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빈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아르한과 겐지를 바라보았다.
일어나지 않길 바랐던 일이었다.
가능하면, 이번에만큼은 윤재의 촉이 틀렸기를 바랐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5대 클랜 중 하나인 징거 클랜은 인간들에게 꼭 필요한 전력이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윤재의 촉은 꼭 맞아떨어졌다.
“워커 엘빈인가? 그때 그 애송이가 많이도 컸군.”
겐지는 엘빈의 등장에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따로 겐지를 본 적이 없었던 엘빈은 그가 자신을 아는 것 같자 물었다.
“날 아나?”
“뭐, 얼굴은 본 적이 있었지. 소문도 들었고. 이 친구가 눈여겨보고 있는 녀석이라고도 했고.”
“친구?”
아르한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웃기고 있네. 친구라고?”
“한때는.”
“지금은 아니라는 소리군.”
“뭐, 그렇긴 한데…….”
겐지는 턱짓으로 엘빈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녀석이 왔다고 해서 뭐 달라질 것 같아?”
이곳은 대도시 바라움이었다.
징거 클랜의 영역. 그렇기에 바라움에 거주하고 있는 징거 클랜의 해당자들은 엘빈과 로이스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비록 지금은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지만, 수적으로 열세라는 것만은 변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여기까지 들어왔다 해도, 여긴 바라움이다. 네 녀석이야 내가 맡는다 치고, 다른 녀석들은?”
징거 클랜의 아래에 있는 하위 해당자들에게까지 모두 씨앗이 배양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싸움이 벌어지면 징거 클랜의 편을 들게 될 것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아르한이 이곳을 벗어난다는 건 불가능했다.
“생각보다 멍청하네.”
“뭐?”
“저 녀석들이 여기 왔다는 건, 내가 너에 대한 준비를 해 왔다는 소리 아니겠나?”
아르한의 물음에 겐지는 눈을 작게 좁혔다.
그 말대로 아르한이 자신을 비롯한 징거 클랜을 의심했다면 준비를 이 정도에서 그쳤을 리 없었다.
“마천루의 해당자를 전부 끌고 오기라도 했다는 거냐?”
“차라리 그게 나을 거다.”
익숙한 목소리가 엘빈의 뒤에서 들려왔다.
겐지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발견한 익숙한 얼굴에 겐지의 표정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백천?”
하얀 백발을 위로 묶어 올린 미남자.
그 머리만큼이나 창백한 하얀 피부와 선명한 하늘색의 눈동자.
바로 하얀탑 클랜의 마스터, 백천이었다.
“가능하면 이 자리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 보내는 좋은 자리였으면 했는데 말이지.”
검공작 백천.
그가 검을 뽑으며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뭐, 언젠가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하지 않았어?”
아르한.
그는 품에서 주섬주섬 꺼낸 새하얀 장갑을 손에 끼우기 시작했다.
엘빈은 그런 두 사람과 겐지를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낄 자리가 아니군.’
세 명의 1세대 해당자들.
지금 이 자리는, 그들 사이에 있었던 오랜 인연과 악연을 정리하는 자리였다.
그들 사이에 자신이 낄 곳도 없었고, 끼어서도 안 된다. 자신의 역할은 따로 있었다.
“엘빈! 안 돕고 뭐 해?”
때마침 로이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엘빈은 세 명의 1세대 해당자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말했다.
“간다, 가.”
자신이 해야 할 일.
그것은 저들 사이에 방해꾼이 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날이 밝고 난 뒤, 정규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등 뒤가 딱딱했다. 천장이 아닌, 높은 하늘이 먼저 보였다.
“으으…….”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온몸이 욱신거렸다. 곳곳에 찔리고 베인 상처들이 쓰라렸다.
‘뭐가 어떻게 된…….’
정규는 겨우 상체를 일으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붉은색 붕대들. 아니, 정확히는 새하얗던 붕대들이 피에 젖어서 붉게 변해 있었다.
