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0 page. 10 여름 축제 下 =========================
“정체를 밝혀.”
라히안이 냉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에 따라서는 당장이라도 공격할 기세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어. 그 마력의 정체는 프란시스에게 준 시약이 아니라 너였군.”
“잠깐, 좀 진정해. 릴리는 우릴 도와줬을 뿐이야.”
프란시스가 릴리와 라히안 사이로 끼어들었다.
“마력을 갖고 태어난 자는 그 사실을 신고하는 게 규칙이지만, 자신의 마력을 숨기고 평범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사람도 있는 거다.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되진 않아.”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냐. 일반적인 마력이 아니라고, 저건!”
라히안이 목소리를 높였다.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릴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예상은 했다. 하지만 자신을 위험 요소 취급하는 걸 지켜보는 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으면서.’
뭘 기대했던 걸까. 릴리는 마음속에서 많은 것을 내려두었다. 축제도, 디저트도, 이 도시도.
하지만 최근에 싹틔운 애정 어린 감정은, 쉽사리 포기할 수 없어서 슬퍼졌다.
‘내가 마법을 쓰지 않고 버텼다면 어떻게 됐을까.’
늑대 마수는 어떻게 버텨냈겠지. 그 과정에서 누구 한 명은 다쳤겠지만 그 난관 자체는 돌파했을 것이다.
하지만 몰려든 새 마수의 습격은 견디지 못했겠지.
프란시스와 라히안의 말다툼이 이어졌다. 언성이 점차 격해지는 건 기분 탓일 리가 없었다.
프란시스가 비교적 태연한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그는 라히안처럼 자신의 마력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니까.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마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를 알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때도 자신의 편을 들어줄까?
릴리는 확신할 수 없었다.
“엄청난 마력 정도가 아니야. 마력의 구조 자체가 다르다고. 마치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것처럼!”
“그래서, 넌 릴리가 괴물이라도 된다고 주장할 셈인가?”
“……그건. 대답해, 릴리. 네 정체가 뭐야?”
두 사람의 시선이 릴리를 향했다. 걱정을 담은 물빛 눈동자와 의심이 깃든 검은 눈동자가.
릴리는 입술을 달싹거릴 뿐 말하지 못했다. 그녀도 자신이 무어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몰랐기 때문에.
“말해. 변명할 기회를 주는 거야.”
“전 디저트샵을 경영하는 릴리일 뿐이에요. 당신도 알다시피.”
“털어놓지 않을 생각이야?”
“믿어줄 생각은 있고요?”
주고받는 목소리가 점차 거세졌다. 당장에라도 싸움으로 번질 듯 날카롭고 팽팽한 분위기가 고조됐다.
“프란시스, 너도 뭐라고 좀 해. 제국에 어떤 위험을 끼칠지 모른다고!”
프란시스가 한숨을 푹 쉬더니 검을 고쳐 쥐었다. 명백하게 적의가 담긴 행동. 릴리는 뒤로 물러났다.
“프란시스, 설마…….”
릴리는 숨을 삼켰다. 목이 턱 메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릴리를 향했던 검날은, 방향을 꺾어 라히안에게 닿았다.
“네겐 릴리가 제국으로 위험으로 몰고 갈 사람으로 보이나?”
“편을 들어주고 싶은 건 알겠는데 좀!”
“그녀는 괴물이 아니다. 파티시에로서 디저트를 연구하고 만드는 것에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는 소시민이지. 어떤 악의도 없어. 어느 백성이 그렇듯 평온한 일상을 누릴 자격이 있단 말이다.”
하지만 라히안은 물러서지 않았다.
“감당 힘든 수상한 마력을 가졌다고! 그럴 위험할 감수해야 할 이유가 뭔데? 그건 방관이야!”
“그렇게 위험하다면 왜 지금껏 아무 문제없었지?”
“지금까지 아무 문제없었으면 앞으로도 없어? 그건 모르는 거야.”
대답이 나오지 않고 질문만이 이어졌다.
이대로라면 결론이 나지 않는다.
