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166)

“다른 잡식곰들은요?”

“마귀목을 모두 베자 물러났다.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우리 다 어떻게 됐을지 모르니까.”

신전 밖에 있던 잡식곰들은 대부분 씨앗이 배양된 변종들이었다.

그런 녀석들이 신전 안으로 들이닥쳤다면, 잔뜩 지쳐 있었던 일행은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녀석이 고생했다. 그 상태로 무려 30분 넘게 잡식곰들을 막고 있었으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잡식곰들도 물러나지 않았을 거다.”

“30분이나요?”

윤재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랐다.

로이스가 잡식곰들을 막아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놈들을 막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힘드실 만도 하군.’

아무리 로이스가 마르지 않는 막대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 시간 동안 잡식곰들을 홀로 막아서고 있었던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변종 잡식곰들의 힘만큼은 랭커 해당자들을 훨씬 상회할 정도였다.

그런 잡식곰들이 수십 마리라면, 로이스가 만들어 낸 방벽에 가해지는 충격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방벽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마력도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로이스는 막대한 마력을 퍼부어 잡식곰들을 30분 동안이나 막아선 것이다.

“그나저나 너,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냐?”

“뭐가 말입니까?”

“마귀목들을 모두 죽이면 잡식곰들이 물러날 거라는 거 말이다.”

엘빈의 물음에 윤재는 끙, 앓는 소리와 함께 겨우 상체를 일으켜 대답했다.

“그러길 바랐습니다. 적어도 마귀목이 죽는 것과 동시에 놈들의 몸속에 있는 씨앗은 힘을 잃게 될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윤재는 태연히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것도 놈들의 몸속에 있는 씨앗이 완전히 부화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지만 말입니다.”

“그렇군.”

엘빈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풀렸다.

조금씩 감기는 듯한 엘빈의 눈을 보며, 윤재가 말했다.

“피곤하면 조금 주무셔도 됩니다. 혹시 모두 잠들어 있어서 깨어 계셨던 거면, 지금부터는 제가 깨어 있겠습니다.”

잡식곰들이 물러났다고는 하나, 이곳은 아직 중간지역 안쪽이었다.

다들 부상을 입고 힘이 방전된 지금, 모두가 잠에 빠져드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엘빈은 다른 일행들을 재우고 자신이 일어나 있기를 자처한 것이다.

정작 그 본인도 잔뜩 피곤에 절어 있었으면서도.

“……그러겠나?”

“네, 주무십시오.”

윤재의 대답에 엘빈은 피식 웃으며 졸린 듯 감았다 뜨던 눈을 닫았다.

곧이어 엘빈은 벽에 몸을 기대고, 로이스에게 다리를 내어 준 채 잠들었다.

‘보기 좋군.’

이따금 정규가 장난스럽게 무슨 사이냐며 놀리긴 하지만, 윤재는 진심으로 두 사람이 좋아 보였다.

순수한 친구인지, 아니면 연인으로 발전될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을 보고 있을 때면 가끔씩 옛날 생각이 나곤 했다.

‘어서 보고 싶다.’

윤재는 엘빈과 로이스를 보며, 아내와 함께 저렇게 잠이 드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저 머릿속에 그리는 것만으로도 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행복했다. 과연 그 꿈이 다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아마 그 순간 그대로 시간이 멈춘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 한순간을 위해서라면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겨도 아프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윤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자신을 위해 이 자리까지 기꺼이 따라온 두 사람과 천평택, 그리고 지금껏 자신을 뒤따라 준 정규를 향해서.

16592451327818.jpg

다행히 신전 안은 안전했다.

아니, 정확히는 윤재를 비롯한 일행이 쉬고 있는 방 안이 안전했다. 마귀목이 있던 거대한 예배당 쪽은 여전히 잡식곰들이 드나들었다.

