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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샵 블랑슈의 레시피 수첩-36화 (36/85)

00036 page. 9 여름 축제上 =========================

정신없이 달리던 릴리는 멈춰 섰다. 여긴 어디지? 분명 저택 앞이었는데, 어느새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도 혼자.

또옥, 똑.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그 소리는 묘하게 섬뜩했다.

“사,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이건 그냥 장치야. 날 놀라게 하려는 것뿐이니까.”

그렇지. 그게 틀림없어!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이 즉각 진정된다면 좋으련만. 릴리의 심장은 요란하게 쿵쾅거렸다.

“흉악한 마수한테도 끄떡없었는데, 왜 이런 게 무서운 걸까?”

릴리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불빛 하나 없이 어두운 저택은 너저분했다. 나뭇가지가 밟히고 구겨진 종이가 발에 채인다.

“프란시스, 거기 있어요? 프란시스!”

프란시스 말고도 다른 팀들이 나타날 법도 하건만 대답은 없었다. 그때 릴리의 시야에 반쯤 열린 문이 들어왔다. 자신이 저길 지나쳐 왔던가? 확신할 순 없지만 희미한 불빛은 충동을 일으켰다.

그 안으로 들어선 순간, 덜컥 문이 닫혔다.

“?!”

갑자기 온도가 바닥으로 치달았다. 춥다. 여름에 할 생각은 아니지만 몹시 추웠다.

릴리가 몸을 움츠린 순간, 목덜미에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차갑고, 끈적끈적한. 언젠가 때려잡았던 슬라임이 딱 이런 느낌이었다.

“뭐야. 겨우 마수 모형?”

그렇다면 문제없지! 릴리는 코웃음을 치며 끈적끈적한 무언가를 잡아당겼는데,

“……헉!”

익숙한 녹색 젤리에 뼈가 섞여 있었다. 심지어 아직 꿈틀거리는 손까지!

“릴리, 드디어 찾았군요!”

순간 이성을 잃고 손에 집힌 걸 집어 던졌는데, 때마침 나타난 프란시스가 전부 뒤집어쓰고 말았다.

“…….”

“헉, 죄송해요! 그게, 너무 당황해서!”

“정말 안 되겠군요.”

프란시스가 엉겨 붙은 젤리며 뼈를 떼어내며 말했다. 그 목소리는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유령을 무서워하는 건 릴리의 최대 약점이었다. 패닉에 빠져 이성의 끈을 놓고 마는. 일상생활에서는 두드러지지 않는 요소라 지금껏 문제가 될 일이 없었지만…….

‘으, 어쩌지? 아무리 프란시스라도 이건 화낼 거야.’

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원래라면 담력 체험 대신 광장에서 만돌린 연주를 들으며 여유롭게 축제 첫날을 만끽할 예정이었다. 새콤달콤한 사과 푸딩이라도 곁들어 즐겼다면 완벽한 하루가 됐을 텐데.

“프란시스, 정말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릴리는 약간 기가 죽은 태도로 말했다. 그러자 프란시스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녀가 반 토막 냈던 유령 모형처럼, 바짝 앞까지.

“프란시스?”

그녀가 입에 의문을 올렸을 때, 몸이 번쩍 들렸다. 예전에도 비슷한 감각을 느낀 적이 있었다.

수도에 갔었을 때 무뢰배들에게 습격을 당했었지. 그때 그가 돌파하기 위해 자신을 번쩍 들어 어깨에 얹었다.

하지만 이번은 그것과 달랐다.

시야에 들어온 건 그의 등이 아닌 얼굴. 색이 고운 백금발과 물빛 푸르른 눈동자가 보였다.

“프, 프, 프란시스?!”

릴리는 한 박자 늦게 사태를 파악했다. 그녀는 프란시스의 품에 안겨 있었다.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워서 몸을 버둥거렸지만 자신의 몸을 붙든 힘이 더 거세질 뿐이었다.

“도망치지 마십시오.”

“네에에?!”

“당신이 얼마만큼 무서워하는지 잘 알겠습니다. 싫은 티를 냈는데도 제가 억지로……. 사과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접니다, 릴리.”

“억지 아니에요! 제가 설명을 잘했어야 했는데!”

“글쎄, 과연 어떨까요.”

프란시스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렇게 말하면 꼭 무서워할 줄 알면서도 가자고 한 것처럼 들리는데? 릴리는 알쏭달쏭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무튼 이곳에 오래 머물러서 좋을 건 없겠지요.”

