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4화 (154/166)

그는 지금,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고 있었다. 아니, 예상하지 못했다기보다는 예상했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벌써 조각을 저 정도까지 다룬다고?’

녀석이 이쪽으로 넘어온 건 불과 6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용이 거짓을 말했을 리는 없었다. 그들은 분명 자신의 편이었으니까.

더군다나 모든 조각을 모은 건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가장 경계해야 할 ‘힘의 조각’을 다루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그 자하르조차도 저것을 다루기까지는 십 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발록은 윤재가 힘의 조각을 다룰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자하르 녀석…….’

수많은 분신들 사이에서, 발록은 이를 갈았다.

저 녀석에게 지금과 같은 작전을 알려 준 존재는 두말할 것도 없이 자하르였다. 그는 수백 년 전, 윤재와 똑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봉인했다.

서걱, 서걱-

푸아아악-!

수많은 분신들이 윤재의 손에 쓰러졌다. 그들은 자신과는 다른 자의식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발록이라는 거대한 그릇 안에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생명들.

죄악과 욕망, 거짓으로 나누어진 분신들은 같은 모습과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목적은 하나였다. 보다 큰 힘을 가져, 이 거대한 그릇을 차지하려는 것이다.

그중 발록이라는 거대한 그릇을 차지하고 있던 존재는 바로 자신이었다.

“내어 줄 수 없다!”

다시 그 끔찍하고 지루한 수백 년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반드시 저 조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성배를 손에 쥐고 말 것이다. 발록은 그렇게 생각하며 윤재를 향해 달려들었다.

“성배는, 내 것이……!”

스악-

발록은 눈앞에서 윤재가 사라졌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가 고개를 뒤로 돌리는 순간.

푸아아악-!

발록의 몸이 갈기갈기 베어지며 그 몸이 조각조각 흩어졌다. 윤재는 발록의 목소리에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뭐래…….”

한동안 참고 있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수천 마리의 분신들을 베어 내며, 윤재는 단 열 번도 호흡하지 않았다. 그만큼 급박하게 움직인 것이다.

한 호흡, 한 호흡을 내뱉을 때마다 움직임이 더뎌진다. 짧게 숨을 내뱉고 들이쉬는 시간조차도 아까웠다.

“진짜…… 더럽게 많네.”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분신들은 무수히 많았고, 그곳에 도착하기까지는 아직 거리가 남아 있었다.

녀석들은 죽기 살기로 심장을 보호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저 심장이 바로 자신들의 근원이며, 힘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달려들어야 하나?’

문득 떠오른 생각에 윤재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무모한 일이었다. 저 많은 수의 분신들을 뚫고 도달하기에는 거리가 짧지 않았다. 가던 중에 눈먼 공격에 얻어맞기라도 하면 최악의 상황이 나올 수 있었다.

우득-

“크음…….”

무엇보다 지금, 자신의 몸 상태가 썩 좋지 못했다.

힘의 조각은 점점 더 크게 날뛰었다. 온몸에 전해진 기운은 뼈를 뒤틀고, 살을 찢었다. 그것은 생명의 조각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과유불급이었다.

힘이 너무 과한 나머지, 몸이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몸이 닳고 부서지는 속도에 맞춰 생명의 조각을 이용하던 것인데, 한계가 존재했다.

‘몸을 망치지 않고 힘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한 건가?’

아니, 불가능하지 않다.

다만 문제는 자신에게 있었다.

‘아직까지 날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겠지.’

힘의 조각은 아직까지 윤재에게 완전히 동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살살 달래려고 해도 말을 듣지 않고, 네까짓 게 감히 나를 다루려 하냐고 으스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팍-

윤재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언제는 몸을 아끼며 싸웠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숱하게 자신의 몸을 망치며 싸워 온 윤재였다.

쉬익, 쉬이이이이익-

촤악-!

수많은 분신들의 사이로 선을 만들고, 그 선을 따라 움직이며 검을 휘두른다. 피분수가 위로 솟구치고, 그 피들이 아래로 떨어지기 전에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갔다.

꾸륵, 꾸르르륵-

발록의 몸이 다시금 살점을 가지고 나타났다. 곧 원래의 형상을 갖춘 발록은 심장의 앞에 바로 섰다.

곧이어 그의 눈에 멀리서 분신들을 베어 넘기며 다가오고 있는 윤재의 모습이 보였다.

‘뭔가 잘못되었다.’

불과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조각의 힘을 저기까지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발록은 조각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다. 다만, 용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있었다.

-조각의 종류는 세 가지입니다. 힘과 시간, 그리고 생명. 이렇게 있지요.

