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4 page. 9 여름 축제上 =========================
촉촉하고 부드러운 스펀지케이크에 최고급 우유로 만든 크림을 터질 듯이 얹는다. 스페츌러로 얇게 펴 발라 모양을 정돈하고, 안쪽부터 동글게 말아 차갑게 식힌다.
중요한 것은 시트는 얇게, 크림은 많게. 릴리가 롤케이크를 만들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었다.
“모양이 좀 심심하지 않습니까?”
“전 롤케이크만은 심플한 게 좋거든요. 모양은 심심해도 맛은 그렇지 않을걸요?”
릴리는 자신 있게 말하며 롤케이크를 잘라 그릇에 담았다. 물방울 모양의 산뜻한 도자기 그릇에 살짝 삐딱하게 얹자 느낌이 꽤 괜찮았다.
“…음, 확실히 우유 크림이 진하면서도 깔끔하군요.”
“그렇죠? 프란시스가 크림 만들기에 능숙해진 것도 한몫해요.”
프란시스는 손재주가 부족해서 릴리의 1대 1 교육에도 디저트를 만들진 못했지만 머랭을 치거나 크림을 만드는 부수적인 역할은 기꺼이 해냈다.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머랭을 칠 때마다 쫀쫀하지 않고 힘없이 푹 꺼졌던 것이 어제 같건만. 디저트샵 아르바이트 몇 달이면 초심자도 머랭은 친다.
“사실 디저트 종류가 늘어나면서 힘에 부치던 참인데 잘 됐어요.”
릴리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쭉 뻗었다. 작업도 마무리됐겠다, 피크 타임도 지났겠다, 슬슬 여유를 가져볼까?
“아마릴리스!”
풍경 소리를 묻어버릴 정도로 큰 목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릴리의 이름을 풀네임으로 부르는 사람이라면 딱 정해져 있다.
“비엔나 씨?”
“헉, 허억! 아마릴리스, 이 소식 들었나 몰라! 헉, 글쎄, 이번 축제, 에…….”
“……우선 좀 앉는 게 어때요?”
대체 무슨 일이지? 릴리는 호기심이 들었지만 숨을 헐떡이는 상대와 대화해봤자 의미가 없어 보였다.
“일단 여기, 물이라도 한잔 마시고 진정해요.”
“응. …하아, 하. 놀라지나 마시라! 바로 윽, 컥!”
“말하면서 물을 마시면 사레들리잖아요, 정말!”
릴리는 비엔나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성격이 급해서 좋을 것 하나 없다. 헐레벌떡 뛰다가, 또 사레까지 들리면 오히려 한 바퀴 더 돌아가는걸.
“아마릴리스, 그게, 이번 축제에 기자가 온대!”
와, 정말요?! 대박 사건! 호들갑을 떨어줘야 할 분위기지만 릴리는 가만히 눈만 깜박였다.
“매년 오잖아요, 기자들은.”
“그래, 매년 오지! 딜카넬드의 축제를 지방 신문 한구석에 쑤셔 넣기 위해서. 하지만 그게 아니야. 월간 스위츠 페어의 기자가 온다고!”
“네?!”
릴리는 깜짝 놀라 테이블을 탕 쳤다. 물이 반쯤 남은 컵이 넘어지며 쏟아졌지만 그런 건 신경 쓰이지 않았다.
“정말요? 어디에서 그런 소식을!”
“아마릴리스, 진정해!”
“진정하게 생겼어요? 어서 얘기 좀 해봐요, 어서!”
물이 테이블 너머 바닥까지 흘렀다. 프란시스는 흥분한 두 여자를 잠자코 지켜보다가 걸레를 찾으러 자리를 떴다.
“월간 스위츠 페어의 마지막 부분에 차회 예고가 있잖아. 알지? 축제 기간이 이 근처를 지나간데!”
“어, 겨우 그거……?”
솟구치던 기분이 급속히 가라앉았다. 뭐, 근처? 축제를 취재하러 오는 게 아니면 의미가 없잖아!
“뭘 또 실망해? 우리가 화제성을 만드는 거야. 근처에 왔던 기자들이 솔깃해서 우리 디저트를 보러오도록!”
“할 수 있을까요?”
“그럼!”
확신은 없지만 확률은 0가 아니다. 혹시나 기자들의 눈에 띄게 된다면? 월간 스위츠 페어의 구석에라도 사진이 실리게 된다면?
