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8화 (8/80)

8.

‘무슨 소리지?’

에시엘은 쥐고 있던 보석을 빠르게 제자리로 돌려놨다.

머지않아 아이의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것이 무색하게 상대방에게선 아무런 대꾸도 들리지 않았다. 어딘가 이상한 낌새를 차릴 즈음이었다. 가까워지던 발소리가 멈추고 그 주인이 나타났다.

“엄마야…….”

롬포드였다. 그는 짙은 흑색의 머리칼과 어우러지는 서늘한 낯을 한 채 어두운 오라를 잔뜩 풍기고 있었다.

문턱에 선 롬포드가 곳곳을 느릿하게 훑었다. 그 시선은 잔뜩 굳어 버린 그녀 또한 스쳐 지나갔다. 더없이 매서운 눈빛이었다.

“네가 왜 여기 있지?”

하지만 눈빛의 종착지는 끝내 에시엘을 향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다시금 위기 상황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다.

“여전히 주제를 모르고 잘도 돌아다니는군.”

롬포드의 목소리가 작은 공간에 들어찼다. 금방이라도 호령을 내릴 듯한 살벌한 분위기와 새빨간 눈 속에 담긴 무심함은 정신을 더욱 아찔하게 만들었다.

“아……. 어…….”

에시엘은 그의 말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임을 명확히 알고 있음에도 차마 대꾸하지 못했다. 고장이 나 버린 입술은 바보처럼 얼버무림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차가운 시선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어쩌면 어떠한 답을 요구하는지도 몰랐다. 그녀를 응시하던 롬포드의 발걸음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간격마저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수, 술래잡기하다가…….”

복잡한 머릿속과는 다르게 다급히 내뱉은 멍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에시엘은 기어이 고개를 푹 숙였다. 계속해서 자신을 향해 차갑게 내려앉은 눈빛을 감내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너, 이곳은 어떻게 알았지?”

“그, 그게…….”

롬포드는 답을 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는 에시엘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끝내 옅은 한숨을 토해 낸 그의 낯엔 싸늘함이 감돌았다.

뒤이어 검붉은 눈동자가 내부를 구석구석 집요하게 훑었다. 마구잡이로 풀어 헤쳐진 자루 속 금화와 보석은 어두컴컴한 이곳에서 더욱 빛을 냈다. 그의 시선이 특히나 그것에 머무르는 듯 보였다.

문에 새겨져 있던 가문의 문양을 롬포드가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에시엘의 마음이 더욱 초조해졌다.

“아니지.”

“…….”

“조무래기가 뭘 알았겠어. 나조차도 몰랐던 것을.”

나직이 읊조리는 롬포드의 목소리엔 어쩐지 힘이 빠진 채였다. 에시엘은 슬쩍 고개를 들어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왠지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어쩌면 이 위기가 기회가 될 수도 있겠어.’

에시엘이 죽어라 뛰어다니며 찾았던 ‘그곳’은 사실 레고니스 가문의 비밀이 숨겨진 장소였다.

패전국의 전리품과 각종 금은보화, 값어치를 매기기조차 어려운 보석을 한데 모아 내밀하게 키운 재력이었다. 선대들은 황제의 눈을 피해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비밀은 롬포드에게까지 전해지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탓이었다.

롬포드는 급사한 아버지에 대한 슬픔을 지워 낼 새도 없이 홀로서기를 준비했다. 일찍이 언어를 배우기가 무섭게 제 모든 시간을 일에 매진했다. 오랜 세월 그는 일말의 감정적 교류조차 경험하지 못한 채, 마치 기계적인 로봇처럼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다.

빙의 전 보육 교사였던 그녀였기에 특히나 어린 롬포드와 그를 닮은 그의 아이들을 쉽게 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소설에서 손 떼지 못하고 계속 빠져들었던 이유였다.