“아, 맞다.”
정규는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을 떠올렸다.
갑작스레 쳐들어온 머더러들과의 싸움.
그 과정에서 광폭화를 사용하고, 중간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일어났냐?”
“형?”
정규는 자신의 바로 옆에 앉아 나무에 몸을 기대고 있는 윤재를 돌아보았다.
윤재 역시 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안색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정규는 혹시나 하는 표정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거 혹시, 제가…….”
“너 때문 아니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라.”
“그럼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머더러들한테 당한 거예요?”
“머더러라면 머더러긴 한데…….”
윤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에밀리에게 좀 많이 당했지.”
“에밀리? 잠깐, 왜 형이 에밀리와 싸워요?”
“뭐, 그렇게 됐다.”
윤재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기억 못하나 보네.’
에밀리와 윤재가 싸울 당시, 정규는 한창 다른 머더러들과 절벽 위에서 싸우고 있었다.
정신이 멀쩡했다면 자신과 에밀리의 싸움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모를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마력 파장이 일어났을 테니까.
“그래도 어떻게 잘 살아 있네요. 이겼어요?”
“아니, 졌어.”
“그럼 어떻게…….”
“김진석 씨가 도와줬다.”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정규는 윤재가 에밀리와 싸웠다는 이야기에 김진석이 에밀리에게 당한 거라고 생각했다. 김진석은 분명 에밀리의 뒤를 쫓아갔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에밀리는 어떻게 됐어요?”
“…….”
윤재는 대답하지 않고 정규를 보며 옆을 곁눈질했다.
정규는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김진석을 발견했다.
아무리 작게 이야기한다고 한들, 이 정도 거리에서 김진석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눈치가 빠른 정규는 곧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 그보다 저 깨우지 그랬어요. 저 때문에 여기 있었던 거 아니에요?”
“정말 하나도 기억 안 나냐?”
“뭘요?”
“너 죽을 뻔했어.”
윤재는 작게 혀를 차며 말했다.
“솔직히…… 어떻게 살아났는지도 신기할 정도로 만신창이었고.”
“제가요?”
정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붕대가 온통 피에 젖어 있기는 했지만, 자신의 몸 상태가 그 정도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기억 안 나면 됐다. 굳이 떠올릴 필요 없어.”
윤재는 자세한 이야기를 묻어 두었다.
‘이번엔 진짜 잘못되나 싶었는데…….’
윤재는 정규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의 온몸에 둘려 있는 새빨간 붕대들. 저것들 모두가 정규의 피였다. 온몸에 난 상처들 역시 너무 깊어서 당장 어떻게 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과다출혈은커녕 어지러운 기색 하나 없어.’
정규의 상처는 금방 아물었다. 특별한 스킬을 사용한 것도 아니건만,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스스로 치유되었다.
창백하던 안색 역시 금방 돌아왔다. 가늘고 힘없던 호흡 역시 눈에 띄게 정상화됐다.
광폭화의 효력이 끝난 이후에도 그 영향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조금씩 변하고 있다.’
무하마드는 피를 먹으면 먹을수록 점점 더 강해지는 검이었다.
검에 내장된 스킬, 광폭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하마드의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광폭화의 능력이 증가하고, 사용할 수 있는 힘도 강해졌다.
‘문제는 그에 따른 부작용이라는 건데…….’
광폭화의 부작용.
사용자의 자아를 잠식하고, 광기에 빠져들게 하는 것.
윤재는 그 부작용이 신경 쓰였다.
‘광폭화의 효력이 끝난 뒤에도 그 영향이 남아 있다는 건, 부작용 역시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거지.’
노 페인, 노 게인(no pain, no gain).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대가가 따르는 법이었다. 윤재의 경우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많다고 봐야 할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갈피를 정확히 잡기가 어려웠다.
‘두고 봐야겠어.’
