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라.”
에시엘의 다급한 구두 굽 소리만 가득하던 복도가 서늘한 목소리로 뒤덮였다.
“켁, 켁!”
이내 에시엘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누군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에시엘의 뒷덜미를 잡아챈 것이다. 그 탓에 조여진 목에서 반사적으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정신을 차린 시야 밑으로 보이는 높이가 제법 아찔했다. 에시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곤 고개를 돌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 누구…….”
마주한 붉은색의 눈동자가 형형했다. 에시엘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남자의 목소리만큼이나 소름 끼치도록 서늘했다. 순간 날 선 공기가 피부를 훑는 것 같았다. 그는 에시엘이 찾던 신관이 아니었다.
“이걸 볼모로 데려가면 되겠군.”
턱.
남자의 차디찬 목소리와 함께 에시엘의 몸이 다른 누군가에게로 던져졌다.
* * *
덜컹, 덜컹. 마차가 돌길을 달리는 게 느껴졌다. 마차 안,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미동조차 없이 앉아 있었다. 마차의 창 너머로 웅장하다 느꼈던 왕성이 작아지고 있었다.
왕성에서의 3년은, 그저 꿈이라 여기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 잔혹한 시간이었다. 보육 교사로 살다가 갑작스레 빙의자가 되어 버린 그녀에게 그 누가 도움이 되기는커녕, 곁을 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모두가 그녀의 존재를 쉬쉬하기 일쑤였다. 왕과 왕비의 미움을 사는 왕녀에게는 철저한 무관심만이 주어질 뿐이었다.
그나마 제가 가진 미약한 신력에 기대감을 품은 채 신관들의 방문만을 고대했으나 끝내 그마저 어그러졌다. 설상가상, 냉랭한 오라를 잔뜩 풍겨 대는 남자의 이유를 알 수 없는 납치까지.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당신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라는 듯 그녀가 품은 모든 희망을 짓밟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 거지?’
창밖의 풍경이 이제는 묽은 수채화가 번진 듯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에시엘은 그 풍경에서 시선을 거둬 눈앞의 낯선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변함없이 눈을 감은 채다. 에시엘은 불안한 듯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물어볼까.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누군가의 어록에 아이, 노인, 미인은 보호해야 한다는 신념에 관한 말이 있으니 이 남자에게도 그런 믿음이 있을지 몰랐다.
결심하듯 앙다문 입매 옆으로 채 다 빠지지 않은 젖살이 볼록 솟았다. 에시엘은 여전히 미동 없는 남자와 그의 곁에 놓여 검집에 곤히 들어찬 검을 힐끔 쳐다보았다.
검의 손잡이부터 검집을 타고 오르는 금박 뱀이 휘황찬란했다. 그 뱀의 눈을 나타내는 곳에 박힌 붉은 보석이 반짝였다. 뱀 문양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는 기시감은 애써 부정했다.
에시엘은 남자의 내려앉은 눈꺼풀을 보며 조막만 한 입술을 움직였다.
“어, 어…….”
하지만 새어 나온 목소리는 그녀의 뜻과 달리 한껏 떨리고 말았다. 갑작스레 눈을 뜬 남자의 눈동자를 마주하게 된 탓이었다.
자신을 학대한 부모에게서도 느껴 본 적 없는 위압감이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몸이 돌처럼 굳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전설 속 메두사를 마주한다면 마치 이런 느낌일까.
에시엘이 허벅지를 꼬집어서라도 소리를 내려던 순간, 남자의 소름 끼치는 홍안과 뱀 문양의 붉은 보석이 겹쳐 보였다. 그때,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에시엘은 여태껏 자신이 어디에 빙의됐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빙의된 곳의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대공이 그의 유난히 뛰어난 검술로 세상을 장악하는 B급 판타지 소설. 그 소설의 서막이 바로 지금, 시작되고 있었다. 대공의 가문을 나타내는 뱀 문양과 붉은 눈동자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소설 속 대공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게 아나이스 소왕국이 그의 타깃이 된 이유였다.
국력도 약하고 특출난 자원도 없던 소왕국은 나라 전체가 항구 도시로 이루어진 무역의 요충지였다. 소왕국은 이 위치를 이용해 폭리를 취해 가며 살아왔는데, 그 때문에 주변 제국들에게 눈엣가시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나 수많은 나라가 협상을 시도했으나 난항을 겪었고, 그런 소왕국을 단번에 몰살시킨 장본인이 바로 대공이었다.
그렇게 소왕국은 대공의 손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것이 원작의 내용이었다.
아나이스 왕녀, 에시엘은 대공의 토벌로 인해 고작 한 줄짜리 설명으로 죽음을 맞이하던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그동안 쉽게 떠올리지 못했던 것도 당연했다.
“얘, 너 그 이야기 들었어? 신관이 온대!”
“어머, 드디어 우리 소왕국에서도 인재가 차출되는 건가?”
왕성의 사용인들 사이에서 암암리 퍼지던 소문 속 그날은 분명 오늘이었다. 신력을 지닌 이를 찾아다닌다는 신관들이 이 왕성에도 당도하는 날.
‘이럴 리가 없어.’
에시엘은 지옥뿐이던 왕녀로서의 삶을 오늘로써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 신력을 신관들에게 내보이면, 그들이 자신을 데려가 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에시엘도 처음부터 이 삶을 지옥이라 느꼈던 건 아니었다.
소왕국의 대를 이어야 했던 왕과 왕비에게는 남자아이가 필요했다. 그런 남자아이 대신 태어난 게 바로 에시엘이었다. 그들은 늘 에시엘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 칭했다.
