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66)

그것을 사용하면 순간적으로 훨씬 강해질 수 있지만, 그 부작용으로 광기에 먹히게 된다고.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대체 어느 정도기에 그만큼 쓸 만한 스킬을 아껴 두나 싶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알 것도 같았다.

‘저건 도무지 평소에 쓸 수 있는 스킬이 아니군.’

천평택은 욱신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갈비뼈가 완전히 나가 큰 도움은 못 되겠지만, 그래도 한 손 거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규가 적아조차 구분하지 못해서야 도움은 큰 의미가 없었다.

지금은 오직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콰직-!

“질 것 같지는 않네.”

콰드드드득-

터너의 목을 움켜잡은 정규가 그대로 그의 몸을 들어 올려 바닥에 내리꽂았다.

“커헉!”

“뭐야. 끝이야?”

정규는 검을 역수로 쥐었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터너의 얼굴을 향해 내리찍었다.

콱-

검은 바닥에 박혔다. 간발의 차이로 검을 피한 터너가 입을 열었다.

“설…… 마요…….”

푹, 푸푹-

“컥!”

터너의 검이 정규의 옆구리를 연이어서 찔렀다. 내장을 깊게 파고드는 검에 정규는 입에서 피를 토했다.

그 짧은 사이, 정규의 몸이 훤히 드러났다. 터너는 자신의 목을 움켜잡은 정규의 손을 강하게 치워 냈다.

팍-

“키익!”

콰드드득-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정규는 바닥에 내리찍었던 검을 크게 휘두르며, 단숨에 터너의 목을 베어 갔다.

그 순간,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려던 터너의 얼굴이 크게 베어졌다. 뺨에서부터 눈 위까지 깊게 상처 입은 터너는 한쪽 시력을 잃고 말았다.

‘마치 다른 사람 같군.’

터너는 한쪽 눈을 잃은 상태로 정규에게서 급히 거리를 벌렸다.

방금 전, 제법 큰 상처를 입었건만 정규는 쉬지 않고 다시금 달려들고 있었다.

“짜릿해, 아주!”

“징그럽습니다.”

쨍그랑-

터너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놓았다.

이마에 돋아났던 악마의 뿔도 사라졌다. 그의 코앞까지 검을 가져갔던 정규는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뭐 해? 검 안 들어?”

“졌습니다.”

“뭐?”

“더 이상 싸울 생각 없습니다.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터너는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이 싸움은 저희가 진 모양입니다.”

“뭐?”

퍼억-

정규가 터너의 시선을 따라 주위를 둘러보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목 뒤를 강하게 쳤다.

“좀 자고 있어라.”

털썩-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정규의 몸을 윤재가 한 손으로 받아 들었다.

터너는 윤재를 비롯해 자신의 주위로 몰려온 엘빈과 로이스, 천평택을 둘러보았다.

“군장급 악마 둘을 상대로 대단들 하시네요.”

“별거 아니던데.”

“전 별거던데요.”

비교적 손쉽게 이긴 엘빈과는 달리, 윤재는 고개를 저으며 넌더리를 쳤다.

역행의 부작용으로 몸 이곳저곳이 쑤실 듯 아파 왔다.

“뭐, 그건 됐고…….”

엘빈은 터너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녀석은 이제 어쩌지?”

터너의 몸 상태는 이미 정상이라고 볼 수 없었다.

가진 힘도 상당히 소모했고, 부상도 제법 깊었다. 온몸에 있는 크고 작은 상처와 반 뼘 정도 베어진 목은 스스로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가 도망치는 것도 포기한 채 검을 떨어뜨린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지금 터너의 몸 상태는 엘빈이나 윤재는 고사하고 갈비뼈가 부러진 천평택조차 어쩌지 못할 수준이었던 것이다.

“살려 주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해 준다면, 쉽게 보내 주지.”

“죽이겠다는 거군요.”

“하는 거 봐서.”

두루뭉술한 대답.

애매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대답이었다. 터너는 그 대답으로 자신이 살아날 수 있는 가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배신했지? 아니, 왜 악마들에게 붙었지?”

처음 이곳에서 터너를 보고 나서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의문.