하지만 잡식곰들은 그곳을 드나들기만 할 뿐이었다. 밑동만 남아 있는 마귀목의 껍질을 뜯어먹기는 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 죽어 버린 마귀목의 씨앗을 먹는다 해도, 그 안에는 아무런 힘도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흐아암-”

“일어나셨습니까?”

윤재는 하품과 함께 눈을 비비는 로이스를 보며 물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제일 먼저 보이는 얼굴에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아, 깜짝이야!”

“말해 두지만 먼저 기대고 잔 건 너다.”

엘빈은 줄곧 자신의 다리를 베고 자고 있던 로이스에게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그 말에 로이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엘빈을 노려보았다.

“다리 좀 빌려줬다고 생색이냐?”

“생색은 아니고. 좀 불편했다고.”

“그래, 미안하네.”

“알면 다행이다.”

일어나면서부터 목소리를 높이는 로이스와 그런 로이스의 화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 내는 엘빈은 보며, 윤재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막 잠에서 깨어나 꾸벅꾸벅 졸고 있던 천평택은 두 사람의 소란에 길게 기지개를 켰다.

“시끄러워서 더 자기도 글렀군.”

“그래도 오래 잤습니다. 다들 하루 정도는 내리 잔 것 같으니까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깨어나자, 윤재가 멀리 창밖으로 들어오는 해를 보며 말했다.

이곳 신전을 찾고 해가 뜨고, 싸움이 끝나고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시간이 하루가 훌쩍 더 지나갔다.

이렇게 오랫동안 쉰 까닭은 그만큼 일행의 부상과 피로가 누적된 탓이었다.

특히나 마력을 너무 과다하게 소모한 로이스나 가장 큰 부상을 입은 정규의 경우에는 하루 이상의 휴식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만큼 힘들었으니까요. 전 아직도 여기가 쓰려요.”

정규는 거의 아물어 가는 옆구리 쪽 상처를 손으로 가리켰다.

마지막에 터너에게 입은 상처였다. 광폭화를 사용한 정규는 자신의 상처를 돌보지 않고 싸웠고, 그런 만큼 부상이 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았는데 마귀목을 베느라 심하게 움직인 탓에 상처가 더 벌어진 것도 한몫했다.

“싸울 때 기억도 안 나면서 생색은. 움직일 만은 하냐?”

“그럼요.”

“다른 분들은요?”

“나야 뭐, 크게 다친 곳도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저도 괜찮아요.”

모두가 같은 대답이었다. 옆구리의 상처가 조금 남아 있는 정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몸이 다 회복된 듯했다.

거기다 마력이 다 회복된 로이스라면 정규의 상처를 다시 봐 줄 수 있을 것이다. 반쯤 아문 상처 정도라면 몇 시간 안에 회복할 수 있었다.

“슬슬 움직이는 게 좋겠군.”

엘빈의 말에 윤재가 물었다.

“바로 돌아갈 생각입니까?”

“아니.”

엘빈은 자신들이 머무른 방 안을 죽 둘러보며 대답했다.

“여길 좀 알아봐야겠다.”

지치고 힘든 와중이라 미뤄 두긴 했지만, 이곳 신전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중간지역 한가운데.

잡식곰들을 비롯한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이곳에, 이렇게 거대한 건축물이라니.

더군다나 누구를 모시는 신전인지도 알지 못했다. 사람의 흔적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대체 누가 살았던 건지, 누구를 모시던 신전이었던 건지…… 여길 뒤져 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클랜장이 왜 이곳을 숨겼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고.”

엘빈의 말을 로이스가 이어서 받았다.

두 사람의 의견에 윤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윤재 역시 이 신전에 관심이 있었다.

‘그 신전과 닮은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휴식은 끝났다.

로이스는 정규의 상처 부위를 회복시키며 천천히 움직였다. 두 사람이 뒤따르고, 윤재를 비롯한 세 사람이 앞장섰다.