아무리 강한 힘이라 한들, 그것을 제대로 다룰 수 없다면 자신을 망칠 뿐이었다.
정규는 앞으로도 빠르게 강해질 여지가 큰 해당자였다. 그런 재능도 있었고, 입에서 나오는 불평불만과는 달리 끈기도 있었다.
그런 만큼 다룰 수 없는 아이템에 스스로 먹히도록 두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다. 윤재는 만약의 경우 정규가 무하마드를 놓도록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몸은 좀 어떻지?”
그때 넋이 나간 채 밤새 화롯불 앞에 앉아 있던 김진석이 윤재와 정규에게로 다가왔다.
“저요?”
“둘 다.”
“저는 괜찮아요. 이 붕대가 요란해서 그렇지, 움직일 만해요.”
“전 아직 좀 힘듭니다.”
팔을 과장스럽게 빙빙 돌리며 대답한 정규와는 달리, 윤재는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역행의 부작용이 심했던 모양입니다. 이번엔 낫는 데 조금 오래 걸리겠습니다.”
“얼마나?”
“사흘…… 아니, 이틀 정도?”
“그 정도면 완쾌되겠나?”
“꼬인 마력회로만 다시 돌아오면 몸의 부상은 스킬로 회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업고 다녀야 하나?”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그럼 바로 움직이지. 트룸으로 돌아간다.”
“급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윤재의 물음에 김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에밀리가 열쇠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건, 그녀에게 너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준 사람이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럴 만한 사람은 지금 시점에서 몇 명 없지.”
“역시…….”
“겐지, 그 녀석이다. 네 생각이 맞았다는 소리지.”
에밀리가 이곳에 나타났다는 건, 겐지에 의해 자신들의 위치가 노출되었다는 뜻이었다.
더 이상 이곳에 몸을 숨기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차라리 마천루 클랜에 몸을 의탁하는 게 훨씬 안전할 것이다.
‘위치가 생각보다 빨리 노출됐다.’
윤재는 에밀리와 겐지가 움직이기 시작한 시기가 생각 이상으로 빠르다고 느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에밀리가 움직인다면 자신이 노출될 걸 뻔히 알면서도 겐지가 섣부르게 움직였을 리 없었다. 그는 꽤 오랫동안 악마와의 끈을 숨겨 왔다.
‘그런데도 지금 모습을 드러낸다는 건…….’
윤재는 품 안의 일기를 옷 위로 쥐며 생각했다.
‘이건…… 너무 빨라.’
윤재와 정규, 김진석은 곧장 트룸으로 향했다.
광대한 도시인 트룸에는 수많은 해당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귀가 밝은 윤재와 정규, 김진석은 트룸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이 소곤거리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간밤에 난리도 아니었다는데?”
“간밤에? 밤 동안 뭔 일이 있었는데?”
“어제 점심부터 해서 새벽까지, 바라움에서 전쟁이 한바탕 일어났던 모양이야.”
“바라움이면 징거 클랜의 영역인데?”
“그래, 맞아. 그 징거 클랜과 마천루 클랜이…….”
속닥거리는 목소리들은 작았지만 어느 곳에서나 그 이야기였다. 그걸 듣느라 걸음을 조금 늦췄던 김진석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결국…… 이 녀석 말대로 일이 다 벌어졌군.’
징거 클랜과 후쿠시 겐지.
그들이 아르한을 불러냈고, 죽이려 했다.
다행히 아르한은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엘빈과 로이스를 비롯한 마천루 클랜의 간부와 클랜원들을 준비시켰고, 백천에게 연락을 취해 도움을 받았다.
세 사람은 대낮부터 주점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해당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겐지는 어떻게 됐는데?”
“아무리 대단해도 아르한과 백천, 두 사람 앞에서 별수 있겠어? 도망갔다나, 사로잡혔다나. 확실한 건 모르겠는데 전쟁은 마천루 클랜의 승리로 끝났나 보더라고.”
