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아저씨, 그 콧수염 진짜예요?”
에시엘은 모두가 당황하는 틈을 타 잽싸게 베르게일의 옆으로 향했다. 그리고 스리슬쩍 자리를 잡아 앉으며 말했다. 순수한 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아무것도 몰라요’ 같은 표정을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연히 진짜, 아, 아니, 대공 각하! 이 아이는…….”
무심결에 답하던 베르게일은 정신을 차린 뒤 롬포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분명 아들만 둘뿐이라고 들었기에 의아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롬포드는 에시엘이 멋대로 응접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고 나서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조금 짙은 색을 띠는 붉은 눈은 도통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응접실에는 일말의 적막이 흘렀다.
‘이, 일 났다! 아무 말 안 하니까 더 무섭잖아!’
에시엘이 좀 전의 무모했던 행동을 맘속으로 후회하는 사이, 적막을 깨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쩌자고 이런 분별없는 행동을 하는 거지?”
“그게…… 궁금해서 무, 물어만 보려고 했어요…….”
“아무래도 죽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군.”
에시엘을 빤히 보는 롬포드의 시선은 계속해서 그녀에게 향하고 있었다. 시리다 느껴질 만큼 여전히 차가운 눈빛이었다.
그녀의 행동은 분명 무모했으나 무작정 앞뒤 생각 없이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에시엘은 힐끔힐끔 롬포드의 눈치만 보며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다.
베르게일 공작의 뒷배가 든든한 이유. 그녀는 원작을 통해 그것을 알고 있었다. 바로 공작이 황제의 그늘 아래 있는 덕이었다.
롬포드 대공의 힘이 두려웠던 황제는 베르게일 공작과 손을 잡았다.
황제에게 있어 롬포드는 양날의 칼 같은 존재였다. 충직한 신하이기는 했으나 비단 무력뿐만이 아닌 막강한 군사력과 명석한 두뇌,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그의 존재감은 황제에게 있어 충분히 압도적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롬포드 대공을 끌어내릴 기회만 엿보고 있던 베르게일 공작에게 권한을 주었다. 바로 세금을 빼돌린 탈세 장부를 작성하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
‘공작이라면 장부를 지금 가지고 있을 수도 있어.’
베르게일 공작은 남을 신뢰하지 못하고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일수록 제 품에 가지고 다닐 확률이 높았다. 에시엘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베르게일 공작이 찾아온 이 상황을 잘 이용해야만 했다.
롬포드는 머지않아 황제의 명을 따라 전장으로 떠나야 한다. 잔혹한 전쟁터가 될 그곳은 아나이스 소왕국과 밀접하게 닿아 있는 곳이기에 에시엘이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이번 전쟁으로 인해 아나이스 소왕국까지 토벌된다면 결국 원작처럼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할 확률이 농후할 터였다.
그사이 롬포드는 문가에 서 있던 시녀를 향해 손짓했다.
“이거, 내보내.”
에시엘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에 에시엘 쪽으로 다가간 시녀가 그녀의 가녀린 팔뚝에 손을 뻗을 때였다.
“자, 잠깐만요! 이거 뭐예요? 저, 저 마셔 보고 싶어요!”
에시엘은 몹시 다급하게 테이블에 놓인 차를 가리키며 베르게일에게 물었다. 조금 사그라들긴 했으나 아직 희미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으앗! 뜨거워!”
순식간이었다.
채 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에시엘이 양손으로 붙들었던 찻잔은 공중제비를 돌고 있었다. 잔에 가득 담겨 있던 뜨거운 차가 베르게일의 옷 위로 쏟아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곧 쨍그랑―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응접실 안을 메웠다.
“으, 으악!”
“엄마야…….”
베르게일의 얼굴빛이 금세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뜨거운 차가 쏟아진 재킷 위로 갈피를 잃은 그의 손이 허둥지둥 방황하고 있었다. 그는 점점 스며드는 뜨거움에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아, 아저씨. 어떡해, 미, 미안해요.”
에시엘은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의 눈가에 당황함이 깃든 눈물이 송골송골 맺혔다. 가까이 있던 시녀는 침착하게 깨진 찻잔의 흔적을 치우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아저씨, 뜨거워요, 뜨거워! 얼른 옷 벗어요!”
동그란 눈에 눈물을 매단 에시엘이 베르게일의 옷으로 손을 뻗었다. 고통스러운 탓인지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는 그를 돕기 위함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롬포드는 둘 중 누구든 말릴 생각이 없는 듯 턱을 괸 채 그들을 관망하고 있었다. 짐짓 흥미로운 광경인지 그의 붉은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저, 저리 가!”
“아, 아저씨? 왜 그래요, 제가 잘못했어요. 도와줄게요.”
베르게일은 뜨거움에 몸부림치면서도 젖은 재킷을 벗어 내지 않았다. 오히려 에시엘이 뻗어 온 손길을 뿌리치며 질겁을 했다. 확실히 정상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아저씨이! 얼른요, 다친다구요!”
에시엘은 꿋꿋이 버티는 베르게일의 옷을 벗겨 내기 위해 입술을 앙다물고 애를 썼다. 그리고 한참 동안의 실랑이 끝에 옷깃을 들치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그의 품에 있던 검은색 수첩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이건……?’
“헉―. 아저씨 이거 다 젖은 것 같아요!”
