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4 page. 1 그 여자의 사정 =========================
릴리는 평소보다 폼을 재며 작업에 임했다. 오늘은 관객이 있다. 그것도 디저트 만드는 것을 처음 본다며 기대를 품은 관객이.
우선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올렸다. 약간의 사심을 담아 광택이 도드라지는 진주 머리끈으로. 거기에 순백의 앞치마를 걸치면 준비 끝.
메뉴는 애플시나몬케이크와 에그노그.
애플시나몬케이크는 어른의 입맛에 잘 맞는 케이크다. 한 입 베어 물면 은은한 시나몬 향이 입 안 가득 퍼지며, 달콤하게 씹히는 사과조림은 생각만으로도 즐겁다.
릴리는 프란시스의 시선을 의식하며 체로 밀가루를 거르고 사과를 얇게 썰었다. 반죽을 만들고 케이크 팬에 담아 모양을 다듬었다.
“이제 오븐에 구울게요.”
오븐에 들어간 케이크는 향긋한 냄새를 풍겼다. 반투명한 유리 너머로 케이크가 푹신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는 음료수 차례예요.”
“에그노그가 뭔가 했더니 음료수였군요?”
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란을 깨 노란자만 건졌다. 에그노그는 우유를 중심으로 한 칵테일. 일반적으로 추운 계절에 마시지만 그녀는 평소에도 즐겨 마셨다.
“알콜 괜찮아요?”
“저는 괜찮습니다만, 릴리 양은?”
“후후, 저는 주당이랍니다.”
프란시스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굳이 진짜냐고 묻거나 쓸데없는 농담을 덧붙이지 않았다. 릴리는 그 적당한 거리감이 마음에 들었다.
주당이라고 말하면 진짜냐며 확인 해보자고 술을 들이미는 사람도 있고, 여자가 술을 잘 마셔서 뭐가 좋냐며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었다. 세상에는 이상한 사람이 많지만 다행히 멀쩡한 사람도 있다.
베이스는 브랜디와 럼 약간. 계란 노른자와 설탕을 함께 셰이커에 넣고 세게 흔든다. 쉐킷쉐킷! 잘 섞였는지 확인하고 우유를 넣고 가볍게 저었다.
“음, 그건 뭡니까?”
“육두구요. 우유랑 계란 냄새를 잡아준답니다.”
육두구를 치면 완성. 언뜻 보면 밀크티처럼 보이는 그것은 부드러운 목넘김과 달콤함이 훌륭하다.
띵, 하고 오븐이 끝을 알려왔다. 릴리는 갓 구워 따끈한 케이크를 잠시 식힌 뒤, 적당한 크기로 잘랐다.
“페튼 아주머니 몫도 남겨둘게요.”
“실은 제가 뭔가 얻어오지 않을까하고 기대하시는 눈치셨습니다.”
“그분은 예전부터 저희 가게의 단골 손님이셨거든요.”
애플시나몬케이크 한 조각과 에그노그 한 잔. 각자의 몫을 가지런히 놓았다. 아직 어수선해서 우아한 디저트 타임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새하얀 배경에 둘러싸인 것은 색다른 분위기를 선사했다.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한 입 들이킨다. 달콤한 향과 알싸한 알콜은 조합이 썩 괜찮다. 릴리는 케이크를 포크로 작게 잘라 먹었다.
“릴리 양.”
“네?”
알콜이 들어가 발그레한 뺨에 시선이 닿았다. 관찰하는 듯한, 그것은 찬찬히 내려가 입술에서 멈췄다.
“입에, 케이크 가루가 묻었습니다.”
이런.
릴리가 손을 입가로 가져가는데 프란시스가 손수건을 건넸다. 특색 없는 흰 손수건이지만 만져보니 재질이 좋았다. 프란시스 부자설에 설득력이 더해졌다.
“계속 도움만 받네요.”
“뭐 어떻습니까. 손수건도 제 호주머니에 있는 것보다 릴리 양을 돕는 것이 더 기쁠 겁니다.”
“말씀도 참.”
프란시스는 애플시나몬케이크를 잘 먹었다. 금방 한 접시를 비워 릴리가 한 조각을 더 내주었다.
“많이 드세요. 오늘 수고 많이 하셨잖아요.”
“수도에서 먹었던 케이크보다 더 맛있군요. 디저트샵은 잘 될 겁니다.”
“프란시스 씨는 수도에서 오셨군요?”
생각을 거치지 않고 반사적으로 튀어나간 질문. 프란시스는 잠시 멈칫하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수도에는 많은 디저트샵이 있다고 들었어요.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곳도 있다던가. 그런 곳과 견줄 수 있는 가게가 되면 좋겠어요.”
그렇게 돼서 아버지가 남긴 1억 골드의 빚을 청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말인데.”
“?”
“가게 이름이 뭡니까?”
“케…켁, 쿨럭!”
릴리는 입 안의 에그노그를 뿜을 뻔했다.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은 것이 신의 한 수였다.
“괜찮습니까?”
“……네에, 괜찮고말고요.”
실은 괜찮지 않았다. 릴리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잊고 있었으니까.
가게 이름, 뭐하지?
릴리는 아버지의 베이커리를 도왔지만 경영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경영은 사업이다. 단순히 빵을 잘 굽고 디저트를 맛있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사실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그럼 예전의 이름은 뭐였습니까?”
“음, 그건…….”
“말하기 곤란하다면 됐습니다.”
릴리는 헛웃음을 지었다. 실은 그녀는 가게의 이름을 일부로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작명 센스도 형편없었다.
이름하여 릴리 아빠네 베이커리.