“젠장, 세상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려는 건지. 얼마 전까지는 머더러 클랜이 지랄이더니만.”
“에밀리도 아직 안 잡힌 마당 아냐. 언제 뭔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원. 우리 같은 놈들은 그냥 몸이나 잘 사리고 있자고.”
그렇게 말한 두 해당자는 맥주가 가득 찬 병을 부딪쳤다. 그리고 그다음 이어진 주제는 전혀 다른 잡담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어떻게 잘 넘어간 모양이네요.”
정규는 가슴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 역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속닥거림에 귀를 기울여 사건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들은 상태였다.
다행히도 승리한 쪽은 마천루 클랜이었고, 아르한 역시 살아 있는 듯했다.
“잘 넘어가긴 했어도…… 다행이라고 보긴 어렵지.”
정규의 말에 윤재는 고개를 저었다.
잘 넘어갔다는 말은 맞다고 쳐도, 지금 상황에 다행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네? 뭐가요?”
“후쿠시 겐지와 징거 클랜. 그들이 적으로 돌아섰다는 뜻이니까.”
“아마 징거 클랜 전체는 아닐 거다. 간부를 제외한 일반 해당자들 전체까지 연루되어 있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정체를 감추고 있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징거 클랜의 규모는 간부를 제외한 일반 해당자들까지 수만 명에 달했다.
그들 전부가 머더러 클랜이나 악마와 관련이 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마도 간부급 이상의 해당자들, 그들 사이에서 일이 계획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치명적인 일임에는 분명했다.
“애초에 이쪽 세상이 그렇죠. 실력 있는 랭커 해당자 한 명이 평범한 3, 4년 차 해당자 백 명보다 나으니까요.”
5대 클랜 중 하나인 징거 클랜의 간부라면 그 절반가량이 랭커, 못해도 준랭커에 달하는 실력자라고 봐야 한다.
사실상 그들의 전력이 징거 클랜 전체의 절반에 해당한다고 봐야 한다.
특히나 징거 클랜의 마스터인 후쿠시 겐지는 이면세계 전체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였다.
“뭐, 이미 일이 이렇게 된 것 어쩔 수 없지. 일단 가 보자고.”
소문만으로는 자세한 사정을 알기가 어려웠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당사자인 아르한이나 엘빈을 만나 봐야 알 일이었다.
잠시 멈추었던 걸음이 다시 빨라졌다. 마천루의 클랜 하우스는 워낙 높아서, 제법 멀리서부터 모습이 보였다.
“어?”
정규는 멀리 보이는 클랜 하우스에서 막 걸어 나오는 두 사람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 나오고 있는 사람들, 엘빈 씨랑 로이스 씨 아니에요?”
“맞는 것 같네.”
마침 엘빈과 로이스 역시 윤재와 다른 두 사람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엘빈과 로이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특히 로이스는 거의 뛰다시피 해서 윤재와 정규를 향해 다가왔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몸은요?”
로이스는 윤재와 정규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다급한 기색이 역력하게 묻어나 있었다.
“딱 보면 몰라? 둘 다 죽기 직전까지 갔네.”
그녀의 호들갑에 뒤늦게 걸어온 엘빈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로이스는 걱정이라고는 조금도 묻어나지 않은 엘빈의 말에 고개를 뒤로 돌려 버럭 소리쳤다.
“엘빈!”
“귀 아프다. 소리 지르지 말고.”
엘빈은 윤재와 정규의 상처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 있는 걸 보니 다행이군. 그 상처는 에밀리에게 당한 건가?”
“어떻게 아셨습니까?”
“후쿠시 겐지가 그러더군. 어제 그 녀석이 클랜장을 노리던 그 시각에 에밀리가 널 죽이러 갔을 거라고. 뭐, 보아하니 실패한 모양이지만 말이야.”
윤재와 정규의 상처를 보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 확실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윤재와 정규는 살아남았고, 두 사람은 김진석과 함께 트룸으로 돌아왔다.