프란시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릴리가 생각하기에 누군가를 안은 채 움직이는 건 불편할 것 같았다. 더불어 그런 상태로 안겨 있는 것도.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부지런히 걷고 있었지만 릴리는 불편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가 자신에게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거겠지.

‘루펜시가 내 손을 잡아당겼을 땐 그렇게나 싫었는데.’

손을 빼내려고 하자 더 센 힘으로 자신을 끌어당겼던 남자. 돌이켜보면 왜 더 세게 때리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싫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았어.’

말도 없이 자신을 품에 안고, 발버둥치자 더 센 힘으로 끌어안았는데 어째서? 릴리의 의문은 더욱 커졌다.

잘생겨서? 잘생김은 개연성이라지만 그건 좀.

무서워하는 자신을 위한 배려라서? 글쎄, 루펜시가 그녀를 지켜주겠다고 나섰다면 싫었을 것 같았다.

‘그럼 프란시스가 좋아서?’

그 감정은 오래전에 꽈리를 틀었다. 하지만 짝사랑만 했던 그녀에게 좋아한다는 감정이, 이렇게 실감나게 다가오는 건 처음이었다.

‘나 이 사람, 진짜 좋아하나봐.’

복잡한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뿌리내려 자리 잡았다. 릴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프란시스에게 편하게 기댔다.

*

“저희 미션이 뭐였죠?”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나는 걸 찾아라’입니다.”

“그건, 음…샹들리에?”

릴리는 천장을 보았다. 높은 천장에는 화려하게 생긴 샹들리에가 있었다. 지금은 거미줄과 먼지로 뒤덮였지만 한창때에는 그 불빛으로 저택을 비춰주었겠지.

“하지만 샹들리에 위에는 아무것도 없군요.”

“그렇다면, 별?”

“그럼 저택의 다락방까지……릴리, 괜찮겠습니까? 여기에 더 있어도.”

“하지만 이왕 온 거 그냥 돌아가긴 아깝잖아요.”

“그럼 당신을 놀라게 한 값을 톡톡히 치르게 해주어야겠군요.”

별이 보이는 곳이라면 우선 더 높은 곳으로 가야 한다. 프란시스는 계단을 타고 올랐다.

신기하게도 마음이 평온했다. 갑자기 피아노 소리가 들리거나 거울 속에서 시체 분장한 여자가 튀어나오긴 했지만 그런대로 참을 만했다.

“축제 때 사과 사탕과 카라멜 사과, 둘 중 어떤 게 더 잘 나갈까요?”

“아무래도 들고 다니면서 먹기엔 사과 사탕이 유리하겠지요. 하지만 릴리의 카라멜 사과도 선방할 겁니다.”

약간 남은 긴장은 사소한 잡담으로 해소했다.

“레시피는 같이 개발했지만 아무래도 각자 특기가 있으니까 좀 의식되는 거 있죠?”

판매량으로 줄을 세우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만 릴리는 내심 신경이 쓰였다. 블라인드 테스트에 이은 2차 경쟁이라고나 할까.

“그 정도 경쟁의식은 당연한 겁니다. 욕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따지고 보면 릴리가 비엔나 양과 팀을 꾸린 것도 기자에게 소식이 들어가도록 유도한 것 아닙니까?”

“앗, 정말요.”

“적절한 욕심은 자양분이 되어 성장을 돕습니다. 릴리도 그럴 거고요.”

저택을 담력 체험의 장으로 꾸민 것은 수준급이었으나 퍼즐 장치는 허술했다. 골머리를 썩이라고 만든 것이 아닌 축제를 즐기고자 만든 것이니 당연했지만.

다락방으로 향하는 계단은 끼익하는 위태로운 소리를 냈다.

다락방은 천장을 열 수 있는 구조였다. 천장을 내리자 후덥지근한 여름 바람이 스며들어왔다.

“와……! 별이 예뻐요.”

새카만 밤하늘에 별이 촘촘히 박혀 있다. 누가 재촉하지 않아도 시간이 되면 제 자리를 지키며 마음껏 뽐내는 별들. 어느 때 보아도 아름다운 광경이지만 불빛 하나 찾아보기 힘든 곳에서 바라보니 더욱 인상적이었다.

무서워서 도망치고, 바보처럼 허둥댔던 결과가 이것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릴리는 별빛 하나하나를 눈에 담았다.

“혹시, 미션 속의 보물이 바로 저 별일까요?”

“그럴지도……음?”

프란시스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잽싸게 옆으로 피했다. 뭘까 하고 의아해하던 릴리는 화들짝 놀랐다.