‘……어떻게 저런 이름을 지을 수가 있지?’
그래서 늘 축약해서 베이커리라고 불렀다. 손님들도 풀네임이 웃겼는지 베이커리라고만 했고.
“수도의 디저트샵은 어떤 이름이 있나요?”
“릴리 양이 언급한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그곳은 라튤립입니다. 그 외에 과일 타르트가 유명한 시트러스, 아이싱 쿠키가 유명한 메리봉봉…….”
가지각색의 이름이 있었다. 모두 저마다의 특색을 갖고 있겠지. 릴리는 턱을 괴고 멍한 시선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보이는 것은 새하얀 벽. 티 없는 백색은 고고하고 우아하다. 그 어떤 것도 포용할 수 있는, 그런 느낌.
“블랑슈…….”
블랑슈, 어떤 나라에서 백색을 뜻하는 단어다. 육성으로 발음해보자 입에 착 붙었고 뜻도 가게의 이미지와 어울렸다.
“어때요, 블랑슈?”
“잘 어울리는군요. 이 백색의 가게와.”
프란시스도 긍정했다. 이름이 정해지자 벌써부터 성공가도에 오른 듯 마음이 들떴다. 릴리는 에그노그를 한잔씩 더 따랐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챵! 유리잔이 시원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시작이 좋았다. 목표는 1억 골드, 빚 청산! 기분 좋게 취한 릴리는 미소를 흘렸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
주말을 꼬박 리뉴얼 준비로 보낸 릴리는 마지막 점검을 위해 가게를 천천히 살폈다.
블랑슈는 크게 세 곳으로 나뉜다. 빵을 굽고 디저트를 만드는 작업실, 이를 진열할 곳, 좌식이 있는 테라스.
작업실은 통유리로 막아 손님들이 작업 과정을 구경할 수 있도록 했다. 디저트는 입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도 보고, 코로 향긋함을 느껴야 비로소 완성된다.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디저트를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카운터는 흰 타일로 덮되 윗부분은 원래의 나무 부분을 남겨 두었다. 그 옆에 케이크며 초콜릿 같은 신선함이 요구되는 품목이 케이스에 담겨있다.
그 앞 왼쪽 사이드에는 패스츄리나 파이 같은 빵 종류가, 오른쪽 사이드에는 테이블이 있는 테라스로 이어진다. 협소하지만 정원을 꾸며 전망도 훌륭하다. 한 가운데는 쿠키나 머핀 등의 구움 과자가 차지했다. 한 눈에 보면 그런대로 밸런스가 잘 맞았다.
“좋아, 완벽해.”
준비는 완벽하다. 릴리는 입간판까지 세우고 손님을 기다렸다.
“역시 릴리의 패스츄리가 최고야. 역시 맛있어. 주말 내내 이 맛을 기다렸다니까?”
1등으로 와서 패스츄리를 사간 페튼 아주머니.
“사과 파이 받으러 왔어요!”
플리마켓 때 옷의 교환품을 받으러 온 소년.
“이 마들렌, 레몬향이 향긋하네. 차랑 먹으면 딱이겠어.”
산책하다 들른 여자가 한 명.
…….
………….
…………….
조용하다. 한적하다……지루하다.
발길이 뚝 끊겼다. 분명 페튼 아주머니의 성격상 동네방네 소문을 퍼뜨렸을 텐데? 릴리는 카운터에 몸을 기댄 채 생각에 잠겼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해.’
하지만 릴리는 그 문제가 무엇인지 영 알 수가 없었다.
“원래 아버지가 운영할 때도 잘 되는 가게는 아니었지. 재오픈을 기다린 사람은 적을 거야. 으음……. 그래도 개업 특수라는 게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파리만 날려서야 빚 청산은커녕 거기에 한 술 더 얹게 될 뿐이다.
“이래선 곤란해.”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딸랑 하고 입구의 풍경이 청명한 소리를 냈다. 릴리는 환한 미소로 인사하며 손님을 살폈다.
“……앗, 프란시스 씨?”
“가게는 잘……됩니까?”
“보시다시피…….”
프란시스가 헛기침을 했다. 그도 눈이 있으니 사태 파악이 어렵지 않겠지. 이런 상황이니 그도 말을 잇기가 난감한 모양이었다.
“디저트가 진열되니 분위기가 좋군요. 화사하고.”
어색함은 칭찬으로 무마했다. 하지만 그건 순간이었다.
“어쩌죠, 프란시스 씨. 손님이 없어요.”
“……이곳이 구석이기는 합니다. 상점이 밀집되어 있다지만 구석이라 특별한 목적이 없다면 발을 딛기 힘들죠.”
딜카넬드에는 상점가가 크게 두 곳 있다. 한 곳은 고급 상점가, 또 하나는 일반 상점가. 블랑슈는 후자에 속해 있었다. 그것도 끄트머리에.
가게세가 저렴하다는 장점은 있지만 프란시스의 말대로 구태여 발걸음하기 애매한 위치라는, 모든 장점을 상쇄시킬 단점이 있었다.
“더군다나 이런 디저트는 부유한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고급 상점가에 있는 쪽이 더 유리하겠죠.”
“음…….”
“하지만 가게 위치를 쉽게 바꿀 순 없겠지요. 그럼 손님을 이쪽으로 오게 할 메리트를 만들어야겠군요.”
“어떻게요?”
“그 방법은 릴리 양이 알려준 겁니다.”
프란시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무슨 방안이라도 있는 걸까?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0^
+ 11.06
uykari님 조언 감사합니다!
+ 11.07
헤롱2님 오타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정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