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2화 (2/80)

2.

대공가의 저택은 롬포드의 명성만큼이나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 작은 왕국의 성에 버금갈 정도로 웅장하고 으리으리했다.

“각하, 오셨습니까.”

연로한 집사가 롬포드를 맞았다. 이내 저만치 떨어진 곳에 눈에 띄는 색의 머리칼을 가진 낯선 어린아이가 집사의 시야에 들어왔다. 붉은 머리색은 아나이스 왕족에게만 대대로 내려오는 특징이었다.

“실례지만 저 아이는…… 누구입니까? 머리색을 보니 소왕국의 왕족 같은데요.”

“볼모다.”

“어떻게 할까요?”

“알아서 해.”

롬포드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저택을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자 집사를 비롯한 이들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때 멀리서 남자아이 하나가 달려왔다. 롬포드 앞에 멈춰 선 아이의 키는 그의 허벅지 절반가량을 넘어서는 정도였다. 약간 상기된 표정의 아이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오셨어요.”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미소를 띠는 아이의 얼굴에 천진난만함이 서려 있었다. 반면 롬포드의 표정은 더없이 무미건조했다.

“그래.”

한번 쳐다보고 말 뿐인 롬포드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금 움직였다. 이에 서서히 미소를 지운 남자아이는 롬포드의 뒷모습이 저택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뭐야, 이건?”

남자아이의 시선이 단박에 싸늘해지며 에시엘에게 닿았다.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에시엘을 위아래로 훑었다. 갑작스레 마주한 또 다른 이의 붉은 눈동자는 노골적이면서도 강렬했다.

* * *

아무리 내·외관이 호화스러운 저택일지라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방만 있는 건 아니었다.

에시엘이 떠밀리듯 들어선 곳은 저택의 수많은 방 중에서도 가장 볼품이 없고 구석진 곳에 있는, 그런 방이었다. 사람 손이 닿은 지 오래된 것 같은 가구들과 곳곳의 먼지 뭉치들은 이곳을 마치 창고 같아 보이게 했다.

에시엘은 그곳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었다.

감히 저택을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에시엘은 볼모로 잡혀 와 갇힌 셈이었으니까. 그 말은 언제 죽임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다. 함부로 움직였다가 자칫 대공이라도 마주쳐 명을 앞당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학대를 일삼았던 부모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되찾으러 올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또, 롬포드도 그러한 사실을 몰라야만 했다.

‘내가 볼모로 잡혀 온 건, 대공이 소왕국을 상대로 협상을 하기 위해서일지도 몰라.’

만일 롬포드에게 소왕국에서의 입지가 들통난다면 에시엘에게 좋을 일은 없었다. 필요 있는 존재로 보여야 살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소왕국에서 버림받은 것과 다름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들키기 전에, 철저히 혼자의 힘으로 살아남아 도망가야 한다.

‘어떻게 버텨 온 삶인데 이대로 죽임당하고 싶진 않아!’

목숨이라도 부지하기 위해선 롬포드의 심기를 건드리는 행동은 삼가야 할 것이다.

“그래. 엑스트라로 죽지 않은 것만도…….”

멍하니 중얼거리는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기색도 없이 열린 문소리에 에시엘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야! 네가 그 볼모야?”

“도련님, 이곳은 안 됩니다! 얼른 돌아가시지요.”

정문에서 보았던 남자아이였다. 그 옆에는 안절부절못하며 쩔쩔매는 시종이 있었다.

“뭐 어때. 저게 나한테 뭔 짓이라도 할까 봐?”

아이는 팔짱을 끼곤 에시엘을 노려봤다. 그리고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잔뜩 기고만장한 태도의 아이는 에시엘과 대치하듯 마주 섰다.

그녀는 눈을 끔벅거리며 아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눈부신 금발을 가진 남자아이. 아마 레고니스 가문의 차남이리라.

“도, 도련님…….”

문가의 시종은 차마 방에 들어서지 못한 채 주변을 살피며 발만 동동 굴렀다. 아이의 눈치를 보는 듯 간신히 뱉어 낸 목소리는 잔뜩 기어들어 가는 음성이었다.

“안 돌아간다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가!”

쾅―.

결국 아이는 들어올 때처럼 세차게 방문을 닫았다. 계속해서 자신을 만류하는 시종이 거슬린 모양이었다.

소음이 완전히 차단된 방은 조용하고 잠잠했다. 훼방꾼을 쫓은 후에도 아이는 무언가 못마땅한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에시엘을 노려봤다.

“야! 왜 대답을 안 해, 재미없게.”

남자아이는 에시엘에게 또다시 시비를 걸었다. 뾰로통하니 내민 입술이 삐죽빼죽 심술을 부렸다.

“너! 우리 아버지 봤지? 완전 무서운 분이거든?”

그러니까 얼른 대답해! 에시엘을 노려보는 남자아이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풋.”

에시엘의 눈매가 초승달 모양으로 접히며 입에선 실소가 터져 나왔다. 으르렁거리는 태도에 노란빛의 머리칼까지 어우러진 아이의 모습은 마치 귀여운 횡포를 부리는 아기 사자를 보는 듯했다.

“뭐, 뭐야. 왜, 왜 웃어! 볼모 주제에, 너 내가 웃겨?”

당돌한 모습을 보이던 남자아이는 당황한 탓인지 말을 더듬었다. 이와 더불어 한껏 구겨진 인상과 달리 아이의 귀 끝은 미미하게나마 붉게 물들어 갔다.