뜻대로 되지 않아 생겨난 그들의 울분이 에시엘을 향해 표출된 건, 그녀의 여섯 살 생일이 지나고 반년이 흘렀을 무렵부터였다.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에시엘은 제 허리께까지 굽이치며 늘어진 붉은색 머리칼을 초조한 손길로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그 움직임을 따라 에시엘의 긴 옷소매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옷소매에 감춰져 있던 어린아이의 팔뚝 사이사이 그득한 작은 상처의 흔적은 뽀얀 피부와 대비되어 더욱 두드러졌다.
처음에는 그저 무시당하고 방치될 뿐이었다. 에시엘은 그럴수록 사랑받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하지만 하등 쓸모없는 짓이었다.
“에시엘. 항상 몸을 깨끗이 하라 했거늘……. 쯔쯧. 냄새가 역겹구나. 저리 떨어지거라.”
“네가 하는 것이 뭐가 있느냐. 에시엘 아나이스, 너는 왕족의 수치다.”
왕과 왕비의 분노는 사그라들 줄 모르고 날이 갈수록 치솟았으며, 그건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에시엘을 향해 날아왔다.
와중에도 그들은 체통을 중시했다. 때문에 손찌검은 주로 보이지 않는 곳에 행해졌다. 온몸 곳곳, 약한 피부 위로 생겨난 흔적은 사라지기도 전에 겹겹이 쌓여 갔다.
소왕국에서의 일은 제아무리 빙의자인 에시엘이라도 감내하기엔 버거웠다. 하지만 에시엘은 그들을 원망하기보다 이곳을 어떻게 빠져나갈지를 궁리했다.
그리고 오늘 예정돼 있던 신관들의 방문이, 그 지옥 같은 곳을 빠져나갈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뭔가 이상했다. 원작대로라면 대공이 아나이스의 왕녀를 볼모로 데려가는 내용 따위는 등장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는 소왕국을 상대로 협상 따위는 하지 않았으니까.
‘이, 이 남자가 롬포드 대공이라고?’
에시엘은 드레스 자락을 붙잡곤 질끈 주먹 쥐었다. 치마에 잡힐 주름 같은 건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건 확연한 데드 플래그였다.
마카이른 제국의 유일한 대공가인 레고니스 가문은 제국의 검이라 칭해진다. 고귀한 혈통을 자랑하듯 그들의 눈동자는 모두 핏빛과 같은 붉은색을 띠었다.
또한 현 가주 롬포드 레고니스는 황제에게 역대 최다의 승전보를 안겨 준 인물로 등장했다. 그는 대공비의 죽음 이후 더욱 치열하고 악랄하게 전쟁에 임했다.
이에 따라 롬포드를 나타내는 수식어에도 살기가 서렸다. 살인귀, 악귀, 광인이라 불리는 그를 대적할 자는 존재치 않았다.
소설을 상기한 에시엘의 곱고 뽀얗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머지않아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 중 하나가 관자놀이를 타고 느릿하게 흘러내렸다.
“아이, 참. 마, 마차가 덥다아…….”
에시엘은 괜스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조그마한 손을 들어 올렸다. 겁먹은 몸뚱이는 그 짧은 순간에도 덜덜 떨려 왔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녀는 끌어당긴 소매 춤으로 식은땀을 톡톡 닦아 내며 계속해서 롬포드의 눈치를 살폈다.
에시엘을 쳐다보는 롬포드의 고개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을 만큼 갸우스름히 기울어져 있었다. 그런 그의 외모는 칠흑빛 머리칼과 함께 수려함을 뽐내고 있었으나 감상할 겨를이 없었다. 대공 특유의 섬뜩한 분위기가 에시엘을 압도했으므로.
‘땀이라도 흘렸다간 감히 네까짓 게 마차를 더럽히냐며 땅에 묻힐지도 몰라.’
에시엘의 머릿속에 미친놈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빈틈없이 들어찼다.
‘왕성에 돌아갈 기회가 있다 해도 신관들은 떠나고 없겠지.’
마지막 희망처럼 여기던 기회도 훨훨 날아가 버렸다. 볼모로 잡혀 왔으니 쉽사리 도망칠 수도 없었다.
‘진짜 지옥에 떨어진 거야, 이제.’
여우 소굴을 피하려다 늑대 소굴에 발을 들이게 된 셈이었다. 에시엘은 비탄에 젖어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녀의 자그마한 어깨 또한 축 처졌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선 무슨 수를 써야 할까. 에시엘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대체 나를 볼모로 잡아 와서 어쩔 속셈인 거지?’
곧 희미한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잇따르던 말발굽 소리가 멈추자 적막이 흘렀다. 목적지인 대공저에 당도한 듯했다.
롬포드는 검을 챙겨 마차를 나섰다. 그는 에시엘에게 어떠한 언질도 해 주지 않았다.
“어, 어?”
에시엘은 다급히 롬포드를 따랐다. 마차의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포진한 기사들이 그녀를 살벌하게 응시하고 있는 탓이었다.
거의 뛰다시피 하는 걸음으로 롬포드를 쫓아가고 있을 때, 다시 한번 뒷덜미가 거칠게 붙잡혔다.
“읏……. 읍.”
에시엘이 고개를 돌려 바라본 이의 어깨 견장에 롬포드의 검에서 발견한 것과 같은 붉은 눈의 뱀 문양이 보였다. 놀란 그녀는 비명이 나올 뻔한 제 입을 황급히 양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에시엘은 조금도 반항할 새 없이 수하에게 뒷덜미를 붙잡힌 채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