조각에 대한 설명에 발록은 실로 그것이 탐이 났다. 힘과 시간, 생명을 다루는 힘이라니. 그 얼마나 달콤하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을 다루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역대 군주들 가운데, 조각을 완벽하게 다룬 군주는 드뭅니다. 당장 자하르께서만 하더라도 조각을 다루기까지 십 년이 넘게 걸리셨으니까요.

십 년.

인간에게 있어서 그것은 상당히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수없이 오랜 시간을 살아온 발록에게 있어서 그것은 찰나나 다름이 없었다.

하물며 윤재는 모든 조각을 가지게 된 것이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얼마 전의 일이라고 했다. 발록은 그가 조각의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고, 그 부작용 역시 알고 있었다.

‘힘의 조각은 사용자의 의지를 거부하고, 그 힘을 빌려주는 대가로 그 육체를 갉아먹는다. 분명 그렇게 들었는데…….’

그런데 뭐란 말인가?

윤재는 지금, 지친 기색은 있을지언정 몸이 그렇게 망가진 듯한 모습은 아니었다.

차라리 처음이 훨씬 힘들어 보였다. 오히려 윤재의 안색에는 점차 활력이 돌고 있었다.

무아지경에 빠져들어 있는 윤재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조각은 발록과 싸우면서 점차 자신과 동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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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아아아-

화악-!

거대한 붉은 불길과 검은 불길이 부딪혔다. 두 불길은 서로 반대되는 상대의 힘을 잡아먹으려 입을 벌리고, 더욱 불길을 거세게 키웠다.

“크으…….”

검은 불길의 주인, 벨제뷔트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손톱을 쫙 벌리며 크게 휘둘렀다.

쫘아악-!

허공에 다섯 줄기의 검은 자국이 생겨났다.

마치 공간을 베어 낸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벨제뷔트의 눈앞에서 미카엘의 몸도 다섯 등분으로 베어졌다.

하지만 벨제뷔트는 그것이 눈으로 보이는 착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고개를 휙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콰아아아-!

“커억!”

미카엘이 휘두른 염령검이 벨제뷔트의 몸을 휩쓸었다.

붉은 불길이 벨제뷔트의 몸을 검게 태웠다. 벨제뷔트는 있는 힘을 다 끌어올려 그 힘을 버텨 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벨제뷔트의 눈에 초점이 풀어졌다. 그는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털썩-

“후욱, 훅-”

미카엘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염령검을 바닥에 꽂으며 겨우 섰다.

아슬아슬한 차이였다.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은 이런 때 꼭 어울리겠다 싶었다.

결국 승리한 쪽은 자신이었다. 천사들의 대표와 악마들의 대표로서 싸운 것이라고 보면, 꽤 자랑스러운 승리라고 할 수 있었다.

‘대충 정리가 되어 가는군.’

벨제뷔트를 쓰러뜨린 미카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간들 쪽과 악마들 쪽이 싸우고 있었다. 수많은 군장급 악마들을 밀어붙이고 있는 아르한과 백천, 그리고 자신과 함께 온 아나엘이 보였다.

천사들의 합류로 싸움은 급격하게 기울었다.

물론 악마들이 여기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산개한 악마들은 인간들의 땅 곳곳으로 흩어졌다. 다른 천사들은 놈들을 잡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적어도 이쪽 싸움은 승기를 확실하게 잡은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벨제뷔트가 죽었으니, 아마도 이제는 그것이 더욱 확실해질 것이다.

‘문제는 저쪽.’

콰앙, 쿠구구구-

멀리서 느껴지는 거대하고 불길한 기운.

거리가 꽤 있었음에도 무척이나 선명하게 느껴졌다. 멀리 하늘과 맞닿아 있는 거대한 형체가 보이기도 했다.

‘대체 얼마나 거대한 건지…….’

저만한 덩치라면 그랜드 마운틴을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일 것이다. 천계에도 수많은 생명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맹세코 저 정도 덩치를 가진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녀석은 단순히 덩치만 큰 게 아니었다. 거리가 이만큼 떨어져 있음에도 몸이 저려 올 정도로, 녀석의 기운은 끔찍이도 불길했다.

‘발록이라고 했나?’

녀석과 싸우고 있는 인간들 쪽 해당자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열쇠였고, 하나는 자신과 대등하게 싸운 인간이었다. 그들 다섯에 의해 천사들 쪽 도시 하나가 붕괴되고, 천왕과 대천사장이 죽었다.

실로 대단한 업적이다.

하지만 미카엘은 그들이 저기 있는 생명체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발록은 그만한 존재였다.