그가 왜 악마들과 함께 있는 것일까?

머더러 클랜이 악마들과 손을 잡았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배신자이자 머더러 클랜의 간자였던 터너가 악마들과 함께 있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였다.

근본적으로 지금, 머더러 클랜은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터너가 악마들과 함께 있을 만한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당신들도 곧 알게 될 겁니다.”

터너는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강제로 끌려온 이 전쟁에, 우리가 이길 가능성 따위는 없다는 것을요.”

“……그게 무슨 소리지?”

엘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로이스와 윤재를 비롯한 자리의 모든 이들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다니.

단순히 전력적인 측면에서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터너의 목소리에는 무언가 확신이 담겨 있었다.

“제…… 대답은…… 여기서…….”

주륵-

터너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혀를 깨문 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마력과 마기가 흐르는 회로를 강제로 뒤틀었다.

해당자들이 택하는 자살 방법이었다.

엘빈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건가?”

털썩-

터너는 곧 바닥에 쓰러졌다. 마력회로가 역류한 대가는 온몸의 근육이 뒤틀리고 피가 역류하는 것이었다.

콰직-!

엘빈은 이미 숨이 반쯤 끊어진 터너의 머리를 발로 짓밟았다. 짜증이 가득 담긴 표정의 엘빈은 잠시 숨을 고르며 중얼거렸다.

“대체…… 이게 무슨 개소리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그 말은 곧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나 같았다. 무엇보다 전쟁에서 패한 뒤 승리한 쪽과 패배한 쪽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윤재 역시 속이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패배할 거라는, 확신 가득한 터너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악마들의 편에 선 이유는 그것 때문인가?’

터너는 왜 악마들의 편에 서게 되었냐는 질문에 인류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돌려 대답했다.

그것은 곧, 승리할 가능성이 있는 쪽에 붙었다는 대답이었다.

터너는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악마들의 편에 붙은 것이다.

“젠장. 이거 괜히 머리만 복잡해지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은 엘빈은 로이스를 힐끔 돌아봤다.

그녀 역시 머리가 복잡한 건 마찬가지인 듯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그녀를 잠시 지켜보던 엘빈이 물었다.

“아직 마력 안 돌아왔나?”

“어, 어? 아니.”

급히 대답하는 모습이 어째 평소와 달랐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붙어 있었던 만큼, 엘빈은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훤히 보이는 듯했다.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마 지금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 불안감에 휩싸여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여 있을 게 뻔했다.

“그럼 서둘러 움직이지. 아직 다 끝난 거 아니잖아?”

엘빈의 말에 로이스는 ‘아차’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자신들이 이곳까지 온 까닭은 악마들을 죽이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마귀목을 없애기 위함이었지.

“이다음 방이었지?”

“응, 아마 그럴 거야. 여기 외에 마기가 느껴지던 방은 저쪽뿐이었으니까.”

“길은 제가 만들겠습니다.”

“무리하지 마라. 전에 그 기술 때문에 몸 상태도 좋지 않으면서.”

엘빈은 앞장서 가려는 윤재를 밀쳐 내고 주먹을 쥐었다.

그러고는 로이스가 가리킨 방향의 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쉬익-

꽈- 앙-!

마력을 담은 주먹을 신경질적으로 뻗었다. 그러자 윤재가 몇 번씩 휘둘러 무너뜨렸던 벽이 단박에 박살 나며 허물어졌다.

그리고 드러난 광경에, 벽을 허문 엘빈을 비롯한 모두가 입을 크게 벌리고 놀랐다.

“이게…… 다 뭐야?”

저도 모르게 놀람과 함께 섞여 나온 중얼거림.

윤재는 벽 안쪽으로 드러난 하나의 거대한 숲을 바라보았다.

‘이게 다 마귀목이라고?’

거대한 공간 가운데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나무들.

그것은 신전 바깥에 펼쳐져 있는 나무들과는 다른 종류였다. 그리고 윤재는 이미 그것을 본 적이 있었다.

작은 숲 전체가 마귀목이었다.

마귀목은 한 그루가 아니었다.

“……마귀목만 있는 게 아니었군.”

크르, 르르르-

카아아악-!