더구나 에시엘은 가문의 세 남자가 무척 닮아 있음을 느꼈다. 어쩌면 가족이기에 당연한 진리에도 그런 단순한 논리가 전부는 아니었다. 그녀의 내심, 세 남자를 보며 느껴지는 애처로운 감정은 쉬이 지워지지 않는 각인처럼 남았다.

“이런 걸 숨겨 놓았었군.”

자루 더미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롬포드의 붉은 눈이 일렁였다. 비로소 알게 된 진실에 쓰디쓰던 지난날을 떠올리는 듯했다. 그런 그의 분위기를 힐끔 살피던 에시엘의 눈길이 문가에 선 페루딘에게 닿았다.

아이는 어느새 조잘거리던 입술을 꾹 다문 채였다. 장난기 가득한 눈매를 동그랗게 만들곤 새빨간 눈만 연신 데구루루 굴렸다. 롬포드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페루딘이 대공님께 알려 드리자고 했어요!”

그리고 그때 에시엘은 호기로운 외침과 함께 검지를 쭉 뻗어 페루딘을 가리켰다. 그 끝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아이가 수차례 눈만 끔벅였다.

“내, 내가?”

“술래잡기하다가 발견했는데 커다란 자루가 가득해서…….”

롬포드의 시선이 에시엘과 페루딘에게 차례대로 닿았다. 갑작스럽고 엉뚱한 발언을 이해하려는 듯 나릿나릿한 움직임이었다. 뒤이어 처음보다 한층 누그러든 그의 음성이 에시엘을 향했다.

“알려 주려고 했다?”

“네에. 정말이에요…….”

에시엘은 어느 때보다도 조심스레 답했다. 지금으로선 위기를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급히 고안한 방법이 그에게 통할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래.”

롬포드는 간결히 답하곤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가의 페루딘 앞에 멈춰 섰다. 평소 장난기 가득하던 페루딘도 한껏 긴장한 모습이었다. 제 아버지와의 독대가 익숙지 않을 터였다.

“가문에 도움이 되는 일을 했구나.”

“네……? 네, 네.”

“잘했다.”

거칠고 단단한 손바닥이 페루딘의 머리통을 뒤덮었다. 투박한 손길과 달리 뜨끈한 온기가 그에게 전해졌다.

페루딘은 찰나였지만 강렬한 기분을 느꼈다. 제 아버지에게서 여태껏 겪어 보지 못한 감정이었기에 더욱 진하게 와닿왔다.

롬포드가 자리를 떠난 곳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지 넋이 나간 페루딘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에시엘이 남았다.

곧 페루딘의 얼굴에 연하게 생기가 돌며 발그스름해졌다. 그는 괜스레 두어 번 헛기침을 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야! 거, 거봐. 내가 아버지한테 알려 드리자고 했지?”

“으응?”

“크크. 다시 술래잡기하자. 내가 술래 해 줄게!”

어쩐 일인지 술래를 자처하는 모습에 에시엘이 싱긋 미소 지으며 답했다.

“좋아!”

* * *

흥분한 말들의 말발굽 소리는 가히 위협적이었다. 윗사람의 명을 따를 뿐인 마부가 말들을 얼마나 다그친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목적지에 얼추 당도한 마차가 멈추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렸다.

그 위험한 마차에서 뛰어내리다시피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베르게일 공작이었다. 롬포드가 수하의 견장과 같이 서신을 보낸 지 사흘이 채 안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받자마자 부리나케 레고니스가를 향한 것이었다.

“롬포드……!”

베르게일은 화를 참는 듯 어금니를 악물곤 잇새로 제 분노의 원인을 읊조렸다. 주저 없는 걸음으로 곧장 저택의 문을 향해 가자,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기사가 그를 저지하려 했다.

“잠…….”

“감히 어딜 막아서는 게냐!”

베르게일의 불같은 호통에 기사는 주춤하며 물러섰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어쩔 수 없이 저택의 문을 열어 주었다.