그 말은 즉 윤재를 죽이려던 에밀리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뜻이었다.
“겐지는 어떻게 됐습니까?”
“뭐야. 대충 아는 눈치네?”
“오면서 소문을 들었습니다. 징거 클랜과 마천루 클랜이 부딪쳤다고요.”
“그거 소문 한번 빠르네. 맞다, 클랜장을 죽이려던 걸 어떻게든 막았지. 아니, 막은 게 아니라 징거 클랜은 지금 거의 반쯤 혼란 상태야. 위쪽의 해당자들이 악마와 붙어먹었으니 당연하지. 그리고…….”
엘빈은 짜증스레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겐지는 놓쳤어. 백천이 나타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더군.”
“아르한과 백천, 둘이서 겐지를 놓쳤다고?”
옆에 있던 김진석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겐지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아르한과 백천 역시 만만치 않았다. 사실상 세 사람 간의 실력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고 봐야 했다.
“뭐, 그렇게 됐습니다. 대신 팔 한 짝은 놓고 가더군요.”
“징거 클랜은 어떻게 됐지?”
“지금 어떻게든 다른 클랜에 협조를 구해서 수습에 들어갔습니다. 악마와 연루된 해당자와 그렇지 않은 해당자를 구분해 내는 작업을 가장 우선적으로 하는 중입니다.”
“다른 해당자들의 여론도 신경 써야 할 거다. 5대 클랜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결국 다시 예전 같은 무법지대가 될 뿐이니까.”
“그거야 높으신 머리 좋은 분들이 알아서 할 겁니다. 저는 몸으로 뛰는 쪽이라.”
“그래 보이는군.”
“그나저나 저희는 놓쳤다 치고, 그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에밀리는 도망친 겁니까? 아니면…….”
쉬-
엘빈은 김진석의 뒤에서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이상한 손짓을 보내는 정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정규만이 아니었다.
윤재 역시 무언의 눈짓을 보내며 고개를 저었다. 엘빈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물었다.
“뭐냐? 말로 해라.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이리 와, 이리.”
꽉-
“아, 아!”
로이스는 대뜸 엘빈의 귀를 잡아다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 머저리가, 눈치가 없어.”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왔던 방향 그대로 클랜 하우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지.”
김진석의 목소리가 아래로 잠겼다.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슬픔이 뼈에 사무치는 듯했다. 듣기만 해도 우울해지는 목소리였다.
“하아…….”
“엘빈 씨는 눈치 한 번 더럽게 없네요.”
정규는 로이스에게 귀를 잡힌 채 끌려가는 엘빈을 보며 말했다.
“저러니 아직도 연애를 못하지. 어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는 정규의 목소리에 엘빈의 표정이 돌변했다. 그는 로이스에게 귀를 잡힌 채 눈을 부릅뜨며 정규를 돌아보았다.
그 눈을 마주친 정규는 큰일 났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헐, 설마 들었나?”
“너나 잘해라. 네가 지금 남 연애사에 신경 쓸 때냐?”
“남 말하네. 형은요?”
코웃음을 치는 정규를 보며 윤재는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나 유부남이다. 딸도 있었어.”
“아, 맞다…….”
김진석은 윤재와 정규를 데리고 곧장 아르한이 있는 클랜 하우스의 가장 위층으로 향했다.
똑똑-
앞장서서 아르한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엘빈은 문을 작게 두드렸다. 하지만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안에 있는 거 맞나?”
“다른 데 가실 데가 없습니다.”
똑똑-
김진석의 물음에 엘빈은 다시금 문을 두드렸다. 대답은 뒤늦게 들려왔다.
“들어와.”
엘빈은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소파에 앉아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아르한의 모습이었다.
“……얼마나 드신 겁니까?”
“그냥, 좀 많이.”
“딱 봐도 많이 드셨습니다.”