여기저기서 들리는 울음소리.

그것은 작은 숲 곳곳에서 마귀목의 껍질을 파먹고 있던 잡식곰들의 것이었다.

“그 자식 깨워라. 자고 있을 때가 아니야.”

엘빈은 윤재가 부축하고 있는 정규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잡식곰들은 불시에 나타난 윤재와 다른 일행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들 뒤에 쓰러져 있는 두 악마들 때문인 듯했다.

하지만 놈들이 언제 달려들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그들의 어미로 인식되어 있는 마귀목을 베어 내는 것인 이상, 싸움은 피할 수 없었다.

팍, 팍-!

“인마, 그만 일어나라.”

“음, 으으…….”

윤재가 등을 팍팍 치며 깨우자 정규는 흐리멍덩한 눈을 부비며 의식을 차렸다. 곧 그는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어, 어? 뭐야? 여기가 어디예요?”

“다행히 정신은 차렸군.”

“의식을 한 번 잃고 나면 괜찮아 지더라고요.”

천평택의 말에 대답한 윤재는 부축하고 있던 어깨를 놓고는 말했다.

“몸은 좀 괜찮냐?”

“아직 좀 쓰리긴 한데…….”

정규는 피가 묻어 있는 몸을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움직일 만해요.”

“벌써 회복된 건가?”

“광폭화 능력 중 하나거든요. 무하마드가 먹어치운 피를 이용해 제 상처를 빠르게 치료하는 거. 피라는 게 생각보다 큰 힘이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정규의 대답에 천평택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광폭화를 사용한 정규가 터너와 싸우는 모습을 줄곧 지켜보았던 그는, 광폭화에 자가 치유 능력이 함께 섞여 있다는 말에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광폭화라는 스킬을 제대로 제어할 수만 있다면 이 녀석도 물건이 되겠어.’

아니, 이미 물건은 물건이었다.

굳이 광폭화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정규는 충분히 랭커의 반열에 들어선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잡담할 시간 없다.”

엘빈은 자신들을 향해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 오는 잡식곰들을 바라보았다.

정규는 빠르게 지금 상황을 이해했다. 눈앞에 있는 수많은 마귀목들과 잡식곰들만 봐도, 지금이 싸워야 할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직 변이되지 않은 잡식곰들이 다수. 수는 대충 30마리 정도인가?’

이 정도면 해 볼 만하다 싶었다.

대부분 아직 변이가 되지 않은 잡식곰들이었다. 아무리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한들, 30마리 정도면 충분히 해결이 가능했다.

‘문제는…….’

윤재의 시선이 저 멀리 숲 뒤쪽으로 향했다.

‘다른 잡식곰들이 이곳으로 몰려들 수도 있다는 거지.’

씨앗이 심어진 다른 잡식곰들의 습성.

놈들은 자신의 어미라고도 할 수 있는 마귀목에 강한 모성애를 가지게 된다.

더군다나 마귀목은 단순한 나무가 아니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였다.

아마 이곳에 있는 마귀목들은 이미 씨앗이 심어진 다른 잡식곰들에게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라고.

‘시간이 그리 많지 않겠어.’

서둘러 움직여야 한다.

결정을 내린 윤재는 정규를 돌아보며 말했다.

“넌 마귀목을 베는 데 집중해라. 마력 아직 남았지?”

“그럼요.”

“로이스 씨는 힘을 좀 더 아끼세요. 뒤에 잡식곰들이 더 몰려올지도 모르니까. 그때가 되면 잡식곰들을 막아 내는 건 로이스 씨 역할입니다.”

“아까 이 신전의 구조를 확인할 때 저 반대쪽으로 큰 구멍이 하나 있었어요. 아마도 잡식곰들은 그곳을 통해 드나드는 것 같아요.”

“그럼 그쪽을 막아 주십시오. 서둘러 주세요.”

“네, 알았어요.”

“엘빈 씨와 저, 천평택 씨는 여기 있는 잡식곰들을 정리합니다. 정규는 마귀목을 베는 데 집중하고, 저희는 그 뒤를 엄호합니다.”

