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역시 말보단 행동이 빠르지.’
곧 에시엘이 방의 한가운데에 서서 눈을 감았다.
“어? 어?!”
멀뚱히 서 있던 페루딘은 에시엘의 말에 몸을 다급하게 움직였다. 갑작스레 움직이는 아이의 몸짓은 무척이나 허둥지둥했다.
시종들과 술래잡기를 한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심지어 눈을 감고 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서툴렀다.
“5―.”
“자, 잠깐만!”
카운트다운을 시작하는 목소리가 작은 방을 울렸다. 이내 눈을 감고 서 있던 에시엘의 귓가에 우당탕하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려왔다.
“4, 3, 2, 1―. 시작!”
머지않아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에시엘은 눈을 감은 채 조심스레 한 발 한 발 움직였다. 딱히 가구랄 것이 없는 방이라 초보자인 페루딘이 숨을 만한 곳을 떠올리는 일은 그닥 어렵지 않았다.
‘끽해야 침대와 벽 사이 틈이겠지?’
곧장 창문을 지난 에시엘이 그곳으로 향했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점차 가까워질수록 페루딘의 움직임으로 추정되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손을 앞으로 휘휘 저었다. 손끝으로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페루딘?”
“에이, 씨. 다시 해!”
곧 페루딘의 심통 난 목소리가 들리자 에시엘이 눈을 떴다. 아이는 좁은 틈새에 웅크려 숨기라도 했던 듯 어깻죽지에 먼지 뭉치가 묻어 있었다. 에시엘은 그 먼지를 떼어 주며 실실 웃었다.
“좋아. 이번엔 네가 술래 할 차례야.”
“뭐? 왜!”
“당연히 내가 널 찾았으니까.”
“쳇……. 너보다 빨리 찾을 거야.”
페루딘은 생각 외로 순순히 응했다. 그리고 좀 전의 에시엘처럼 방 가운데에 서서 눈을 감았다. 또다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에시엘은 잽싸게 몸을 숨겼다.
“찾는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아이가 에시엘을 찾는 일은 순조롭지 못했다.
“……항복!”
결국 꽤 긴 시간이 흐르고 페루딘이 두 손을 들며 외쳤다. 곧 모습을 드러낸 에시엘은 눈매가 휘어지도록 웃음 지었다. 이에 페루딘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말했다.
“야! 너 속임수 쓴 거 아냐? 다시 해!”
“좋아, 나는 자신 있어!”
그리고 아까와 같이 페루딘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찾는다!”
하지만 역시나 순조롭지 못했다.
“항복!”
후에 두어 번 반복되는 상황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결국 페루딘은 망연자실한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말도 안 돼. 내가 볼모 따위한테 지다니…….”
“헤헤. 패배를 인정해!”
똑똑―.
그때, 에시엘의 목소리를 뒤덮듯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와라.”
이에 페루딘이 방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제법 근엄하게 허락의 말을 전했다.
“도련님. 어떤 연유로 이곳에 계십니까.”
문을 열고 모습을 보인 집사는 페루딘에게 은근한 질책을 했다. 제 주인의 아들이 볼모로 잡혀 온 아이와 어울리는 모습을 영 탐탁지 않아 하는 듯했다.
“내 맘이야. ……근데 무슨 일인데?”
페루딘은 입을 삐죽이면서도 내심 궁금한 모양이었다.
“각하께서 찾으십니다. 이만 가시죠.”
“뭐? 정말?”
몹시 반가워하는 기색을 표한 페루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여전히 방 밖에 선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집사에게 다가갔다.
“아.”
방을 나서려던 페루딘이 뒤를 돌아 손을 흔들었다.
“야, 볼모! 다음엔 이겨 줄 테니까 두고 봐.”
“으응.”
에시엘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행동을 따라 했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 * *
까무룩 잠이 들었었다.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잠에 빠진 듯했다.
밤중인 모양인지 눈을 떴는데도 주변이 캄캄했다. 하지만 시계가 없으니 정확한 시간은 알 수가 없었다.
