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롬포드의 물음에 렌테는 지난 기억을 더듬곤 말했다.
“아마 3층의 구석진 방일 겁니다.”
“적당한 곳으로 옮겨. 눈에 잘 드는.”
렌테는 롬포드가 덧붙인 말에 궁금증이 일었으나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그 볼모 과연…… 와이번이 뒷걸음질 치다가 드래곤을 잡은 격이군요.”
넌지시 말을 건넨 렌테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는지 허공을 응시한 채 슬몃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아무렴 어떻습니까. 누구의 공인들.”
“…….”
“굴러들어 온 복덩이는 환영해야지요. 각하, 안 그렇습니까?”
렌테는 자못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 * *
“넓은 방 최고!”
에시엘은 전보다 더 넓어진 침대 위에서 다리를 신나게 흔들며 기쁨을 만끽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돌연 아침부터 집사가 찾아왔었다.
집사는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고, 그렇게 도착한 곳이 바로 이 방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곳에서 지내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한눈에 봐도 전보다는 넓고 가구들도 좋아 보이는, 볼모에겐 과분한 방이었다. 이런 방은 소왕국에서 지낼 때도 가져 본 적 없었다. 늘 자신을 원망하는 부모 탓에 왕성에서 가장 볕이 들지 않는 낡은 방에서만 잠을 청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방을 바꿔 준 거지……?”
그러나 기뻐하던 것도 잠시, 에시엘은 동동거리던 발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창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여름 공기에 곱슬거리는 머리칼이 흩날렸다. 유난히 창이 크게 난 이 방에서는 대공가 저택의 풍경이 한눈에 담겼다.
‘고맙다는 의미인가……?’
베르게일 공작의 수작질을 잡은 것에 대한 대공 나름의 감사 표시일까.
‘아니지, 아니야.’
거기까지 생각하던 에시엘은 퍼뜩 고개를 흔들었다. 대공은 감사 표현 같은 걸 할 인물이 아니었다. 타인에게 그런 마음을 가질 정도로 감상적인 인물도 아니었고.
“그럼 왜…….”
에시엘은 골똘히 고민하다가 포기한 듯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아무리 머리를 굴린다 한들 대공의 심정을 자신이 어떻게 알겠는가.
“에잇, 몰라. 상관없겠지.”
이유야 어찌 됐든 이런 방에서 하루라도 지낼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런 침대에서 뒹굴어 보겠어!’
그녀는 이내 대공에 대한 생각을 떨쳐 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즐길 건 즐겨야지.
“아이, 참. 여기부터 저기까지 한참을 굴러야 하잖아?”
그야말로 행복한 불평이었다. 입매가 잔뜩 올라간 에시엘은 베개를 꽉 끌어안고 또다시 데구루루 굴렀다. 보통 또래보다 작은 체구인 그녀가 고작 두어 바퀴를 굴러선 끝에까지 닿을 수 없었다.
에시엘이 다섯 바퀴쯤 구르자 침대의 가장자리가 느껴졌다. 에시엘은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좋았어. 스승님께 가 봐야겠다.”
* * *
주방은 조금 분주한 모습이었다. 아침 식사 후 뒷정리를 하는 탓이었다.
‘여기서 도프니를 어떻게 찾지……?’
에시엘은 주방의 입구쯤 되는 경계에 서서 머리만 빼꼼히 내밀어 기웃거렸다.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데록데록 바쁘게 움직였다. 도프니를 처음 만난 후 두 번째로 주방에 방문해서인지 이렇게 정신없는 분위기와 많은 사람을 맞닥트리는 건 너무나 낯설었다.
차마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머뭇거리던 그때, 뒤에서 누군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어어?! 에시엘 님? 누구 찾으세요?”
에시엘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았다.
“으앗! 누, 누구세요?”
“이런 놀라셨구나. 죄송해요. 혹시 주방장님을 찾아오셨나요? 안 그래도 지난번에 주방장님께 에시엘 님을 만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저도 실제로 뵐 줄은 몰랐네요! 그때 어찌나 자랑을…….”
저택 내에 소문이 파다하다던 도프니의 말은 사실인 듯했다. 눈앞의 사내는 에시엘의 붉은 머리칼만 보고도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이 사람, 엄청난 수다쟁이다……!’
에시엘은 쉴 틈 없이 쏟아 내는 이야기를 들으며 두 눈만 끔벅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에시엘은 사내를 보고 있느라 빳빳이 쳐든 고개가 슬슬 아파 왔다. 하지만 여전히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아 입을 떼려던 찰나, 그는 주제를 바꾸며 대화에 더욱 열을 올렸다.
“아차차! 제가 누군지 말씀도 안 드렸네요. 저는 주방장님 보조로 일하는 로슈아예요. 저택에 들어온 지는 겨우 석 달 정도이지만,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말해 주세요. 최대한 도울게요! 꽤 친한…….”
