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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샵 블랑슈의 레시피 수첩-84화 (84/85)

00084 page. 23 마법을 담은 빗방울 케이크 =========================

[연참 2 / 2]

릴리는 숨을 삼켰다. 압도적인 분위기가 팽팽하게 조여 왔다.

‘백성들을 평민 따위라고 칭하며 급을 나누는 그대들의 오만함 때문이다.’

그건 필시 재상을 노린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반박하지 않고 입을 앙다문 채 무표정을 내걸었다.

“신분과 돈이라는 힘으로 평민을 억죄는 것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본질이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본디 선하다. 단지 손에 쥔 힘에 좌우될 뿐이지.”

릴리는 생각했다. 그동안 여러 일에 휘말렸었는데, 그때마다 프란시스가 유독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힘이 사람을 악하게 한다면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 같은 위치에 있다면 서로 급을 나눌 수 없겠지.”

“그 말은 즉……. 점차적으로 신분제를 폐지하겠다는 말씀입니까!”

재상이 당황하자 프란시스가 기다렸다는 듯 즉각 대답했다.

“그걸 바라나.”

“당치도 않습니다! 벨테인 제국의 찬란한 역사에는 귀족들의 노고가 있었음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신분제는 제국의 근간 중 하나다. 나도 그걸 없애자고는 하지 않아.”

재상은 긴장을 꺼뜨리지 않은 눈으로 프란시스를 주시했다.

“하지만 귀족과 평민 사이에 너무나 큰 격차가 있다는 걸, 그대들이 더 잘 알고 있겠지.”

프란시스는 말을 이었다.

“가장 먼저 그대들이 바뀌어야 한다. 그대들이 모범이 되어 다른 귀족들이 백성을 함부로 괴롭히지 못하게 하라. 귀족은, 하물며 황족도 완벽하지 않다. 신분제를 폐지하진 않겠다. 하지만 질서를 바로 잡는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이상론입니다!”

“이상론, 맞다. 하지만 그걸 가능케 하는 것이 너희의 역할이고 내 임무다. 이상적인 모호한 표현으로 현실과 분리시키려들면 곤란하지. 그걸 조금이라도 현실에 가깝게 만들 생각은 하지 않는 건가?”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었다. 비율로 치자면 더 많았다.

하지만 그 이상 속에서 희망을 발견한 사람도, 있었다. 의외로 많이.

“이 길이 옳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지금 그랬듯이 새로운 길을 개척하도록. 재상, 그대에겐 날 견제할 역할을 주마.”

재상은 망설였다. 자신이 세력의 중심에 선 건 황태자라는 구심점이 있어서였다. 그것을 놔버린다면 이 자리의 모두가 황태자를 지지하진 않겠지만 힘이 양분되어 좋을 건 없었다.

힘이 분산되면 자신이 해치웠던 황제 측의 세력에게 밀려날지도 모르니까.

‘현 황제보다 능력도 좋은데다 다루기 쉬운 인물이라 더할 나위 없었건만.’

매일 같이 황제에게 간언하던 황태자는 뜻이 전해지지 않자 황궁을 나섰다. 그리고 고작 1년이 지났을 뿐이다.

‘그랬을 뿐인데.’

재상은 릴리를 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 여자를.

고위 귀족들이 있는 이 홀에서 당돌한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 패기는, 썩 나쁘지 않았다.

“전하, 아니……폐하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재상이 무릎을 꿇었다.

“그대들이 날 황제로 추대했고 나는 평등을 추구하는 황제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이제 그대들이 대답하라.”

그 말에, 자리의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무릎을 꿇었다. 순식간이었다.

“평민과의 격차를 바로 잡는 첫 번째로, 평민 여인과 결혼하겠다.”

프란시스가 릴리에게로 다가왔다.

“아마릴리스.”

날카롭게 내려쬐던 눈빛이 다정함을 머금었다.

“황후가 되어주십시오.”