거대한 신전은 백여 개의 크고 작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방 구석구석과 여러 개의 예배당을 둘러보아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일까요? 사람이 살던 곳 같지는 않은데.”

“그나마 이쪽은 조금 사람 손이 탄 것 같군.”

엘빈은 그렇게 말하며 다음 방으로 향하는 문을 가리켰다.

다른 방과는 달리, 그곳의 문은 이상하리만치 먼지가 묻어 있지 않았다. 신전에 들어오고서 처음 보는 사람의 손길이었다.

“보존 계열의 스킬이 걸려 있는 건가?”

“그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 같은데. 다른 곳과는 달리 여기만 너무 깨끗하잖아?”

엘빈의 중얼거림에 로이스가 대답했다.

그녀의 말대로 어떤 물건이 상하거나 녹슬지 않도록 방지하는 보존 계열의 스킬은 제법 흔한 편이었다.

그 지속시간에 따라 등급이 나뉘지만, 대부분이 C등급에 속하는 스킬이었다.

“이 방 전체에 보존 계열의 스킬이 걸려 있다라…….”

엘빈은 다른 곳과는 달리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 정도 수준의 보존 스킬이 있었나?”

보존 계열의 스킬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등급 자체는 그리 높지 않은 편이었다.

대부분 특정한 아이템을 오랫동안 사용하기 위해 편의상 걸어 놓는 용도 외에는 사용할 일이 없었고, 보존이라는 특성 외에는 별다른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어 봐야 5년 정도 유지되는 다른 보존 계열의 스킬과 달리, 하나의 방 전체에 보존 스킬이 유지되는 건 조금 특별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토록 오래된 신전에 아직까지 스킬의 효과가 남아 있다면야 그 등급이 절대 낮지 않을 것이다.

“못해도 A등급 스킬이겠군.”

“A등급 보존 스킬이라…… 그런 건 처음 들어 보는데.”

“안에 뭐가 있을지 기대되는데?”

철컥-

엘빈은 곧장 방문을 열고자 손잡이를 아래로 내렸다.

끼익-

손잡이를 내림과 동시에 엘빈은 문을 안쪽으로 밀었다. 윤재는 그 뒤를 바짝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좁군.’

예배당을 비롯한 다른 방과는 달리, 문 안쪽의 방은 꽤 좁은 편이었다.

“벽에 뭔가 그려져 있는데?”

방에 막 발을 들인 로이스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눈이 없지 않은 이상 그녀가 말한 그림이 무엇인지 모를 사람은 없었다.

“이 방 전체가 그림 천지군.”

“알아먹지 못할 그림들이네요.”

엘빈의 대답에 정규는 벽 전체에 그려져 있는 그림과 문자들을 보며 말했다.

그림들은 그렇다 쳐도, 문자들도 하나같이 알아먹지 못할 언어들이었다.

결국 볼 수 있는 건 그림뿐이었다. 하지만 문자들 사이사이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은 그것만 봐서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잠깐만, 저거…….”

그때 정규의 눈에 익숙한 그림이 들어왔다.

“어디서 본 듯한…….”

정규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그와 함께 엘빈과 로이스의 시선도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바로 윤재였다.

엘빈은 정규가 가리킨 방향에 그려진 그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저 녀석이 차고 있던 팔찌와 닮았는데.’

윤재가 차고 있던 팔찌.

지금은 사라졌지만, 멜른에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하더라도 윤재는 오른쪽 손목에 특이하게 생긴 팔찌를 차고 있었다.

벽 한쪽에 그려진 그림은 분명 그것과 닮아 있었다.

물론 우연일지도 모른다.

흔한 형태를 한 만큼 비슷하게 생긴 팔찌는 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하지만…….

“맞는 것 같나?”

“…….”

엘빈의 물음에 윤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온통 다른 생각으로 꽉 차 있었던 것이다.

‘왜…….’

윤재는 방 안에 가득 메워진 글씨들을 보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읽을 수 있는 거지?’

