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에시엘의 지난 기억대로라면 알려지지 않은 ‘그곳’에 보물이 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그곳’을 향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만큼 죽어라 달리고 있었다. 연이어 들리는 세찬 구둣발 소리에 그녀의 다급함이 느껴졌다.
‘분명 이쪽 어딘가일 텐데……!’
슬슬 허벅지가 아파져 왔다. 글자로만 보았던 설명을 되새겨 목적지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어린아이가 된 뒤 이렇게까지 마구 뛰어 보지 않아 더욱 감당하기 힘들었다.
조급함 탓인지 주변 풍경은 전부 비슷하게만 느껴졌다. 불안한 마음에 헷갈리는 정신이 판단을 흐리게 했다.
“헉…… 헉……. 벌써 따라잡진 않았겠지?”
한참을 달리다 멈춰 선 에시엘은 가쁜 숨을 가다듬었다. 사시나무 떨듯 후들거리는 다리에 자그만 손으로 겨우 무릎을 지탱하고 섰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뒤에서 자신을 쫓아올 페루딘을 돌아보아야 했다.
“내 소원은…….”
페루딘을 무작정 이끌었던 에시엘은 저택의 정원 한가운데 멈춰 서서 말했었다.
“흥. 누가 들어준대?”
“같이 술래잡기하는 건데도?”
자못 도도하게 팔짱을 낀 채 대꾸하던 페루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래도 에시엘이 제안한 놀이에 솔깃한 눈치였다.
머지않아 그의 팔짱이 스르륵 풀리며 소리 없이 벙긋대는 입이 머뭇거림을 표했다. 차마 호기심을 내색하긴 싫은지 찰나의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고 에시엘이 씨익 미소 지었다. 덩달아 그녀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미소가 생겨났다.
“대신 페루딘이 술래!”
“뭐, 뭐?”
에시엘은 막무가내 같은 외침을 끝으로 정원과 연결된 산책로를 향해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굽이치는 붉은 머리칼이 바람결을 따라 나풀나풀 휘날렸다. 포근하게 내리쬐는 봄 햇살이 머리칼에도 내려앉은 듯 눈이 부실 만큼 윤기가 돌았다.
에시엘은 등 뒤에서 들려오던 페루딘의 목소리를 모른 척하며, 그렇게 한참을 달린 것이다.
푸른 수풀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띌 금빛 머리칼은 다행히 보이지 않았다. 꽤 간격을 벌린 듯했다.
“좋아, 빨리 찾아야 해.”
어느새 호흡이 차분해진 에시엘은 나지막이 중얼거리곤 주변을 살폈다. 엉겁결에 얻게 된 소원권과 그와의 놀이를 핑계로 삼아 곳곳을 헤집으며 반드시 쟁취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마카이른 제국의 레고니스 가문은 유서 깊은 혈통을 이어 내로라하는 가문으로 기반을 다졌다. 그 토대에는 여타 가문들과 월등한 차이를 보인 능력, 바로 ‘초월적인 힘’이 있었다.
황제는 범접할 수 없는 능력을 지닌 레고니스 가문에게 제국을 지키라 명 내렸고, 이는 관습처럼 굳어졌다. 그들의 노력은 종내 진귀한 각종 보물과 포상금, 패전국의 자원으로 보상받게 됐다. 선대는 그것들을 한데 모아 가문의 재력을 비밀리에 더욱더 키워 나갔다.
‘아주 조금……. 도망치고 며칠간 굶지 않을 정도만.’
에시엘의 목적은 바로 가문이 숨겨 놓은 재화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머지않을 미래에 저택에서 도망친 후를 대비해 살아남고자 하는, 작지만 강한 욕망이었다. 그녀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풀을 헤치며 결의를 다지듯 마음속에 아로새겼다.
그리고 그 순간 에시엘의 눈동자가 번뜩 빛났다. 수풀 사이로 흔하디흔하지만, 어딘지 수상쩍은 언덕이 보였다.
“찾았다!”
그것을 유심히 살피던 에시엘의 입술 사이로 기쁨이 섞인 감탄사가 절로 새어 나왔다. 언덕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 고르게 자라난 잔디가 약하게 이는 바람결에 흔들거린다. 언뜻 동산처럼 보여 무심코 지나칠 법한 풍경이었다.
마치 누군가의 무덤인 양 볼록 솟아오른 곳의 한쪽엔 흠집이 가득한 작은 나무 문이 자리했다. 문 가운데에는 레고니스 가문의 뱀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곳이다. 분명 여기에 은밀히 숨겨 놓은 레고니스 가문의 재화가 있을 터였다. 모든 것이 원작의 묘사를 빼다 박은 채였다.
에시엘은 거침없이 다가가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와중에도 손바닥에 닿는 서늘한 감촉이 달갑지 않았다.
끼이익―.
‘열려 있어. 다행이야.’
에시엘은 날카로운 소음에 인상을 살짝 찌푸리면서도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열리는 문을 따라 물에 젖은 흙냄새가 훅 끼쳐 왔다. 그녀는 순간 흐르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내부로 들어서자 곳곳에 놓인 불룩한 자루 수십 개가 시야에 들어찼다. 저마다 두드러진 자루에 가득 찬 내용물은 불 보듯 뻔했다.
수천, 수만금의 재화와 진귀한 보물들은 당연하거니와 어쩌면 그 이상의 가치가 담겼으리라. 그것들이 바로 에시엘이 죽어라 달리던 이유였다.
방치된 것처럼 보이던 외관과 성인의 키로는 허리를 편 채 들어설 수 없을 만큼 작은 문은 아무래도 이곳을 감추기 위해 눈속임을 의도했는지도 몰랐다.