“라히안 씨 말이 맞아요. 제가 수상한 마력을 가진 건 사실이거든요. ……그래도, 프란시스는 제가 위험하지 않다고 믿어주는 거예요?”
“애초에 당신이 마법을 쓴다는 것 정돈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 숨기려고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릴리는 눈을 크게 떴다. 그걸 말한 적도, 티를 낸 적도 없었는데!
“함께 수도에 갔었지요. 무뢰배와 맞닥뜨렸을 때, 당신은 절 지키기 위해 마법을 쓰지 않았습니까.”
“뭐? 그때부터 알고 있었어?”
“그때 라히안의 마법이 주문과 다르게 폭발했던 건 릴리의 마법과 충돌했기 때문이겠죠. 그때 당신이 평소와 다르게 행동한 건 그걸 감추기 위함이었겠군요. 맞습니까?”
릴리는 얼떨떨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으면서……왜 지금까지 모른 척했던 거예요?”
“당신의 비밀, 언젠가 스스로 말해준다고 했잖습니까.”
“……아.”
그런 말을 하기야 했다. 하지만 언젠가 털어놓을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먼저 알아차릴 거란 생각은, 더더욱 하지 못했고.
“릴리는 릴리인 채로. 그걸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릴리, 이 끈질긴 녀석 좀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릴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괜찮은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
“제 대답은요.”
<잿빛 요정이여, 내 적을 무찌를 힘을!>
바람이 작렬했고, 공격을 예상하지 못했던 라히안은 한바탕 굴렀다. 힘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 그것이 릴리의 대답이었다.
“……이걸로 대답은 충분한 것 같은데요?”
한마디로 말하면 해볼 테면 해봐라.
무식한 방법이지만 효과는 탁월했다.
“괜찮으십니까!”
때마침 기사들이 도착했다. 흩어졌던 늑대 마수를 전부 처치하고 온 모양이었다.
“음? 이 부근에 이상한 마력이 흩어져 있는데……?”
하필 그 무리에는 마법사도 끼어 있었다.
“그거야 여기에 대마법사가 있으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좀 이상한데.”
“대마법사께서 각성하신 모양이지요.”
프란시스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 마법사는 라히안처럼 깊숙이 마력을 분석할 수 없었는지 그런가 하고 넘어갔다.
“뒤처리는 저희에게 맡기십시오.”
“저어, 다른 곳은 괜찮나요? 내일 축제에 혹 지장이라도……?”
“전혀 문제없습니다. 축제도 예정대로 진행된다고 합니다.”
기사의 확답을 들은 릴리가 환하게 웃었다. 마법을 쓰면서까지 사과를 지켜낸 보람이 있었다.
“저희 여기까지 온 김에 사과 챙겨가요.”
“창고에 새 마수가 떨어졌는데 사과가 멀쩡할지 걱정되는군요.”
“헉. 사과!”
애물단지 취급받던 사과의 위치는 이렇게나 격상됐다. 릴리는 사과의 안위를 걱정하며 창고로 향했다.
케이크 의뢰를 하고, 술 마시기 대회에 참여하고, 습격한 마수를 퇴치하기까지. 기나긴 하루는 그렇게 끝났다.
*
“아마릴리스, 굉장히 피곤해 보여.”
“…네. 피곤해요.”
새벽 일찍 일어나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노점상에 내놓을 사과 사탕과 카라멜 사과를 만들어야 하니 별수 없었다.
함께 작업하기 위해 블랑슈로 온 비엔나는 그들이 평소와 다름을 느끼고 의아해했다.
“아르바이트생들도 피곤해 보이는데?”
“……잠을 별로 못 잤으니까요.”
“한 명은 조는데?!”
“깨우겠습니다.”
첫 단계는 사과 씻기. 껍질째 사용하기에 베이킹소다로 씻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다음은 꼭지 부분에 나무 꼬치를 끼우는 것. 이 작업이 은근 손이 많이 갔다.
“전 카라멜 만들게요. 나무 꼬치는 부탁해요.”
“맡겨두십시오.”
“…….”