에시엘은 몸을 일으켰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금세 어둠 속이 익숙해졌다.
바닥에 발을 디뎌 조심스레 불을 밝힐 수 있는 것을 찾아 나섰다. 침대맡의 서랍장을 뒤적거리자 성냥갑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행이다…….”
에시엘은 능숙하게 성냥을 켜 양초에 불을 붙였다. 방치되는 것이 더 익숙했던 왕성에서 살며 자연스레 터득한 생존력이었다. 곧 어둡던 방에 은은한 불빛이 퍼졌다.
그리고 침대에 털썩 걸터앉은 에시엘은 가만 제 행색을 살폈다. 말끔하든 말든 언제나 자신을 꾸짖던 왕비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듯했다.
“씨, 씻어야겠다.”
자리에서 일어나 오도카니 선 그녀가 도리질을 쳤다. 그러다 이내 팔짱을 끼곤 방을 아슬랑거렸다.
“나갈까, 말까, 나갈까, 말까…….”
에시엘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작은 방 안에 그만한 원을 그리듯 뱅글뱅글 돌았다. 작은 발자국을 따라 동그란 원이 스무 개가량 겹치고 겹쳤을 즈음, 그녀가 돌연 문 앞에 우뚝 섰다.
“나가자! 뭐, 다들 자고 있을 시간이겠지?”
어깨를 으쓱인 에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창으로 보이는 외부의 모습이 캄캄했던 방보다 더 새까맣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오자 복도 벽에 박힌 은촛대마다 불을 밝히고 있는 게 보였다. 은촛대의 주변이 푸르스름한 걸 보아 마력이 깃든 듯했다.
그것을 멍하니 보는 것도 잠시, 불현듯 그녀가 놓친 것이 떠올랐다.
“길……. 길을 모르잖아!”
놀라서 커진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에시엘은 작은 손으로 서둘러 입을 막았다. 저도 모르게 외친 목소리가 조용한 복도를 타고 퍼졌기 때문이다.
잠시간 인기척을 살핀 후에도 손을 거두지 않은 채 조금씩 걸음을 움직였다.
‘안 돼, 안 돼!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페루딘이랑 놀 때 살짝 물어봐 둘 걸 그랬어.’
에시엘이 깊은 후회를 하며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걸을 때였다.
달칵―.
그녀의 뒤쪽에서 문이 여닫히며 나는 쇠 마찰음과 함께, 누군가의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는 에시엘의 바로 뒤에서 멈춰 선 듯했다.
‘뭐, 뭐지?’
에시엘은 저도 모르게 점차 빨라지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조심스레 뒤돌아, 그 누군가를 마주했다.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지금?”
롬포드의 날이 선 목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울렸다.
“어, 아…….”
“내 저택에서 도망을 치는 건가?”
이어 롬포드의 싸늘한 시선이 닿았다. 매서운 눈빛에 에시엘의 사고 회로가 고장이라도 난 듯 멈추고 말았다.
그녀는 온몸이 단단히 굳어 어떤 말을 내뱉을 수도, 잽싸게 발을 움직여 달아날 수도 없었다. 다리가 땅에 뿌리를 내린 듯 도무지 움직이지 않았다. 오로지 제 입을 막고 있던 손만 점차 떨려 올 뿐이었다.
“멀쩡히 뚫린 귓구멍이 막히기라도 했나 본데, 내 친히 얘기해 두지.”
“…….”
“두 번씩 말하게 만들어서 네 명줄이 끊길 것을 자처하지 마.”
뒷덜미를 낚아채던 손과 자신을 내려다보던 서늘한 붉은색 눈동자에 대한 기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에시엘은 허약한 몸뚱이에서 힘이 풀려 다리가 주저앉으려는 것을 참아 내야 했다.
어느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많고 많은 복도 중에 하필이면 이쪽을 향해 롬포드를 마주하고야 만 자신이 야속할 따름이었다. 가능하다면 시간이라도 되돌리고 싶었다.