“와…….”
한껏 경직되어 있던 몸이 그제야 이완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홀린 듯 자루를 향해 걷던 에시엘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돌연 잊고 있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페루딘은 씩씩거리며 어느 때보다도 열성껏 자신을 찾아다닐 게 분명했다.
생각보다 순탄하게 흘러가는 상황에서 느껴지는 일말의 이상스러움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에시엘은 망설임 없이 자루 주둥이의 매듭을 풀어냈다.
“빨리, 빨리…….”
느슨해진 매듭 새로 비치는 반짝임에 더욱 조급함이 일었다. 뒤이어 재빠른 손놀림으로 마저 풀어 헤친 자루 속에는 사치스러운 화려함을 뽐내는 샛노란 금화가 가득했다.
액수로 따지자면 어마어마한 금액일 터였다. 에시엘은 금화를 향해 손을 뻗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작은 손이 차가운 금속 사이를 가르자 그것들은 서로 부딪히며 달그락 소리를 냈다. 제법 요란하고 큰 소음이었다.
“끄응―. 아무래도 안 되겠어.”
곤란한 듯 중얼거린 에시엘은 제법 진지하게 팔짱을 낀 채 불룩한 자루를 응시했다. 부피가 클지도 모르는 보석보다 낫지만, 부딪히는 소리 탓에 무사히 숨기기도 전에 들킬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에시엘은 생각을 마친 듯 그 옆에 놓인 자루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조금 전과 같이 빠르게 매듭을 풀었다. 그 속에선 아까보다 더욱 둔탁한 덜그럭 소리가 미약하게 들렸다.
“좋아! 이거면 문제없지.”
형형색색의 광물들이 저마다 눈부신 빛깔을 뽐냈다. 에시엘은 비교적 크기가 작은 것을 찾다가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적색의 보석을 집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의 붉은 머리칼과 비슷해 이끌렸는지도 몰랐다. 보석은 작은 손에 꽉 들어차는 앙증맞은 크기의 루비였다. 매끈한 광물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는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그리고 또다시 다른 보석을 향해 손을 뻗는 찰나, 갑자기 문이 열리며 잔뜩 성이 난 목소리가 들렸다.
“야! 너 여기서 뭐 해?”
“헉.”
도르륵―.
느닷없이 열어젖힌 위력 탓인지 자루 속 금화 하나가 떨어져 마룻바닥을 데구루루 굴렀다. 위태위태하게 구르던 동전은 끝내 페루딘의 구두코와 부딪히곤 움직임을 멈췄다.
잽싸게 뒤를 돌았을 땐, 벌컥 열어젖혀진 문과 숨을 고르는 페루딘이 보였다. 어찌나 세게 열었는지 날카로운 소음이 묻힐 정도였다.
‘크, 큰일이다!’
에시엘은 깜짝 놀란 토끼 눈만 끔뻑거릴 뿐, 손에 들린 보석을 숨길 생각조차 못 했다. 그의 물음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흐르는 정적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뭐야? 이건 왜 여기 있지?”
페루딘은 에시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제 발치에 안착한 샛노란 금화를 집어 들었다. 장난기 가득한 눈에는 어느새 호기심이 가득 서려 있었다.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은 에시엘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제 와 어물쩍 시간을 끈다고 한들 금화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을 터였다.
‘어떡하지?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에시엘은 잔뜩 굳어 버린 몸을 가까스로 움직여 쥐고 있던 보석을 제 등 뒤로 숨겼다. 머릿속에선 이곳에 있던 이유부터 보석을 들고 있던 이유를 통틀어 이 상황에 대한 수천 가지 변명을 떠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야, 이거…….”
페루딘은 손에 쥔 동전과 에시엘의 뒤로 잔뜩 놓인 자루를 번갈아 보며 점점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보며 그녀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아이의 장난기 가득한 눈매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척 예리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떨어진 건가? 근데 너 설마…….”
“으응? 왜?”
에시엘은 공연히 눈을 끔벅이며 페루딘이 덧붙일 말을 기다렸다. 그가 쥐고 있던 금화는 무심한 손길로 자루 속에 내던져진 후였다. 자신을 더욱 유심히 살피는 듯한 눈빛에 더욱 불안이 엄습했다.
“여기 가만히 서서 숨어 있던 거야?”
“어어?”
“……그냥 가만히 서서?”
“어……? 마, 맞아! 너무 쉬운 곳에 숨었지? 하핫…….”
이상하게 쳐다보는 페루딘의 눈초리를 피하며 어색한 웃음을 띠었다. 어쩌면 에시엘은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굳게 마음먹었는지도 몰랐다. 들키게 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절대 일언반구도 하지 않을 거라고.
“바보냐? 아무튼, 내가 너 찾았으니까 이제 네가 술래다!”
“으응? 그, 그래, 얼른 숨어!”
“너는 100까지 세고 찾으러 와!”
페루딘은 순식간에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그가 내비친 의아함은 가만히 있을 뿐인 에시엘을 향했던 듯했다. 여느 어린아이처럼 오로지 놀이에만 관심이 많을 나이였다.
금빛 머리칼이 살짝 흩날리는 것을 지켜보던 에시엘은 페루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야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었다.
“휴―.”
에시엘은 등 뒤로 숨겼던 보석을 내보였다. 앙증맞은 크기의 루비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붉은 보석에는 아까와 달리 풀이 죽은 그녀의 낯이 비쳤다.
“……버지!”
그리고 일순간, 문 너머 멀지 않은 곳에서 상기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에시엘은 또다시 행동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무언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