‘다른 건 몰라도…….’

천왕과 대천사장을 죽이고, 수많은 평천사들을 죽인 인간들.

그들에 대한 미움이 아직 속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미카엘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 녀석이 이 싸움에서 살아남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수많은 죄악과 욕망,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들의 덩어리.

모든 악마들의 정점이자, 오래전부터 천사들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적으로 알려져 있던 존재.

발록.

그가 이 전쟁의 최후의 승자가 되는 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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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 뚜둑-

또옥- 철퍽-

윤재의 몸에서 피가 떨어져 바닥에 번졌다. 비틀거리며 움직인 윤재는 바닥에 고여 있는 피 웅덩이를 바라보았다.

‘언제…….’

언제 이렇게 피가 흘렀지?

분신들의 피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피도 더러 섞여 있었다.

하긴, 그럴 만하다.

찢어진 피부는 더 이상 재생이 되지 않고 있었다. 조각의 힘을 무분별하게 남발한 탓이었다.

‘숫자가 이렇게 많은 줄 알았나.’

분신들의 시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놈들은 죽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살아났다.

질기고 지독하다.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베고, 또 베면서 윤재는 기어이 심장에 가까이 도착할 수 있었다.

“……한계일 텐데?”

발록이 물었다.

녀석은 윤재를 경계하고 있었다. 윤재는 그의 두려움을 표정에서 읽었다.

“그러기를 바라는 거겠지.”

다 안다는 듯한 윤재의 대답에 발록의 얼굴이 보기 흉할 만큼 일그러졌다.

“감히…….”

“감히라는 말은…….”

촤아악-!

윤재는 다시 한 번, 발록의 몸을 베어 넘겼다. 벌써 세 번째 일이었다.

“너보다 약한 녀석에게나 하고.”

툭, 투둑-

베어진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윤재는 휘청거리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턱-

손끝에 단단한 벽이 닿았다. 벽은 일정한 주기로 쿵쾅거렸다.

발록의 심장이었다.

‘닿았다.’

윤재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수많은 분신들이 다시 재생되어 있었다. 그들은 윤재를 향해 흉흉한 눈빛을 내뿜으며 달려들었다.

“안 돼!”

“막아!”

“죽여 버려어어어-!”

화아아악-!

사방에서 덮쳐 오는 분신들을 바라보는 윤재의 눈에는 힘이 없었다. 너무 많은 피를 흘린 탓이었다.

‘그래도…….’

핏, 피핏-

피피피픽-

윤재를 향해 달려들던 분신들의 몸에 가느다란 선이 생겨났다. 윤재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보험을 들어 두길 잘했지.”

촤아아아악-!

분신들의 몸이 동시에 베어졌다. 수십, 수백 갈래로 베어지고 핏물이 위에서 비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윤재는 그 피를 피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피할 힘이 없었다.

“후우우-”

윤재는 길게 숨을 내쉬며 심장에 양손을 가져갔다. 지치고 힘들지만, 할 일은 마무리 지어야 한다.

-심장에 도착하게 되면, 이걸 써.

-이게 뭡니까?

-지금부터 보여 주마. 너라면 아마 며칠 안에 배울 수 있을 거다. 어려운 기술은 아니니까.

촤륵, 촤르르륵-

심장에 맞대고 있는 윤재의 손아귀 안에서 기다란 사슬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빠르게 심장을 감싸기 시작했다. 사슬은 순식간에 심장을 뒤덮고, 점차 그 두께가 두꺼워지기 시작했다.

-봉인 계통의 마력 컨트롤이다. 이 흐름을 잘 기억해. 마력뿐만이 아니라 조각을 이용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힘을 구현할 수 있다는 걸 알아 두고.

-봉인 계통의 컨트롤? 그런 것도 있습니까?

-아마 잘 모를 거다. 이런 종류의 기술은 거의 익히지 않고, 익히더라도 쓰질 않거든. 적이 있으면 죽여야지, 뭐하러 봉인을 해. 안 그래?

맞는 말이었다.

물론, 이런 경우는 해당이 되지 않지만.

-마력의 사슬은 주입하는 마력과 기운의 양에 비례해 길고 굵어진다. 아쉽지만 너는 나처럼 특정한 스킬을 배운 게 아니라서 효율은 떨어질 거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어쩔 수 있나? 양으로 때우는 수밖에. 조각을 믿어 봐, 한 번. 어린애처럼 제멋대로인 녀석이긴 하지만, 비교적 너는 잘 따르는 것 같더라고.

일종의 도박이었다.

조각의 힘을 어디까지 끌어낼 수 있는지, 지금부터는 그것이 관건이었다.