“바, 박쥐가?!”

박쥐가 몰려들더니 금색 해골 모형을 툭 떨어뜨리고 다시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신경 써서 연출했군요. “

“정말요.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럼 이번에야말로 돌아갑시다.”

미션을 완료했기 때문일까. 이후의 과정은 힘겹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음산한 저택을 빠져나와 골인 지점으로 향했다.

“8번째로 담력체험을 마치신 두 분, 어떠셨나요! 어머나, 금빛 해골을 찾으셨군요.”

이벤트 요원은 호들갑을 떨었다. 그것은 기념품으로 증정되며, 순위권에 들었기에 따로 상품을 준다는 설명을 하며.

“상품이 뭔데요?”

“후후훗, 기대하셔도 좋아요! 쨔잔, 바로 그 유명한……엠셀브즈 사과원의 사과 한 박스랍니다!”

“……뭐?”

사과가 넘쳐서 창고까지 빌렸건만. 그렇게 사과가 더 늘어났다.

“상품도 받고, 좋기는 한데…….”

“……사과가 너무 많군요.”

릴리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떡하니 벌렸고, 프란시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두 사람의 심정을 모르는 이벤트 요원은 살가운 태도로 사과 박스를 건넸다.

그렇게 담력 체험은 추억과 사과를 남겼다.

*

그 날 색다른 추억을 만든 건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그이와의 추억이 새긴 디저트를 원해요!”

다음 날 아침, 가게 문을 열자마자 한 커플이 들이닥쳤다. 어째 낯이 익다 싶었는데, 바로 릴리 직전에 담력체험을 했던 사람이었다.

오늘도 옷을 쫙 세트로 맞춰 입은 커플은 의뢰하면서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추억이라 하심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그거야 어젯밤의 화끈한 추억이죠. 그치, 오빠?”

“응. 자기 말이 맞아.”

커플은 두 사람만의 세계에 빠져 신나게 떠들어댔다. 어제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걸 디저트에 담아낸다니 너무나도 기대된다며.

“한창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그래서 그 화끈한 추억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시겠어요?”

남의 커플 사정은 알고 싶지 않지만 그것을 모티브 삼아 디저트를 만들어야 한다. 이야기를 듣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몰라서 묻나요? 당연히 담력체험이죠! 그치, 오빠?”

“응. 물론 자기 말대로지!”

어젯밤 담력체험의 추억이 생생할 때 바로 디저트에 담는 다라. 행동력이 빠른 커플이었다.

“담력체험을 모티브로 한 디저트를 원하시는 거군요. 케이크에 두 분의 모형을 올리고, 구체적인 추억 한두 개를 형상화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좋아요, 멋지네요. 오빠도 마음에 들지?”

“당연하지. 자기가 마음에 드는 건 전부 내 마음에도 들어!”

이 커플, 끝이 없다.

“약간 무서운 분위기로, 폐 저택에 남겨진 두 사람? 막 저택에는 무시무시한 유령도 있지만 용감한 두 사람은 무사히 탈출한다는 거죠. 로맨틱호러한 느낌으로!”

“굉장히 추상적인데요…….”

분위기는 연상된다. 구체적인 이미지라면 조금.

“어차피 담력체험은 그쪽도 했잖아요. 대강 알지 않나요?”

그렇긴 했다. 릴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의뢰하신 케이크는 축제가 끝나고 2일 후 보내드리는 거로…….”

“어머, 안돼요!”

여자가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추억이 생생하게 살아있을 때 그 케이크를 맛보고 싶은 거라고요. 시간이 지나면 의미가 없어. 안 그래, 오빠?”

“그럼 그럼.”

“그러시다면 언제까지 받길 원하시죠?”

“오늘.”

릴리는 한숨을 내쉴 뻔했다. 오늘? 아직 이른 아침이라지만 당장 오늘 일정도 있고, 내일 있을 노점상 준비도 해야 한다. 막 바쁘지는 않지만 여유롭지도 않은데.

“죄송하지만 저희 가게가 내일 축제에 참가하기 때문에 오늘까지는 조금 힘들어요.”

“얼마면 돼요?”

“네?”

“부르는 대로 줄게. 그러니까 오늘까지 해줘요.”

여자가 그렇게 말하며 카운터에 지갑을 올려놨다. 터질 듯이 빵빵한 지갑을.

릴리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맡겨만 주세요!”

어차피 빠듯한 인생. 오늘의 무리가 더 나은 내일을 가져온다면 까짓것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런 심정으로 릴리는 커플의 의뢰를 받아들였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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