릴리는 마음이 떨렸다. 두근두근하고 들썩들썩하며. 갑자기 세상이 더 밝게 빛나는 것 같았다.
“근데 나 아까 물 쏟지 않았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 테이블이 깨끗했다. 그녀가 잠시 딴 세상에 가있던 사이 정리를 끝낸 프란시스가 이번에는 걸레를 치우러 사라졌지만 그녀로서는 모르는 일이었다.
*
“사탕.”
“케이크.”
“사탕!”
“푸딩!”
“사탕!!”
“마카롱!! …아니, 이래서는 끝이 없잖아요?!”
다가오는 여름 축제때 함께 노점상을 내기로 했다. 두 파티시에의 의기투합은 화제를 만들어낼 것이다. 축제 한정 디저트까지 내놓을 예정이니 더더욱.
발상은 좋았다. 문제는 그 디저트를 무엇으로 정하느냐였다.
“축제라는 특성을 고려해야 해. 들고 돌아다니면서 먹기에는 각 잡힌 디저트보단 사탕이 더 낫잖아!”
“팝스틱 케이스를 이용하면 케이크도 충분히 들고 다니면서 먹을 수 있거든요!”
길쭉하고 투명한 케이스에 케이크를 담는다. 주사기처럼 뒤에서 밀어 올려 케이크를 간편하게 먹는 방법도 있다.
두 사람의 의견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순간, 곁에 있는 또 다른 한 사람은 높은 확률로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뭐가 더 좋겠어요?”
이를테면 선택을 종용당한다거나.
“꼭 한 가지로 해야 합니까?”
“네?”
“두어 개 만들어서 선택의 폭을 넓히는 것도 좋겠습니다. 릴리, 저는 당신이 드레스 컨셉으로 디저트를 만드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번에도 축제용 컨셉을 정해 두어 개 만드는 것이 어떻습니까?”
“컨셉이라…….”
괜찮은 생각이었다. 인생은 객관식이 아니라 주관식이지, 참. 릴리는 프란시스가 사탕 혹은 케이크 중에 골라 주리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새로운 선택지를 내주었다.
“그렇다면 사과 어때?”
비엔나가 의견을 냈다. 사과로 사탕을? 흔한 사과 맛 사탕으로는 턱도 없을 텐데.
“뭘 모르네. 사과에 시럽을 입힌 사과 사탕을 내놓을 거야. 먹기에도 간편하고 투명하게 붉은 그 빛깔도 확 시선을 끈다구. 그래서 아마릴리스는? 사과 컨셉으로 디저트, 뭐 떠오르는 거 있어?”
“저도 문제없네요. 카라멜 사과를 만들면 되거든요.”
카라멜 사과. 이름 그대로 사과에 카라멜을 입히는 디저트다. 그 위에 땅콩분태나 초콜릿, 쿠키 등을 덧씌운다. 새콤달콤한 사과와 카라멜의 짭짤달콤한 맛이 어우러져 환상적이다.
“두 디저트 모두 생사과를 재료로 쓰네요. 좀 비슷한가…….”
“헹, 그렇지 않아. 결국은 사탕과 카라멜의 싸움이라구?”
“싸움 아닌데요! 어쨌거나 레시피 개발은 언제부터 할까요. 비엔나 씨?”
“그걸 말이라고 해? 지금부터지!”
정말이지 성격 한 번 급하다니까. 하지만 릴리도 머리를 스친 아이디어가 있었기에 미루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스케치북을 챙겼고 비엔나는 품에서 직소 퍼즐을 꺼냈다.
“그건 뭔가요?”
“버릇. 레시피 고안할 때는 손을 가만히 못 두거든. 그 스케치북은 뭔데?'
“습관이요. 전 아이디어를 쓰고 그리지 않으면 생각의 정돈이 잘 안 되거든요.”
레시피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과 토론을 거듭하여 만들어진다. 각자의 노하우를 나누며 설탕 시럽의 배율은 어떤지, 카라멜의 재료는 또 무엇을 쓸 것인지, 순서는 또 어떤지를 차츰 정해나갔다.
레시피의 구상은 빨랐다. 재료를 얼마만큼 계량하고 배합하는 건 늘 하던 일이라 익숙하니까.
“문제는 사과야.”
“사과가 문제네요.”
설탕 시럽과 카라멜에는 약간의 변동이 있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사과만큼은 절대적이다.
“보통 사과로는 안 돼. 청과물에서 가져오는 사과로는 부족하다구. 아마릴리스, 엠셀브즈 사과원에 대해 들어봤어?”