다른 사람들은 읽을 수 없는 문자들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읽을 수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른다.

그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언어라도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읽어졌다.

두근, 두근-

가슴의 정 중앙.

윤재의 심장 고동 소리가 점차 커져 갔다. 마치 누군가의 가슴에 귀를 대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것처럼 선명했다.

그것은 날 때부터 지니고 태어난 심장이 아니었다.

튜토리얼.

그때 받은 ‘자하르의 심장’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당장 눈앞의 글씨들을 읽을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 읽어야겠다는 생각조차도 들지 않았다.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 글씨들을 읽을 수 있는지.

그리고 왜 이곳에 들어선 직후부터 심장이 반응을 시작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럽고 복잡해졌다.

“형, 형!”

그때 바로 옆으로 다가온 정규가 윤재의 어깨를 강하게 흔들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윤재는 깜짝 놀라며 옆을 돌아봤다. 정규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그래요?”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냐?”

다른 사람들은 이상한 눈으로 윤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재는 대답 대신 자신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족쇄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다른 일행이 보고 있던 그림과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자하르의 족쇄는 분명 같은 것이었다.

심장과 마찬가지로 족쇄 역시 잘게 떨리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여기 뭔가 있어.’

처음 이곳 신전을 발견했을 때, 튜토리얼 마지막에 보았던 신전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착각이 아니라는 느낌이 이 방에 들어서고부터 확신이 되었다.

윤재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일행에게 말했다.

“이 방에 잠시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이유가 있나?”

엘빈이 되물었다.

윤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벽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이 글씨들…… 읽을 수 있습니다.”

“아는 글씨냐?”

“모릅니다. 그런데 그냥 읽을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윤재는 그렇게 말하며 오른쪽 손목을 들어 올렸다.

족쇄의 존재를 아는 엘빈과 로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벽에 그려져 있는 팔찌는 윤재가 차고 있던 것이었다.

손목 안쪽으로 파고들어 있는 팔찌를 알지 못하는 천평택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윤재는 자신이 차고 있던 팔찌가 변화를 시작하며 손목 안으로 파고들었고, 그게 벽에 그려진 것과 같은 팔찌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묘하군. 튜토리얼에서 얻은 아이템이 중간지역과 관련이 있다니…….”

천평택 역시 신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튜토리얼은 어디까지나 이면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으레 통과하는 관문에 지나지 않았다.

그곳에서 얻은 아이템이 이면세계 내면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과연 이것이 우연일지, 아니면 어떤 필연일지는 모른다. 자세한 건 문자를 모두 읽어 봐야 알 것이다.

윤재는 문자가 처음 시작되는 지점을 찾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6592451327818.jpg

근래 들어 리 차홍은 근심거리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아니, 리 차홍뿐만이 아니었다. 마천루 클랜에 많은 해당자들이 같은 이유로 걱정거리를 안고 있었다.

“이 양반은 왜 이리 안 와?”

트룸의 클랜 하우스 앞에서 경계를 서던 리 차홍은 짜증을 가득 담아 중얼거렸다.

그가 기다리는 사람은 두 명이었다.

엘빈과 로이스.

그를 마천루 클랜으로 이끈, 클랜의 간부들이었다.

“중간지역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아마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리 차홍의 중얼거림을 듣고 대꾸한 해당자는 마천루 클랜원 요코하마 타키시였다. 대수롭지 않은 듯한 그의 말에 리 차홍은 와락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걱정하는 거 아니냐. 중간지역으로 갔으면 누구라도 반드시 살아 돌아온다고 보장 못하는 거 몰라?”

“그거야 그렇지만…….”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이쯤 되면 걱정되는 것도 당연하지.”

리 차홍은 욕설을 내뱉으며 궁시렁거렸다.

그런 리 차홍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요코하마는 머리를 긁적였다.

‘나라고 해서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닌데 말이지.’

마천루 클랜에서 엘빈에 대한 평가는 제법 후했다.