자하르는 봉인 계통의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보다 적은 힘으로도 큰 효율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반면, 윤재에게는 그런 스킬이 없었다. 스킬은 누군가 가르쳐 준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윤재는 결국 자하르가 가르쳐 준 마력 컨트롤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제발, 제발…….’

찍, 찌이이익-

피부가 갈라지고, 피가 역류했다.

힘의 조각은 윤재의 의지를 받아 더욱더 큰 힘을 이끌어 냈다. 하지만 그럼에 따라 더더욱 큰 고통도 선사했다.

으득-

윤재는 이를 악물었다.

제발, 그 말만 속으로 되풀이했다.

베어진 발록의 분신들이 다시금 살아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여기서 이 녀석을 잡아야 한다.’

기회는 더 없었다.

반드시 해낸다. 윤재는 금방이라도 몸이 찢겨지고 터져 나갈 것 같은 상황에서도 힘을 끌어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뭘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지?

생전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아니, 그것이 목소리인지도 알 수 없었다. 고저는 물론이고, 색깔도 없는 소리였다.

윤재는 눈을 번쩍 뜨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너, 그러다 죽는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짓궂은 말투였다.

윤재는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차렸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걸 보면…….

‘조각?’

조각이 말을 건다?

이런 경우는 자하르에게도 듣지 못했다. 그는 몇 번씩 조각과 성배가 어린아이 같다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실제로 그 목소리를 들었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래, 맞아. 얼른 대답이나 해.

‘뭘 위해서냐고? 뭘…….’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걸까?

생각도 잠시, 윤재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적어도 내 목숨보다는 백 배, 만 배는 소중한 것을 위해서지.’

가족이라는 단순한 대답보다는 이게 더 이해하기가 쉬울 거라 생각했다.

가족이란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의미일 수도, 누군가에게는 세상 전부보다도 소중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윤재에게 있어서는 당연히 후자였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이 목숨 따위, 몇백 번이고 버릴 수 있다. 각오는 집념이 되고, 그 집념은 고통 따위는 아득히 넘어선 지 오래였다.

스, 스으으-

윤재의 몸에 상처들이 빠르게 회복되었다.

역류하던 피도 다시 안정을 찾았다. 더불어 족쇄를 통해 증폭되던 조각의 기운이 더욱 강해지고, 마력의 사슬이 몇 배는 더 두꺼워졌다.

세 개의 조각 중 하나.

생명.

그것은 모든 생명의 힘을

-너는 여기서 죽기는 아직 아까워.

그것참 고마운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듣기 좋은 칭찬에 귀를 기울일 때가 아니었다. 몸이 회복된 윤재는 힘을 끌어내는 데 집중했다.

이윽고 윤재의 손에서 시작된 사슬이 거대한 발록의 심장을 모두 움켜쥐었다.

촤르르르륵-

꽈아악-

“아, 아아아아악-!”

“으아아아-!”

사슬이 조여들기 시작하자, 윤재의 뒤를 덮쳐 오던 발록의 분신들이 비명을 질렀다.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덜덜 떨며 바닥을 뒹군다. 몸이 녹아내리거나 사지가 비틀리기도 했다.

그들의 근원이 되는 힘.

심장이 조여들며 그 안에 있던 힘들이 구속되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점차 멎어 들고 이내 그 안에서 뿜어지던 검은 기류 또한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었다.

분신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물에 빠져 숨을 쉬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윤재는 그들의 반응을 살피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됐…… 다…….”

이것으로 발록의 힘은 봉인되었다.

녀석은 더 이상 지금과 같은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남은 건 껍데기뿐인 자의식과 거대한 몸뚱이뿐이었다.

잠시 자리에 주저앉아 있던 윤재는 검을 바닥에 박아넣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제…….’

마무리만 남아 있었다.

윤재는 걸음을 옮겼다. 서둘러 밖으로 나가야 한다. 나가서, 정규를 비롯한 다른 일행을 도와야 한다.

휘청-

순간 몸 안의 힘이 쭉 빠져나갔다. 눈앞이 흐려지고 의식이 멀어진다.

‘안 돼…….’

이미 무리를 했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정신을 잃고 쓰러질 순 없었다. 아직 쓰러질 때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벌써 세 번째였다.

‘아직…… 아직…….’

풀썩-

무릎이 꺾어지고, 바닥에 몸이 붙었다. 더 이상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문득 조각이 걸어온 질문이 떠올랐다.

-뭘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지?

뭘 위해서냐고?