엘빈은 혀를 차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 넓은 방 안이 온통 술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술병은 탁자 위에 가득 쌓여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바닥에까지도 굴러다니고 있었다.
‘전부 도수가 높은 술이군.’
윤재는 술병을 확인했다.
코끝을 살짝 가져가 냄새를 맡아 보니 주향이 코를 확 찌르고 들어왔다. 하나같이 보통 센 술이 아니었다.
‘취하기 위해 마신 건가?’
육체적인 능력이 강해지고, 회복력이 높아진 해당자들은 어지간히 독한 술이 아니고서는 거의 취하지 않는다.
40도가 넘는 독한 양주도 몇 병씩 비워야 겨우 취기가 돌 정도였다.
때문에 이면세계에서 술을 마시는 해당자들은 취하려 하기보다는 맛으로 마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지간히 마시지 않고서는 취기를 거의 느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널려 있는 술들은 그런 해당자들이 취기를 느낄 수 있도록, 기존보다 훨씬 독하게 만들어진 술들이었다.
맛보다는 취하기 위해 만든 술.
지금껏 아르한이 마시던 술과는 다른 종류였다.
하지만…….
“왔냐?”
아르한의 목소리는 취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윤재는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취할 리가 없지.’
애초에 이 술들의 도수는 일반 해당자들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해당자들이 취하지 않는 까닭은 보통 사람들보다 월등한 회복력에 있었다. 그리고 회복력은 해당자의 실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점점 강해진다.
아르한은 이면세계 내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
그런 그가, 취기를 느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상하지. 아무리 마셔도 마셔도 취하질 않으니.”
꿀꺽-
아르한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술을 마셨다.
입안에서는 독한 술 냄새를 뱉으면서도 얼굴과 목소리, 정신은 여느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넌 어떠냐? 진석아.”
마치 다 안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 물음에 김진석은 아르한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뭘 어때.”
꽈악-
그러고는 아르한의 멱살을 틀어잡고, 주먹을 위로 들어 올렸다.
“정신이나 차려라, 이 등신아.”
퍼억-!
김진석의 주먹에 얻어맞은 아르한의 몸이 무너져 바닥에 쓰러졌다.
마력을 담지 않은, 순수한 근력뿐인 주먹이었다. 죽어라 세게 친 것도 아닌지라 그리 아플 것은 없었다.
아르한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멍하니 김진석을 바라보았다. 김진석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아르한을 바라보았다.
“지금이 궁상이나 떨고 있을 때냐?”
“생각보다 넌 괜찮은가 보다?”
김진석은 아르한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에밀리를 잃은 것처럼, 그 역시 겐지의 배신이 뼈 아팠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겐지를 비롯한 자신들은 이 세상에 몇 안 되는 친구일 테니까.
“괜찮아 보이냐?”
김진석의 물음에 아르한은 그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르한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정신 차려야지. 그냥 이게 뭔가 싶어서 궁상 짓 좀 했다.”
“살아야지.”
김진석은 그렇게 말하며 아르한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르한은 그 손을 잡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먼지가 묻은 옷을 툭툭 털어 내며 말했다.
“그래, 그래야지.”
아르한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김진석은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너한테는 매가 약이다.”
“그만 때려라. 애냐? 주먹부터 나가게.”
“정신 못 차리면 맞아야지.”
“알았다. 정신 차리마.”
아르한은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뭐 이리들 우르르 몰려왔어? 뭐 생존신고라도 하려고 왔나?”
아르한은 한 손으로 윤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녀석 말고는 다 나가 봐. 할 이야기 있는 사람은 나중에 하고.”
“나도?”
“그래, 너도. 백천 녀석이 1층에 있으니까 그 녀석과 놀고 있던지. 아마 그 녀석도 나와 똑같은 상태일 거다.”
가서 쥐어박아 주고 와, 아르한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휙휙 저었다.
가장 먼저 김진석이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아르한의 말대로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서 있지 말고 앉아라. 자리가 좀 지저분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