특히나 그와 조금이라도 친분 있는 수하들이라면 그를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만큼 엘빈은 자신의 사람이라면 끔찍이도 챙겼으니까. 마천루 클랜의 해당자들 중에서는 엘빈에게 은혜를 입고 들어온 이들도 더러 있었다.

리 차홍 역시 그런 해당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요코하마, 자신도 그랬다.

‘무사하셔야 할 텐데…….’

아무리 로이스와 함께 갔다고는 하지만, 중간지역은 그만큼 위험한 곳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떠난 장소가 중간지역 내에서도 설계사 팀 하나가 전멸해 위험지역으로 분류된 곳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아무리 엘빈이 괴물 같은 실력자라고 해도 생환을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응?”

“어?”

그때 멀리 길 너머로 익숙한 얼굴들이 모였다.

리 차홍과 요코하마는 동시에 눈을 비비며 그 얼굴을 다시 똑바로 바라보았다.

“맞…… 죠?”

“맞다.”

두 사람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이윽고 그들이 기다리던 얼굴이 돌아왔다.

“엘빈 씨!”

엘빈은 자신을 반기며 울먹이는 리 차홍과 반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요코하마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뻔히 보였다. 평소 같으면 아마 머리라도 한 대 쥐어박으며 왜 이리 오버하느냐며 꾸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클랜장 지금 어디 있냐?”

돌아온 엘빈은 그런 두 사람에게 곧장 용건을 물었다.

평소에 보기 힘든, 심각한 얼굴이었다.

16592451327818.jpg

한 달이 넘는 긴 여정이었다.

더군다나 다녀온 장소는 중간지역이었다. 그럼에도 윤재와 엘빈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클랜 하우스의 꼭대기.

마천루의 클랜장이자, 몇 남지 않은 1세대의 해당자 금사자 아르한이 있는 방이었다.

“긴장이 안 풀리네요.”

마천루의 클랜 하우스로 돌아온 정규는 곧장 숙소로 향하지 않고 로이스와 함께 접대실로 향했다.

천평택은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닌 것 같다며 중간에 빠져나갔다. 로이스는 정규와 함께 자리에 남아 엘빈과 윤재를 기다렸다.

“그러게요. 분명 집에 돌아왔는데.”

“아직 끝난 게 아니라서 그럴까요?”

“아마도요.”

마천루 클랜의 간부인 그녀에게 마천루의 클랜 하우스는 집이나 다름없었다. 그곳을 숙소로 삼고 있는 정규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그런데 클랜 하우스에 돌아온 직후에도 아직 일이 다 끝나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온몸에 꽉 들어찬 긴장 역시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만났겠죠?”

정규의 물음에 로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클랜장도 자리에 있다고 했으니까요. 지금쯤이면 도착했을 거예요.”

“아르한이라고 했던가요? 금사자라던. 그분은 어떤 사람이에요?”

정규는 아르한에 대해 별달리 아는 게 없었다.

남들도 다 아는 소문 정도였다.

1억에 가까운 해당자들.

더군다나 그 일부라고 할 수 있는 랭커.

그 정점에 도달해 있는 존재.

그가 바로 금사자 아르한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그렇게 엄청난 사람이구나.’ 싶었다.

마천루 클랜의 스페어로 있는 만큼, 언제 한 번쯤은 마주칠 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최초의 해당자였다.

어느 누구보다 먼저 이면세계로 들어온 인물.

그는 어떤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활동을 멈춘 지가 워낙 오래된 사람이라서.”

“활동을 멈춰요?”

“클랜장만이 아니라 다른 1세대의 해당자들 대부분이 그래요. 백천, 김진석, 그리고 머더러 클랜의 마스터 에밀리까지도. 다들 활동을 멈추고 대부분의 일을 다른 간부들에게 떠넘긴 채 조용히 살고 있어요.”

로이스의 대답에 정규는 화들짝 놀랐다.