롬포드의 저택에는 마치 폭풍 전야 같은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그 적막을 깨는 것이 베르게일의 성난 발걸음 소리였다. 베르게일은 곧장 자신이 알고 있는 롬포드의 집무실로 향했다. 응접실에 앉아 차나 마시며 기다리는 것으론 분노를 진정시킬 수 없었다.

롬포드는 역시나 집무실에 있었다. 벌컥 문을 열고 등장한 베르게일의 씩씩거리는 모습을 예상이라도 한 사람처럼 턱을 괸 채 평온한 낯으로 그를 바라봤다.

“왔군.”

“대……!”

“베르게일 공작. 선은 넘지 말아야지.”

“지금 뭐라…….”

“이곳이 내 저택임을 잊은 건가.”

롬포드가 차가운 눈빛으로 베르게일을 훑었다. 분명 높낮이가 없고 무미건조한 투였음에도 섬찟함을 느낀 베르게일은 손끝을 덜덜 떨었다. 조금 전,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뒤엎을 듯하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가지.”

집무실을 나서는 롬포드가 베르게일을 스쳐 지나갔다. 베르게일은 롬포드의 기세에 압도되는 정신을 겨우 붙들고 발걸음을 움직여 그를 따랐다.

응접실엔 큰 창이 있어 볕이 잘 들었다. 지금과 같이 해가 질 무렵이면 태양의 마지막 발광이 잘 느껴지기도 했다.

“대체 언제 얘기할 셈이지?”

롬포드는 창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베르게일의 서두를 기다리려 했으나 아쉽게도 그는 인내심이 좋지 못했다. 더군다나 아직 끝내지 못한 업무가 많았기에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보내신 서신 말입니다. 저희 것의 물건이 함께 딸려 왔더군요.”

“그래.”

“도, 돌려주시지요.”

자신의 수하를 놓아 달라는 뜻이었다. 베르게일은 테이블 어딘가에 시선을 둔 채, 양손으로 무르팍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의 손끝이 잘게 떨리는 것이 눈에 보였으나, 짐짓 긴장하지 않은 척을 하느라 애를 쓰는 모양이었다.

“저런, 간수를 잘했어야지. 워낙 말을 잘 듣기에 주인이 있는 줄 몰랐군.”

롬포드의 시선이 힐끔 그 손끝을 향했다가 찬찬히 위로 오르며 베르게일의 눈에 닿았다.

“들은 바로는, 다른 귀족들에게 보석을 찔러줬다고 하던데.”

“…….”

“공작의 가문엔 그만한 자본이 없는 거로 아는데. 자금의 출처는 어디인 거지?”

베르게일의 동공이 흔들렸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과녁의 정중앙에 꽂히듯 롬포드는 그의 본심을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요. 뭐, 뭔가 잘못 알고 계시는군요. 귀족…….”

“잘못 알고 있다? 그렇군.”

롬포드는 감흥이 없는 어투로 말을 끊었다. 설령 그 사실이 가짜인들 개의치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그런 그의 태도에서는 무척이나 냉혹함이 느껴졌다.

똑똑―.

“들어와.”

응접실에 들어선 시녀는 차를 내어 왔다. 곧 두 남자의 앞에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이 하나씩 놓였고, 시녀는 롬포드의 손짓에 자리를 물렸다. 그리고 응접실을 나서며 문을 닫으려던 찰나, 소란이 일었다.

“아, 안 됩니다!”

“에이, 잠깐만요! 잠깐만 볼게요!”

어딘가 귀에 익은 아이의 목소리였다. 평정심이 묻어나던 롬포드의 얼굴에서 눈썹이 움찔하더니 이내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지?”

“그, 그게…….”

롬포드의 물음에 시녀는 어찌할 줄 몰라 하며 섣불리 답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빈틈을 놓치지 않은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와아! 진짜 콧수염 아저씨다.”

기어코 응접실에 들어선 에시엘은 자신의 자그마한 검지로 베르게일을 가리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