일사불란한 지시에 엘빈은 잠시 눈을 끔벅이다 피식 웃었다.

다급해 보이는 모습을 보니 또다시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나 보구나, 싶었다. 그런데 급하게 내린 지시 어디에도 이렇다 할 흠은 없었다.

‘따라 줘야겠지.’

저벅-

엘빈은 빠른 걸음으로 나가 윤재와 나란히 섰다.

“몸도 안 좋은데 쉬엄쉬엄해라. 20마리는 내가 잡지.”

“저 멀쩡합니다. 상처 입은 곳도 없지 않습니까?”

“부작용이 심할 텐데?”

“그 정도야 뭐.”

어깨를 으쓱이며 검을 뽑아 드는 윤재를 잠시 지켜보던 엘빈은 곧 먼저 앞으로 달려 나갔다.

콰아악-

마력을 휘감은 검이 직선으로 뻗어 갔다. 엘빈의 검은 정직한 만큼 위력적이었다.

변이가 되지 않은 잡식곰들 정도는 엘빈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잡식곰들의 시선은 가장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엘빈에게로 모여들었다.

쿠어어어어-!

성난 울음소리와 함께 잡식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엘빈에게 모여들었고, 몇 마리는 가만히 멈춰 있는 다른 일행에게로 달려들었다.

그 직후 뒤를 이어 윤재와 천평택이 움직였다. 정규의 움직임은 가장 나중이었다.

촤아악-

쾅-!

윤재와 천평택이 달려들던 잡식곰들을 막아섰다. 두 사람의 도움으로 정규는 마귀목이 모여 있는 숲을 향해 직선으로 내달릴 수 있었다.

웅, 우우웅-

고오오오-

정규의 검에 마력이 실리며 손에 들고 있던 무하마드의 크기가 점차 커져 나갔다.

10미터, 20미터.

마력이 늘어난 만큼 무하마드의 크기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저걸 다 베려면 시간이 없어.’

자신의 역할을 다른 사람들이 시간을 버는 동안 마귀목들을 모두 베어 내는 것.

윤재는 비교적 부상이 가장 심한 정규를 잡식곰들과 싸우게 만드는 대신, 마귀목을 베는 역할을 맡겼다.

애초에 거인의 반지를 이용해 검의 절삭 범위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정규에게는 꼭 어울리는 역할이었다.

“후으읍…….”

숨을 크게 들이쉰 정규는 거대해진 무하마드를 크게 뒤로 젖혔다.

그 직후,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콰지지직-!

우드드드득-

마귀목이 단칼에 베어져 쓰러지기 시작했다.

칼질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정규는 이어서 다른 마귀목들을 향해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쿠어어어어-!

잡식곰들이 울부짖었다.

아니, 정확히는 잡식곰들의 몸에 심어진 씨앗들이 울부짖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어미가 무참히 베어지는 모습에 통곡하는 건 당연했다. 잡식곰들의 시선이 곧 정규에게로 돌아갔다.

콰직-!

서걱-

하지만 곧 다른 일행에 의해 그 움직임은 제지되었다. 정규의 좌우로 엘빈과 천평택이, 그리고 위쪽으로는 윤재가 가로막은 것이다.

‘한곳을 노리니 차라리 상대하는 건 더 쉽군.’

잡식곰들의 목표는 오직 정규였다.

그 목표를 위해서라면 자신들의 목숨마저도 도외시하고 있었다. 생존 본능이라는 중요한 나사가 빠져 버린 잡식곰들은 상대하기가 한결 더 쉬웠다.

터억- 촤아악-!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잡식곰들의 발을 후려쳐 균형을 무너뜨리고, 그대로 목을 베어 낸다.

공중을 맡은 윤재는 마병갑으로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역행을 사용한 부작용 탓에 몸이 조금 욱신거리긴 했지만, 지금 정도라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이쪽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크어어어어-!

윤재는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한 잡식곰들의 울음소리에 눈살을 퍽 찡그렸다.

‘역시 더 몰려왔나.’

마귀목들의 씨앗이 배양된 변종 잡식곰들.

문제는 바로 저놈들이었다. 놈들이 자신들의 어미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부리나케 달려온 것이다.