“에밀리? 혹시 머더러 클랜의 마스터가 여자였어요?”

정규가 놀란 부분은 바로 머더러 클랜 마스터의 이름이었다.

에밀리. 절대 남자의 이름은 아니었다.

살인마들로 가득한 머더러의 클랜 마스터가 여자라는 건 정규에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네. 몰랐어요? 아는 사람은 아는 이야긴데.”

“처음 들었어요.”

“검은 과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여자예요. 그녀도 클랜장과 마찬가지로 1세대의 해당자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머더러 클랜의 마스터가 되었죠.”

“그럼 그녀도 현실에서 연쇄살인마였어요?”

시프먼을 비롯해 머더러 클랜에서 어느 정도 악명이 있는 해당자들은 현실에서 이름을 떨친 살인마인 경우가 많았다.

정규는 에밀리 역시 그런 살인마들과 같은 부류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이야기는 못 들어 봤어요.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없는 걸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건 다른 머더러들처럼 그녀 역시 정상은 아니라는 거죠.”

“머더러 클랜이 그렇게 생긴 거였네요.”

머더러 클랜은 5대 클랜에서도 함부로 하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힘을 가진 클랜이었다.

그런 클랜을 처음 만든 해당자가 평범한 사람이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르한이나 백천, 김진석과 같은 1세대의 해당자라면 이해가 갔다.

이면세계에 최초로 들어온 그들은 하나같이 괴물 같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뭐, 그녀 역시도 활동을 멈춘 지는 꽤 됐어요. 소문에는 머더러 클랜의 누군가에게 살해되었다고도 하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르죠. 그녀도 저희 클랜장과 마찬가지로 비밀이 많으니까요.”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요? 잡혔어요?”

머더러 클랜은 해체되었다.

클랜에 속해 있던 머더러들은 모두 죽거나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곳곳에서 머더러들이 범죄를 일으키기는 하지만, 덜미를 잡히지 않기 위해 숨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하게도 클랜 마스터인 에밀리 역시 수배되었을 것이다. 머더러 클랜이 악마들과 손을 잡았다면, 에밀리야말로 제1순위 척살 대상이었다.

“아직 안 잡혔어요. 아마 살아 있다면 어딘가 있겠죠.”

“활동을 멈춘 지는 꽤 됐다고 했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생각하고 있었다니요?”

“머더러 클랜이 악마들과 손을 잡은 게 과연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물은 로이스는 이어서 말했다.

“아무도 확신하지 못해요. 그녀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16592451327818.jpg

마천루 클랜의 클랜 하우스.

이면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 그 꼭대기 층.

하늘과 가장 가깝게 맞닿아 있는 그곳에 아르한이 있었다.

똑똑-

집무실 의자에 앉아 몸을 늘어뜨리고 있던 아르한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대답했다.

“들어와.”

끼이이-

“누군지도 안 물어보십니까?”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엘빈이었다.

아르한은 뒤로 젖히고 있던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라는 건 알았다. 1층에서부터 쌀쌀한 분위기가 풀풀 풍기던데.”

“제가 그렇게 티를 냈습니까?”

“그럼. 아, 손님도 있는데 서 있지 말고 앉아라.”

아르한은 엘빈의 뒤를 따라온 윤재를 보며 말했다.

엘빈은 태연히 한쪽 소파에 앉는 아르한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다 먼저 그 맞은편에 앉는 윤재를 보고 자신도 움직였다.

곧 아르한과 두 명이 마주 앉았다.

아르한은 소파 사이에 있는 테이블에 몇 개씩 올려 두었던 미지근한 맥주병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차? 맥주? 뭘로 할 테지?”

“마실 건 괜찮습니다.”

“그래? 오늘 처음 보는데 꽤 딱딱한 친구군.”

달칵-

아르한은 맥주병의 마개를 따고는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윤재는 그런 아르한을 보며 생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