라히안은 반응이 영 뚱했다. 어제 이후로 줄곧 릴리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언제쯤 관계가 예전처럼 돌아올까.’
마법으로 날려버린 건 역효과였을까? 호전적인 태도가 아닌 건 좋은데, 평소의 투덜거림이 없는 건 어색했다.
“아마릴리스, 설탕 끓는데?”
“아직, 조금만 더요.”
냄비 속 설탕이 탄 것 같은 갈색이 됐다. 이윽고 거품에 끈기가 보이자 릴리는 생크림과 우유를 넣었다. 꼭 밀크티를 끓인 것 같은 색깔이다. 그녀는 뭉치지 않도록 막대로 저어주며 뭉근히 끓였다.
“젤라틴은 언제 넣어?”
“확인 좀 해볼게요. 점성이 과연……음, 이제 넣으면 되겠어요.”
젤라틴을 넣고 녹인다. 젤라틴을 넣지 않는 방법도 있지만 넣는 쪽이 더 쫄깃한 카라멜이 된다.
“와, 끈덕끈덕해. 여기 사과를 담그면 되는 거지?”
“그리고 땅콩분태나 초콜렛으로 장식하는 거죠.”
카라멜 사과에 이어 사과 사탕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비엔나 씨, 색소는 좀만 덜어요. 어차피 시럽 몇 번 끓이면 색깔 진해지잖아요?”
“어음, 한 번 더 끓여?”
“세 번 정도 끓이면 새빨간 색 날걸요?”
사과 사탕에 코팅하는 설탕 시럽은 투명하다. 빛 아래에서 보면 얇은 설탕 막이 비쳐 보일 정도로. 모습만 봐도 달콤한 껍질을 깨고 상큼하게 씹히는 생사과의 맛이 연상됐다.
“역시 맛있겠어요.”
릴리가 사과 사탕을 들고 감탄하자 비엔나가 웃었다.
“그렇지? 역시 사탕이 최고라니까.”
“카라멜 사과도 맛있거든요.”
“맞아. 하지만 사탕이 더 많이 팔릴걸?”
“정말, 경쟁이 아니라 협력 아니었어요?”
그렇게 사과 사탕과 카라멜 사과는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그런데 다들 피곤해 보이는데 정말 괜찮겠어?”
“당장은 괜찮습니다. 노점상이 끝나면 바로 자야겠지만.”
“뭐어? 너희 설마 축제의 피날레를 빼먹을 생각이야?”
비엔나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축제의 피날레?”
“여름 축제가 여름의 기운을 즐기자는 의미라는 걸 말씀드렸죠? 마지막에 다가오는 겨울을 잘 받아들이기 위해 소원을 빌어요. 하늘 높이 천등을 날리며.”
릴리의 설명에 프란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높이 날려 보내는 천등. 확실히 피날레에 어울리는 모습 같았다.
“그럼 오늘 하루는 무리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
“어머, 예뻐라! 꼭 보석 같아!”
사람들은 사과 사탕을 보고 꼭 한마디씩 했다. 특히 아이들은 먹고 싶다고 부모님께 떼를 썼다.
“안에 진짜 사과가 들었어요?!”
“응, 진짜 사과가 들은 사탕이란다.”
사과 사탕을 한 입 깨문 아이들은 얼굴이 환해졌다. 달콤함과 상콤함이 조화를 이루고 입 안 가득 퍼지는 사과즙의 뒷맛도 깔끔하기에.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님께 한 번 더 떼를 썼고, 그 날 많은 부모는 곤욕을 치렀다.
“거 봐. 사탕이 더 잘 팔리지?”
“아직 막 시작했거든요! 카라멜 사과의 성적도 나쁘지 않다고요.”
미묘한 신경전과 함께 축제 마지막 날의 막이 올랐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0^!!
마밍아웃은 서열정리로 끝나고.... ㅇ<-<
어차피 들켰겠다 릴리는 이제 마음 편히 마법을 씁니다ㅋㅋㅋ!!
즐거운 주말, 좋은 밤 되세요^0^!!
+ 리아카에린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
+ 냐르냐뇨뇨님 알려주신 부분 수정했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