*

수많은 시선이 릴리를 향했다. 그건 시상식을 위해 단상을 올랐을 때 느낀 감각과 달랐다.

하지만 겁먹을 이유는 없었다. 자신이 그를 택했고, 그가 자신을 택했다는 확실한 명제가 있는 한.

“황후가 되어주십시오.”

릴리는 자신에게 한 쪽 무릎을 꿇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세상을 바꾸고자 갇힌 황궁을 뛰쳐나온 남자, 장차 제국을 다스릴 황제가 될 남자를.

그는 필시 많은 것을 짊어지고 요구받겠지.

그렇지만 그녀에게는 그저, 소중하고 애틋해서 언제까지고 같은 시간을 새기며 같은 궤적을 그려나가고 싶은 상대일 뿐이었다.

곁에서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도 무게를 견뎌내기 쉽지 않을까.

“조건이 있어요.”

릴리는 천천히 입을 뗐다. 그래도 지금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었기에.

“첩 들이지 말고요. 전 제 가게, 계속 운영하고 싶고요. 연회 같은 건 최소한만 참석할 거예요. 또, 지금처럼 평민출신이라고 쓴 소리 들으면 지켜 줘야 해요?”

그녀가 말을 끝마쳤을 때, 프란시스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저 역시 조건이 있습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법이다. 릴리는 대답을 요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제 곁에 있어주십시오.”

릴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내건 기준은 여러 개인데 바라는 건 단 하나라니. 처음 봤을 때 느꼈지만 이 남자, 역시 호구 기질이 있다.

그러니 내가 곁에서 적절히 선을 지켜줘야지.

그래도 일단은 물었다.

“고작 하나예요? 난 몇 가지나 되는데.”

“그것만으로도 전 세계를 얻은 것 같으니까.”

그렇다면야. 릴리는 일부로 뜸을 들인 후, 대답했다.

“좋아요.”

프란시스가 릴리의 넷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고는 가볍게 입을 맞췄다.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은빛 링. 다이아몬드를 봉오리처럼 감싸 안은 형태였다. 손가락을 살짝 기울이자 찬란한 광채를 발산했다.

“반지는 언제 준비했어요?”

“원래는 조금 더 빨리 얘기할 생각이었으니까요.”

결승이 끝난 후였겠구나. 그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았다. 다른 무엇보다도 마음고생을 덜 했겠지.

하지만, 그래도.

약간 돌아왔더라도 릴리는 지금이 좋았다.

“사랑합니다.”

“저도요.”

“당신 입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럼 프란시스도 한 번 더 말해주세요.”

릴리가 짓궂게 말하자 프란시스가 일어섰다.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같은 위치에서 시선을 마주보았다.

“사랑합니다, 릴리.”

사랑한다는 말이, 낯설지가 않았다. 처음 듣는데도 꼭 매일 들었던 것처럼 친숙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고 있었구나.

그래도 굳이, 표현하고 싶은 날도 있는 법이다.

“사랑해요, 정말로.”

그녀는 괜히 아쉬워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진심이에요.”

*

벨테인 제국에는 특이한 소문이 있다.

아름다운 황후가 저녁이 되면 앞치마를 두르고 디저트샵을 운영한다는 소문이.

“가끔 폐하께서도 오신다니까.”

“말도 안 돼. 거짓말!”

처음 듣는 사람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제 눈으로 보면 믿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거짓말해서 뭐해 릴리, 저희 주문요! 으음, 오늘 추천 디저트 있어요?”

“초콜릿 케이크 어때요? 홍차 잎을 우려서 초콜릿 무스를 만들었는데 이거 평가가 꽤 좋아요.”

“그럼 그걸로 주세요. 앤, 너는 같은 거? 그럼 두 개요.”

마데라가 태연하게 주문하는 동안 앤은 긴장을 애써 억눌렀다. 아카데미에서 얼굴을 맞대던 친구가 용감해 보이기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야야, 그렇게 막 불러도 돼? 누가 보면 친구인줄 알겠다.”