에시엘을 제지하려던 베르게일의 손길이 무색할 만큼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눈 깜짝할 새에 검은색 수첩을 빼내어 테이블 위로 내팽개쳤다. 그러곤 다시 옷을 벗겨 내기 위해 몰두하자 깨진 찻잔을 모두 치운 시녀도 행동을 거들기 시작했다.
그들을 지켜보던 롬포드의 시선이 내팽개쳐진 수첩에 닿았다. 곧 롬포드의 투박하고 마디 굵은 손가락이 수첩을 집어 들었다. 어떠한 무늬도 없는 단조로운 검은색의 수첩이었다. 마치 아무런 의심을 품지 않게 하려는 듯이.
롬포드는 그것을 촤르륵 펼쳐 내용을 훑었다. 그중 눈에 띄는 내용은 과도하게 적힌 금액들이었다. 베르게일이 아무리 공작의 지위를 가졌다 한들 감당할 수 없을 값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롬포드의 싸늘한 시선이 한껏 당황한 채 초조해하는 베르게일 공작에게 향했다. 그는 다리를 사정없이 덜덜 떨며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젠장, 젠장…….”
심지어는 넋이 나갔는지 공허한 눈을 하곤 연신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황성에 가던 차에 레고니스가를 잠시 들러 따지려던 생각이 화근이었다. 베르게일이 뒤늦게 후회해 봤자 그의 벗겨진 겉옷은 이제 시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아주 재미있는 짓거리를 하고 있었군.”
롬포드는 반쯤 젖은 수첩을 팔랑이며 말했다.
“무려 제국의 태양과 말이야.”
“크윽…….”
“공작. 그대의 뒷배가 든든하다는 걸 짐작하긴 했으나, 이제 확실해졌어.”
베르게일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괴로운 신음만 흘렸다. 더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황제 폐하를 꼭두각시 인형 삼아 제국을 다스리려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군.”
“…….”
“쯧. 얼른 도망이라도 치는 게 좋지 않겠나?”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는 롬포드의 눈빛이 매서웠다. 이에 몸을 부르르 떨던 베르게일은 시녀에게서 옷가지를 뺏어 들고, 올 때와 마찬가지인 성난 걸음으로 응접실을 나갔다.
‘됐다……!’
시녀의 옆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에시엘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확실한 성과를 얻었으니 이것은 추후, 강력한 한 방이 될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지어지려던 찰나, 들려오는 롬포드의 목소리에 흔적을 지웠다.
“너. 여긴 어떻게 알고 왔지?”
롬포드는 베르게일을 쏘아보던 살벌한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목숨이 아까운 줄 모르고 또 저택을 돌아다녔군.”
“그, 그게 주방을 가려다 길을 헷갈린 거예요. 하, 하핫.”
에시엘은 절로 움츠러드는 몸을 내색하지 않으려 하며 반문했다. 최선을 다해 만들어 낸 천진난만한 아이다운 표정도 함께였다. 에시엘은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천천히 뒷걸음질하다가 후다닥 줄행랑을 쳤다.
이에 롬포드의 가늘어진 눈매가 점차 멀어지는 에시엘의 꽁무니를 쫓았다.
* * *
대공의 침실. 롬포드는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며 앉아있었다. 창밖으로 푸른빛이 감도는 것이 곧 일출이 시작될 무렵의 새벽녘인 듯했다.
테이블 위엔 그의 붉은 눈만큼이나 진한 핏빛을 띠는 붉은 와인과 공작에게서 빼앗은 수첩이 놓여 있었다. 롬포드는 푸르스름한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고 검은 수첩을 빤히 보다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똑똑―.
그의 상념을 헤치기라도 하듯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술은 그만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문을 두드린 자는 다름 아닌 집사인 렌테였다. 쉬이 잠에 들지 못하는 롬포드를 걱정해 방문한 모양이었다. 반면 롬포드는 그런 것 따위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 문가에 서 있을 뿐인 렌테에게 다가오라 손짓을 해 보였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롬포드는 손가락을 뻗어 테이블 위의 검은 수첩을 톡톡 두어 번 두들겼다. 가볍지만 둔탁한 소음이 울린다.
“어찌 됐건 좋은 기회를 잡은 것 같습니다만…….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
렌테의 질문에도 롬포드는 어떠한 생각에 잠긴 듯 쉽게 답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살피던 렌테는 롬포드의 걱정을 덜려는 듯 말을 덧붙였다.
“그 볼모가 베르게일 공작이라 꼭 집어 말한 것도, 공작에게 차를 쏟은 일도 신기할 따름입니다. 어쨌든 이로써 전쟁은 피할 수 있겠군요.”
“…….”
“전부 그 어린 볼모의 공이라니 그저 놀랍습니다.”
“……네가 보기에도 그런가.”
롬포드의 얼굴빛에 근심이 서렸다. 그는 차를 쏟고는 베르게일과 실랑이하던 어린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이는 제 몸집보다 몇 배는 큰 어른의 옷깃을 들치려 안간힘을 썼다.
또 지난번, 자신은 알 수 없었던 가문의 숨겨진 재물을 발견했을 때도 같았다. 긴요한 순간엔 늘 그 아이가 중심에 있었다.
그것이 정말 단순한 실수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의 행동은 가히 필사적이었다. 그래서 신경이 쓰였고 자꾸만 주의를 기울이게 됐다.
“지금 그 볼모, 어느 곳에 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