“너, 이름이 뭐야?”

에시엘은 얼굴의 웃음기를 지워 내고 아이를 향해 물었다. 충분한 영양 공급을 받지 못해 성장이 더뎌 또래보다 체구가 작은 그녀였기에 고개를 살짝 올려다봐야 했다.

“이름? 이 몸의 이름도 몰라? 너―.”

“나는 에시엘 아나이스야!”

에시엘은 또다시 시비를 걸려는 듯한 아이의 말을 잘라 내곤 악수를 청하듯 자신의 작은 손을 내밀었다.

“페루딘 레고니스다. 이……. 네 이름 따윈 안 궁금해!”

페루딘은 그 손을 힐끗 바라보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곤 제법 열심히 들은 것 같은 수업 내용을 장황하게 줄줄 읊기 시작했다. 대개 레고니스 가문의 역사에 관한 내용이었다.

“어? 그러고 보니 너 아나이스의 왕녀라며. 이 위대하신 레고니스 가문의 내력도 안 배웠어?”

의문스러움을 담은 페루딘의 붉은 눈동자가 에시엘에게 향했다. 가문과 더불어 본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 때문인지 아무래도 그녀의 신분을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하지만 오히려 빙의로 인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에시엘이었기에 그녀로서는 섣불리 떠들 수 없었다. 왕실의 기본 예법 같은 필수적인 교육조차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기에, 가문에 관한 이야기의 허용 범위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칫 잘못해 소왕국에서의 위치가 들통이라도 난다면 큰일이었다.

“아니! 수업 받을 때 깜빡 존 거거든?”

그렇기에 에시엘은 결국 거짓말로 제 정보를 숨기는 쪽을 택했다. 볼모 주제에 학대까지 당했다는 사실을 드러내서 좋을 건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얘 나랑 비슷하네…….’

에시엘은 기억을 더듬어 소설의 내용을 상기했다. 눈앞의 아이는 세상에 태어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 기억도 하지 못할 엄마의 죽음을 맞이했다. 학대까지는 아니나 페루딘 역시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며 커 온 셈이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페루딘은 늘 애정에 목말라 있고 표현이 서툰 아이로 등장했다. 이 사연은 그가 훗날 피도 눈물도 없는 레고니스의 무도막심한 차남이 되는 배경이 됐다.

롬포드 대공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다. 차남, 페루딘 레고니스와 그의 형인 테이시 레고니스였다. 소설 속에서 이 둘은 아버지를 이어 전 제국을 제패하는 인물들이 된다.

‘뭐, 그건 나중 일이니까.’

원작 속 그들은 마주하기조차 두려운 살인귀로 서술되어 있었는데, 눈앞의 어린 페루딘은 그저 작고 귀여웠다. 이런 아이라면 자신을 괴롭힐지언정 죽음으로 내몰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어쨌든 결은 달랐으나 사랑받지 못했다는 유사점은 에시엘의 마음 한쪽에 동질감을 싹 틔우게 했다.

“멍청이. 살고 싶으면 볼모로 잡혀 온 곳의 무시무시함 정도는 알아 둬!”

“피, 그런 거 몰라도 잘만 살아왔는데 뭐.”

“뭐, 뭐야?”

에시엘의 장난에 페루딘은 주먹을 부르쥐곤 씩씩댔다. 그는 본인이 위협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으나 에시엘의 눈에는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더더군다나 그녀에겐 보육 교사를 했던 전생의 기억이 있기에 더욱 그랬다.

“심심해?”

에시엘이 떠보듯 물었다. 허점을 찔린 모양인지 페루딘의 얼굴이 벌게졌다.

“뭐라는 거야!”

“에이. 너, 심심하지?”

“내가? 아니거든?”

페루딘은 억지로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침대의 이불을 괜스레 들척거리고 있었다.

“그럼 여기는 왜 왔는데?”

예리한 질문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페루딘이 변명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으…….”

그는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지 한껏 인상을 찡그렸다.

“나 마침 심심하던 참인데!”

“그래서? 어떡하라고?”

어느새 에시엘의 가까이 선 페루딘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랑 같이 놀래?”

에시엘은 방긋 미소 지으며 양팔을 뻗쳤다. 볼모로 잡혀 온 아이치고는 무척이나 해맑은 미소였지만 끌어 올린 입꼬리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이 다소 긴장한 그녀의 본심을 대변해 주었다.

“내가 너랑?”

페루딘의 얼굴이 다시 한번 찡그려졌다.

“응!”

에시엘은 팔을 뻗어 붕붕 휘저으며 신나게 대답했다. 어린아이와 놀아 주는 건 자신 있었다. 전생의 제 직업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술래잡기할 건데 조금 어렵거든. 어때?”

“어, 어려워……? 뭔데?”

“하겠다고 하면 알려 주지.”

“으음…….”

페루딘은 고민하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 방 안에서만 술래잡기하는 거야.”

“에이, 시시해.”

“대신 눈은 꼭 감아야 해!”

에시엘은 자신의 푸르른 초록빛 눈동자를 가리키며 느릿하게 눈을 끔뻑였다.

“뭐어? 쳇. 그런 거 하나도 안 어려워.”

흥미로운 듯 되묻던 페루딘은 금세 표정을 숨겼다. 하지만 무의식중에 에시엘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시선까지는 감추지 못했는지, 이를 알아챈 그녀가 선언하듯 크게 외쳤다.

“시작한다? 내가 먼저 술래 할게. 5초 뒤에 찾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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