‘부탁드립니다, 로이스 씨.’

윤재는 달려드는 잡식곰들을 막기 위해 출구로 향한 로이스를 속으로 응원했다.

이제 그녀의 능력이 빛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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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억, 쿠어어어어-!

화가 잔뜩 난 잡식곰들의 울음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그즈음 마귀목들 사이를 헤치고 그 반대쪽으로 돌아온 로이스는 잡식곰들이 드나드는 거대한 통로를 찾아냈다.

십여 마리의 잡식곰들이 동시에 드나들 수 있는 넓은 통로. 잡식곰들은 이곳을 통해 신전으로 들어와 마귀목을 발견하고 그 껍질을 먹기 시작한 것이다.

‘수가 너무 많아.’

숲 전체를 울릴 만큼 잡식곰들의 울음소리는 끊임이 없었다.

놈들의 수는 도저히 가늠되지 않을 정도였다. 하긴, 저 많은 마귀목들의 껍질과 씨앗을 먹은 잡식곰들이 얼마나 많을지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막으려면 나도 힘내야겠네.’

로이스는 통로를 막아섰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잡식곰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쿵, 쿵쿵-

크어어어어-!

화가 잔뜩 난 듯한 울음소리.

녀석들은 지금 자신들의 어미인 마귀목이 위험하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가여운 녀석들.’

로이스는 녀석들이 가엾게 느껴졌다.

잡식곰.

놈들은 원래 나무를 뜯어먹고 사는 괴물이었다. 육식보다는 초식을 주식으로 삼고, 제 가족들과 함께 무리생활을 하며 살아간다.

그런 녀석들이 지금, 마귀목의 씨앗에 먹혀 자신의 가족들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악마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마귀목을 자신의 어미라 인식하고 씨앗에 잡아먹혀 악마의 말에만 따랐다.

녀석들에게 더 이상 제 삶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디 너희가 여기서 풀려날 수 있길 바라마.”

로이스는 양손을 앞으로 펼쳤다.

두 손을 통해 막대한 마력이 빠져나갔다. 동시에 통로에 투명한 막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파작, 파자작-

한 뼘 두께의 넓은 막.

수많은 잡식곰들이 그 위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쾅, 쾅쾅쾅-!

쿠어어어어-!

거짓된 어미를 지키기 위한 잡식곰들.

그들을 홀로 막아 내는 로이스의 이마에 조금씩 땀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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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쾅쾅-

그어어어-!

잡식곰들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왔다.

‘하지만 막혀 있다.’

울음소리가 무언가에 가로막혀 있었다.

그 이유야 뻔했다. 로이스가 잡식곰들을 막아서고 있는 것이다.

그 많은 잡식곰들을 혼자 막아서고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은 했지만, 진짜로 해낼 줄이야.

만약 로이스가 잡식곰들을 막아 내지 않았다면, 그 많은 잡식곰들로부터 죽는 쪽은 자신들이 되었을 것이다.

“후우-”

잡식곰 하나의 목을 꿰뚫은 윤재는 지친 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역행을 사용하면서 몸에 무리가 가 있던 차였다. 그 직후 곧장 마력을 끌어다 사용하니 지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진짜 죽겠네.”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그 힘에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검을 휘두르면 휘두르는 대로 몸이 따라간다. 원해서가 아니라,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런 것이다.

‘역행의 부작용이 슬슬 밀려오는 건가.’

욱신거림은 처음부터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크게 무리하지 않는다면 움직일 만하다고 판단했다. 역행을 사용한 건 아주 잠깐뿐이었으니까.

하지만 한번 꼬여 버린 마력회로는 마력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상처가 덧나는 것처럼 더 심하게 꼬이고 있었다.

우우우우웅-

뿌득, 우드드득-

“크읍…….”

윤재는 검을 휘두르다 팔이 뒤틀리는 느낌을 받고 이를 악물고 고통을 인내했다.

족쇄를 찬 오른팔이었다. 마력회로가 제일 크게 뒤틀린 곳이기도 했다.

가장 먼저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는 팔. 온몸의 욱신거림을 잊게 할 정도로 극심한 고통이 팔 전체를 감싸고 밀려들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아야 한다.