뒤늦게 떠오른 대답을 내놓기도 전에 윤재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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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나는 황급히 병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간호사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간호사는 침실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은경이에게 수액을 놓아 주고 있었다. 나는 뛰다시피 그녀에게 다가갔다.

“괘, 괘, 괜찮아?”

나답지 않게 목소리가 떨려서 나왔다. 이렇게 긴장되고 떨리는 건,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 이후 맹세코 처음이었다.

출산의 고통이라는 말이 있다. 여자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나는 그 순간 그녀와 함께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제길, 옆에 있어 주지 못했다. 배 속의 아기는 나를 기다리기가 싫었던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회사에 있을 때…….

그녀의 얼굴색은 창백할 만큼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는지 알 수 있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표정은 웃고 있었다.

“괜찮아. 나보다는 윤재 네가 힘들어 보이는데? 뛰어왔어?”

그렇게 말하는 은경이의 표정은 밝았다.

나는 그녀의 고통을 알지 못했다. 아마도 나를 위해 저렇게 말해 주는 거겠지.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언제나 자신보다는 나를 위하고, 아프고 힘든 소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는.

미안했다. 그녀의 아픔을 함께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만삭의 그녀 옆에 꼭 붙어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미안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던 때, 내 눈에 작은 천사가 들어왔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가는 바로 내…….

“민…… 아?”

……딸이었다.

은경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나는 뒤늦게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 그녀가 딸아이를 안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은경이는 여전히 웃으며 “안아 볼래?” 하며 물었다. 간호사는 그녀에게 딸아이를 받아들어 조심스럽게 내 품으로 옮겨 주었다.

폭, 작은 아이가 내 품에 안겼다. 불편한지 몸을 꿈틀거린다.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하고 행복한 감정들이 속에서 파도쳤다.

“민아, 민아…….”

혹시라도 떨어뜨릴세라, 안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옆에 있던 간호사가 급히 말했다.

“너무 힘줘서 안으시면 안 돼요.”

“아, 아! 네. 죄송합니다.”

“그렇게 좋아?”

당황하는 내 모습을 보며 은경이는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 웃었다. 얼굴색은 창백했는데, 표정은 너무 좋아 보였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좋냐고?

그럼, 당연하지.

어떻게 좋지 않을 수 있을까? 이 감정을 그녀에게 전해 주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거겠지.

품 안에 있는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민아.

내 딸.

세상 모든 아이들이 귀엽고 사랑스럽다지만, 이 아이는 그중서도 가장 특별하게 느껴졌다. 내 핏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랑 끝에 맺은 결실.

크나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손에 들어간 힘이 다시 세졌다. 울컥 속에서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감사합니다.

누구에게인지 모를 말을 속으로 전했다. 나는 아이를 안아 든 채, 고개를 숙이고 울었다.

바로 그때였다.

“응애―!”

아차.

민아가 잠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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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신을 잃었나?

윤재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잠시 멍한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꾸는 꿈이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이런 꿈을 꾸지 않았는데.

처음 민아를 만났을 때의 꿈이었다. 그때 은경이의 표정과 감정,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의 촉감과 벅참, 그 모든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잠시지만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곧이어 윤재는 감성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자리에 서자, 몸이 가벼워진 것이 느껴졌다.

몸속에서 요란스럽게 날뛰던 힘이 잠잠해졌다.

사라진 건 아니었다.

천방지축 어린아이 같던 힘의 조각이 얌전해진 것이다. 더불어 윤재의 몸을 회복시키고 활력을 북돋던 또 다른 생명의 조각은 더욱 활기를 찾았다.

‘언제 이렇게 됐지?’

그렇게 노력할 때는 생각처럼 잘 따르지 않던 녀석들이었다.

그런데 잠시 자고 일어났더니, 온순한 양처럼 변해 있었다. 나쁜 건 없지만 갑작스러운 변화가 낯설었다.

순간, 쓰러지기 전 조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고 했나?’

조금 무서운 말이었다.

마치 죽을 때를 기다린다는 말 같았다.

의미심장한 말이지만 윤재는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각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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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는 발록과 거리를 벌린 채 서 있었다. 검끝은 여전히 발록에게로 겨눠져 있었고, 마력을 주입해 날을 벼리고 긴장한 상태였다.

다른 이들도 다르지 않았다.

로이스는 언제든지 다른 일행을 보호할 수 있도록 마력을 잔뜩 끌어올렸다. 엘빈과 김진석은 정규와 일정 거리를 벌린 채 서로를 보조할 수 있도록 포지션을 맡았다.

네 사람은 이 상태로 꽤 오랫동안 서 있었다.

“……역시, 멈춘 것 같죠?”

“그래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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