틀 정도 잠을 자지 않더라도 몸에 큰 무리가 없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윤재는 멀리 보이는 거대한 문을 가리켰다.

“저깁니다.”

고작 이틀.

일전, 윤재와 정규가 통과했던 시간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였다. 휴식 없는 강행군의 결과였다.

엘빈은 홀로 문을 향해 앞장서서 다가갔다. 혹시라도 다른 어떤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실험실 앞에 도착한 엘빈은 걱정과 함께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제발 그 영감탱이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군.”

실험실에 도착했다고 해도 정작 아브람이 없으면 모두 헛수고였다.

이미 한 번 도망쳤던 만큼 아브람이 자신들을 피해 움직인다면 답이 없었다.

엘빈은 실험실의 문을 열기 전,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실수하는 놈 있으면 여기서 안 죽어도 내 손에 죽어.”

“예!”

“그럼…… 열지.”

엘빈은 그 말과 함께 문을 툭 밀었다.

그그그그극-

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철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넓은 공터와 함께 매캐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군.”

익숙한 목소리가 먼저 귀에 들어왔다. 이어 공터 한가운데 서 있는 아브람의 모습이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엘빈은 문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용케 도망 안 가고 여기 있었군.”

“도망? 내가?”

아브람은 작게 웃었다.

“너희들 따위에게 말이냐?”

“그전에 도망쳤던 건 누구였더라?”

“그때와 지금 상황이 같다고 생각하느냐?”

아브람은 그렇게 물으며 엘빈을 비롯한 마천루의 해당자들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시선이 윤재에게서 멈췄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팔찌에서.

아브람의 입가로 미소가 더욱 진하게 번졌다.

“딱 좋구나.”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 다시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침 제 발로 찾아와 주었으니 아브람의 입장에서는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수고를 덜어 주었으니 말이다.

“물론 상황이 같진 않지. 그런데 넌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스릉-

엘빈은 처음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쏴아아-

동시에 그의 몸에서 풍기던 마력의 파장이 돌변했다.

고고하던 기세는 보다 날카롭고 거칠게 바뀌었다.

근처 해당자들은 저도 모르게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조금이라도 더 다가갔다가는 온몸이 난도질당할 것 같은 착각이 들었기에.

“그때 계속 싸웠으면 어떻게 됐을 것 같아?”

“……확실히, 그때와는 느낌이 다르긴 하구나.”

검을 뽑아 든 엘빈의 기세는 이전과도 사뭇 달랐다.

누가 뭐래도 그는 이면세계에서도 알아주는 강자였다. 아무리 아브람이라 하더라도 지금의 상태로는 결코 얕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데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아브람은 그렇게 말하며 텅 빈 플라스크 병을 들어 보였다.

익숙한 형태의 병. 윤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설마…….”

“역시 먹어 본 놈이 빨리 아는군.”

윤재의 반응에 엘빈을 비롯한 해당자들이 긴장했다.

마력 정제의 물약.

아브람이 그것을 만들어 예전의 마력을 되찾으려 한다는 것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