지금 자신이 전투에서 이탈하면 그 공백을 메울 사람이 없었다.

잡식곰들은 곧장 정규를 공격하게 될 테고, 그렇게 시간을 버리다 보면 바깥에 있는 잡식곰들이 들이닥치게 된다.

최악의 상황.

그 상황을 막기 위해서라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라도 쉬어선 안 되는 것이다.

콰직-!

“컥!”

불시에 잡식곰의 발에 얻어맞은 윤재의 몸이 허공으로 크게 떠올랐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윤재는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날아가던 등 뒤로 마병갑을 만들어 낸 윤재는 허공에서 방향을 잡고, 자신을 발로 후려친 잡식곰의 등 뒤로 돌아갔다.

파앗-

촤아아악-!

그대로 검을 크게 휘둘러 잡식곰의 목을 베어 낸다. 마병갑을 검에 두르고, 마력을 크게 사용한 만큼 다시금 온몸의 마력회로가 비명을 질렀다.

‘이제 조금, 아주 조금만 더…….’

남은 잡식곰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마지막 몇 분, 윤재는 반쯤 정신을 잃고 싸웠다. 결국 윤재는 마지막 남은 잡식곰을 정리하고는 검을 바닥에 박아 몸을 지탱했다.

팍-

“이제…… 남은 마귀목만…….”

윤재는 비틀거리며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곧 다 쓰러져 가는 마귀목들을 보고는 다리가 풀리고 말았다.

“아…….”

“쉬고 있어라. 몇 개 남지도 않았으니.”

마찬가지로 잡식곰들을 마저 정리한 엘빈은 바닥에 주저앉은 윤재의 어깨를 두드렸다.

천평택은 진작부터 엘빈에게 잡식곰들을 맡기고 마귀목들을 쓰러뜨리는 데 한 팔 거들고 있었다.

콰아앙-!

남은 마귀목은 세 그루.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끝났나.’

바깥에 있는 잡식곰들은 마귀목들이 다 베어지면 진짜 모든 게 끝나는 것이다.

‘그럼…… 이제…….’

욱신-

윤재의 눈이 조금씩 감겼다.

끝났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온몸의 힘이 풀어지며 의식이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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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의식이 돌아왔다. 윤재는 자신이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의식이 돌아온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윤재는 바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찌르는 듯한 통증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일어났냐?”

실눈을 뜬 윤재를 앉아서 내려다보던 엘빈이 물었다.

사방이 조용하다 싶더니, 다들 지쳐서 앉아 있거나 자고 있었다.

“여긴 어딥니까?”

윤재는 누운 채 그대로 물었다. 눈을 굴려 주위를 둘러보니, 거대한 공동처럼 넓은 다른 방과는 달리 비교적 작은 방이었다.

“신전 안의 어딘가. 그냥 쉴 만한 방을 찾아서 들어왔다. 아무래도 여긴 쉬는 곳이었던 모양이야.”

악마들과 싸운 곳과 마귀목이 심어진 방은 예배를 드리는 예배당이었다. 당연히 그만큼 규모가 컸다.

하지만 이 거대한 신전 전체가 예배당으로 이루어져 있는 건 아니었다. 잠시 쉬어 가거나 숙면을 취할 수 있는 시설도 마련되어 있었다.

“뭐,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먼지가 잔뜩 끼어 있긴 하지만.”

조금 먼지를 털어 낸, 나무로 만들어진 간이침대.

윤재는 그 위에 누워 있었다.

로이스와 정규, 천평택 역시 마찬가지였다.

꽤 힘들고 지쳤는지 다른 일행들은 모두 자고 있었다.

윤재는 엘빈의 다리를 베게 삼아 누워 있는 로이스를 보더니 물었다.

“다들 피곤하셨나 봅니다.”

“그럴 만도 하지.”

“엘빈 씨는요?”

“난 그다지.”

엘빈은 그렇게 대답하며 상체를 젖혀 벽에 몸을 기댔다. 아닌 척하지만, 그 역시 꽤 지친 듯한 기색이 비쳤다.

“제가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습니까?”

“반나절 정도? 잘 자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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