“대체 왜 이 시간에 내 눈에 띄었는지 고해.”
“그게…….”
그녀가 겨우 입술을 떼었으나, 그 모습을 답답하게 여긴 롬포드는 완성될 문장을 채 기다리지 못하고 말을 덧붙였다.
“구석진 방에 처박아 둔 의도를 모르는 건가.”
에시엘은 이 상황을 모면할 알맞은 답을 찾기 위해 생각을 쥐어짰다.
“그게 아니면 잡혀 온 처지라는 걸 그새 잊기라도 한 모양이지.”
그러나 채근하는 롬포드의 목소리가 더 빨리 들려왔다.
“아니에요. 저, 저는…….”
적당한 답을 찾지 못한 에시엘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적막이 흐르는 복도에선 그 소리가 너무나도 크게 들려왔다. 어느 말을 내뱉든 롬포드의 성난 심기를 가라앉힐 순 없을 것이었다.
“씨…….”
“뭐?”
“씻으려고…….”
“씻어? 볼모 주제에?”
롬포드가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이 조막만 한 생물은 제 처지를 모르는 걸까.
“길을……. 길을 몰랐어요……. 잘못했어요.”
에시엘은 솟아나는 두려움에 여전히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차마 롬포드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숨은 쉬고 있는지, 대답은 제대로 했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작은 손바닥에선 자꾸만 땀이 배어 나왔다.
“그냥, 그냥 빨리 씻고 오려고…….”
“쯧. 쥐새끼가 따로 없군.”
에시엘에게 향하는 롬포드의 눈빛이 매서웠다. 그가 이렇게 유독 날이 선 이유는 장소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볼모로 잡아 온 아이가 제 저택을 빨빨거리는 것도 충분히 꼴 보기 싫긴 했으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하필이면 집무실 앞에서 발각됐다는 점이 롬포드의 신경을 더욱이 거슬리게 했다.
레고니스가 저택엔 두 개의 집무실이 존재했다. 그중 하나인 여기는 저택을 총괄하는 집사를 제외하곤, 그의 핏줄인 두 아들의 출입마저도 불허하는 곳이었다.
이곳엔 롬포드 레고니스라는 이름에 걸맞은 명예를 쌓기까지의 노력이 여실히 기록되어 있었다. 여러 제국과의 협정 문서, 합의한 조약들이 정리된 서류, 레고니스가의 기밀문서까지.
대공비의 죽음 후 더욱 열렬히 일에 빠져 버린 롬포드의 전부가 있었다. 이 작은 아이가 그걸 빼돌릴 수는 없겠으나, 능구렁이 같은 아나이스 소왕국의 자식이 얼쩡거린다는 사실 자체가 신경에 거슬렸다.
게다가 지금은 비밀리에 진행하던 사건의 실마리를 어렴풋이 짚은 참이었다. 해결하지 못한 난제의 단서를 기어코 찾아내고 만 것이다.
‘안 돼. 이대로 머뭇거리기만 하면 칼날을 목에 들이밀어도 당해 낼 재간이 없어.’
시선도 맞추지 못하고 불안하게 눈알만 데록데록 굴리던 에시엘의 시야가 문득 한곳에 머물렀다. 바로 롬포드의 손에 쥐어져 있는 잔뜩 구겨진 초상화였다.
‘일단 롬포드의 관심을 돌리는 게 먼저야.’
에시엘은 초상화를 유심히 살폈다. 자신을 수상하게 생각하든 말든 우선 지금 살아남는 게 먼저였다. 그녀는 또다시 침을 꿀꺽 삼키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한쪽 초상화를 가리켰다.
“콧수염 아저씨가 나쁜 사람이에요.”
에시엘은 땀이 배어 나온 손을 드레스 자락에 닦으며 긴장감을 지워 내려 애썼다. 그리고 초상화를 향해 뻗은 짤막한 제 검지에 꼿꼿이 힘을 주었다.
“뭐?”
롬포드의 정갈하던 눈썹이 삐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