“들어보긴 했는데 저희 거래처는 다른 곳이라서 잘 몰라요.”
“다른 건 몰라도 청과물은 거래처를 여러 곳 이용해야 해. 쉽게 말하면 잡은 물고기랄까? 과일은 사무용품과 달라서 급하게 바꿀 수 없음을 알고 질 나쁜 과일을 보내주기도 한다구.”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최근 이용하는 청과물점에서 자꾸 부실한 과일을 보내줘 문제를 제기할까 하던 참이었다.
“그 사과원, 굉장하거든. 수도를 비롯해 인근 도시의 사과는 대부분 거기서 유통된다고 해도 좋을 정도야. 지금 우리가 아무 사과나 쓸 순 없잖아?”
비엔나의 말대로였다. 우선 당도가 높아야 한다. 사과의 역할은 상큼함과 아삭한 식감이지만 설탕 시럽과 카라멜에 맛이 완전히 묻혀버리는 건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과원, 딜카넬드에서 좀 멀지 않나요?”
“뭘 걱정해? 아마릴리스네 아르바이트생 중에 마법사 있잖아.”
“……일단은 단골이에요, 단골.”
쇠뿔도 단숨에 빼라고 했다. 축제까지는 일주일. 재료 수급은 빠를수록 좋았다.
*
“물론 우리 사과원은 당도 높은 최상급 사과만을 취급하지.”
사과원의 관리인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는 즉석에서 사과를 잘라 릴리 일행에게 건넸다. 상큼하게 씹히며 달콤한 과육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단맛에 묻힐 거라며 값싼 사과를 써선 안 되오. 사과는 주재료니까. 수도의 내로라하는 디저트샵들도 다 우리 사과원과 거래하는 이유가 있지.”
관리인은 일장 연설을 펼쳤다. 릴리는 적절히 대꾸하며 주위를 살폈다.
‘사과가 정말 많다…….’
그녀는 이만큼 많은 사과를 본 적이 없었다. 주위의 모든 것이 사과나무였고, 그 사과나무에는 사과가 잔뜩 달렸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과에 깔린다면 압사당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사과의 종류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아냐! 설명 다 안 해도 돼. 음, 그 있잖아. 시간제 서비스를 이용하고 싶은데.”
관리인의 말이 길어질 기미를 보이자 비엔나가 커트했다. 그는 약간 아쉬운 표정을 지었으나 프로답게 비엔나의 요구에 답했다.
“이용해본 적이 있으시군? 시간제 서비스는 간단히 말해 사과 몇 개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정해 알아서 따가는 거요. 그럼 몇 시간을 하겠소?”
4명이 1시간 내내 사과를 따면 얼마나 될까? 릴리는 계산이 되지 않았다.
“넉넉하게 반나절을 신청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사과를 따는 건 생각 이상의 노동입니다. 사과를 보관하고 운반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손이 꽤 가겠지요.”
“3시간해요. 반나절은 좀 가격이 있고 무엇보다…….”
“뭔가 있습니까?”
“여기 대마법사가 있잖아요.”
*
황궁 대마법사쯤의 고급인력을 사과나 따게 시키는 일은, 웬만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 고급 인력이 제 일을 못 한다며 구박받는 일은, 더더욱.
“사과를 따랬더니 뭘 하는 거야!”
“바람 일으켰잖아! 사과 떨어지라고!”
“미쳤어? 이것 좀 봐! 사과가 상처 나서 난리잖아! 불쌍하지도 않아? 이 매정한 놈!”
싸움이 났다. 라히안과 비엔나는 서로 언성을 높이며 티격태격했다. 처음에는 릴리도 그 싸움에 참전했지만 금방 지쳐 나가떨어졌다.
“전 바닥에 두꺼운 방수천을 깔아두면 사과가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라히안은 사과를 따기 위해 바람을 일으켰고, 거기까진 좋았다. 문제는 그 바람이 무척 격하고 폭력적이었다는 점이다.
“이래서야 못 쓰겠습니다.”
프란시스가 바닥에 떨어진 사과를 툭툭 털며 말했다. 새빨간 표면이 흠집투성이였다. 특상 사과는 한순간에 파지 사과로 격하됐다.
“어쩌죠, 프란시스?”
“별수 없습니다 노동해야지요.”
“그렇겠죠…….”
길고 긴 노동의 시간이 시작됐다. 사과를 따고 또 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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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추코 감사합니다^0^!! 좋은 주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