“응, 여기서는 그래. 오히려 황후님이라고 부르면 싫어하셔.”

“진짜 말도 안 돼. 우리나라에서 그럼 사형이야, 분명.”

앤은 양손으로 제 머리를 감쌌다. 납득이 가지 않았다. 유학 오자마자 이상한 소문이 들려서, 확인 차 왔는데 진짜라니.

“헉! 그러고 보니 경비도 없잖아. 안전 문제는 괜찮은 거야”

“호들갑은.”

익숙한 레퍼토리였다. 디저트샵에 황후가 있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면 꼭 그걸 물었다.

“실제로 있었대. 웬 놈이 암살을 시도했다든가?”

“거봐. 진짜 위험하잖아!”

“괜찮아. 우리 황후님 엄청 쌔거든.”

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하다고? 가녀릴 정도는 아니어도 저 여린 몸으로는 검도 제대로 못 쥘 것 같은데?

“저번에 복면을 쓴 암살자가 열 명쯤 찾아왔는데.”

“열 명이나!”

“응, 열 명. 아무튼 잔뜩 몰려와놓곤 복면과 머리카락이 활활 타버린 채 쫓겨났어.”

“뭐야, 그게! 그런 건 다 헛소문이야.”

앤은 툴툴댔다. 열 명이나 상대했다는 게 말도 안 될뿐더러 머리를 홀랑 태웠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우스개로 지어낸 얘기일 게 뻔했다.

“아니야. 내가 직접 봤어.”

“뭐?!”

앤은 순간이지만 마데라의 표정이 오싹해진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저 애, 없던 일 지어내며 농담하는 거 진짜 약한데?

“기다리셨습니다. 초콜릿 무스 케이크 두 개예요.”

소문의 황후는 테이블에 케이크를 예쁘게 내려놓았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어, 그러고 보니 홍차 디저트네요? 설마.”

“네, 바로 그 설마예요. 주말에 시간 내서 프란시스랑 새 레시피 만들어봤어요.”

“요새 많이 바쁘시죠?”

“아무래도 본업이 좀.”

언뜻 듣기에는 평범한 대화지만 실제로 평범하지 않았다.

“그, 그러니까 황후님이 가게도 운영하고, 가끔 폐하도 오시고, 그 황후님도 엄청 쌔시고…… 그게 말이나 돼!”

“조금 더 보태주면 그 폐하, 예전에 여기 아르바이트 생이셨어.”

“뭐?!”

“그때 잘 공략했어야 하는데. 돌이켜보면 참 후회된다니까.”

마데라는 초콜릿 무스 케이크를 한 입 먹고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었다.

“역시 블랑슈 케이크가 최고야. 씁쓸한 뒷맛이 확 끌리네!”

“그래서, 황제 폐하가 아르바이트생이었다고”

“그렇대도. 그 얘기 하려면 말이 길어지는데.”

“말해봐. 시간도 많은 걸.”

“어디서부터 시작하지 우리나라 황제 폐하와 황후님의 연애 스토리인데 말이야…….”

평화로운 오후 4시. 사람들은 초콜릿 무스 케이크와 촉촉하고 부드러운 푸딩, 그리고 달큰한 사과 파이를 먹었다.

디저트를 만끽하며 이어지는 수다는 덤.

살랑거리는 봄바람과 함께, 일상의 페이지는 그렇게 또 지나갔다.

============================ 작품 후기 ============================

지금까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0^!!

자세한 후기 및 외전이나 출간 일정 등의 공지사항, 그리고 감사 인사 등은 눈 좀 붙이고 나서 올리겠습니다.

작년 10월 30일에 시작해서, 지금이 6월 말이니 거의 8개월 걸렸네요. 그 중 5개월은 제가 잠수를 탔으니(...) 사실상 3개월, 함께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첫 완결의 영광은 여러분께 돌릴게요 ^0^!!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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