저택 내의 사용인들과 꽤 친분을 쌓았다는 사내는 쪼그려 앉더니 대뜸 에시엘의 손을 맞잡았다. 낯선 온기는 제법 따스했다. 눈까지 빛내는 모습이 도움을 주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 같았다.
“그래도 될까요? 아니, 꼭 그렇게 하고 싶어요!”
“그게……. 딸꾹! 헙!”
순간 에시엘은 깜짝 놀라 입을 앙다물었다. 갑자기 새어 나온 딸꾹질 때문이었다.
냉철하고 잔인하다는 롬포드 대공 앞에서도 나온 적 없던 딸꾹질이었다. 이유를 알 순 없었으나 어린아이의 몸은 무자비한 대공보다 본인의 뜻을 몰아붙이는 사내에게 더 겁을 먹은 듯했다.
“어어……? 괜찮으세요? 무, 물! 물 드릴게요!”
로슈아가 당황하며 허둥지둥하는 사이 에시엘이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렸다.
“저저, 쯔쯧. 로슈아! 왜 또 호들갑이냐? 곧 있으면 진급도 하는 녀석이.”
도프니는 멀리서도 보일 만큼 큰 몸짓으로 갈팡질팡하던 로슈아를 나무랐다. 그 모습이 퍽 자연스러워 평소 로슈아의 모습을 짐작하게 했다.
“주방장님, 어디 갔다 오세요? 에시엘 님께서 찾으셨는데. 아, 아니지. 일단 물을……!”
“오오, 에시엘 왔구나. 저 시끄러운 녀석이 폐는 안 끼치더냐?”
“으응, 딸꾹. 로슈아 착한 것 같아. 도움이, 딸꾹, 필요하면 도와준대.”
에시엘은 주방으로 들어간 로슈아의 뒷모습을 가리켰다. 그가 식기를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시끌벅적하게 느껴졌다.
“……이미 폐를 끼친 것 같구나. 에시엘, 얼른 들어가서 뭐라도 마셔야겠다.”
눈을 가늘게 뜬 도프니가 에시엘의 집게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녀를 주방의 부산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곳에 먼저 가 있던 로슈아는 에시엘이 들어섬과 동시에 그녀가 앉기 쉽도록 의자를 살짝 빼 주었다. 간이 테이블이긴 했지만 나름 격식을 갖추어 상을 차린 듯 보였다.
“로슈아! 연습은 안 하고 또 수다를 늘어놓고 있었지? 인간 휘핑기라 불릴 만큼 연습하고 또 연습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냐!”
“에이, 그거야 당연한 거죠. 에시엘 님. 이거 드시겠어요? 사죄의 의미예요. 비록 제가 아직 미흡한 보조이지만, 이 스콘은 제 필살기거든요. 물이든 우유든 전부 드릴게요. 부디 맛있게 드셔 주세요!”
이어 도프니 또한 미소 띤 얼굴로 어서 앉으라는 말을 하며 자리에 앉길 권했다.
에시엘은 쭈뼛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자신은 본래 왕녀이기는 하나 대우를 받아 본 적이 없었기에 그들의 대접이 무척이나 어색했다. 또 두 사람에겐 제 부모며 왕성의 사용인들에게도 느껴 보지 못했던 친근함이 있었다.
“고, 고마워요. 잘, 딸꾹, 먹을게요.”
이런 애정 어린 눈빛은 처음 받아 보는 것이었다. 에시엘은 오직 자신에게만 향하고 있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모른 척하며 물을 한 모금 꼴깍 삼켰다. 그러곤 포크를 집어 들었다.
동그란 접시 위의 스콘은 굉장히 먹음직스러운 황금빛을 냈다. 에시엘은 그것을 포크로 찍고 서둘러 한 입을 왕 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둘의 시선이 사그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와, 맛있어요. 완전 겉바속촉이야!”
에시엘은 입술을 열심히 오물거리다 멈추고 말했다. 로슈아의 천방지축이던 모습과는 달리 필살기라는 말은 사실인 듯했다. 그야말로 스콘의 정석과도 같은 맛이었으니까.
“거, 거 뭐라고 하셨어요? 어쩐지 칭찬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제가 너무 자만한 걸까요? 좋아요, 더 연습해서 에시엘 님의 입맛을 사로잡도록 노력할게요! 이건 갖다 버…….”
“아니요, 아니요.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해. 짱 맛있어요.”
돌연 접시를 치우려는 행동에 에시엘은 자그마한 손으로 접시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청명한 녹색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눈매가 휘어지게 웃음 지었다.
“헤헤. 어라? 딸꾹질도 멈췄나 봐요. 진짜 짱이다!”
이 모습을 본 로슈아는 양 주먹을 불끈 쥐더니 전에 없던 강건한 투로 말했다.
“에시엘 님, 주방장님.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더욱 쫀쫀한 휘핑크림을 만들 수 있도록 연습해서 반드시 제 케이크를 에시엘 님께 선보일게요. 그때까지 몸 건강하시고 저를…….”
“방정 떨지 말고 가거라.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네 주인을 먼저 모셔야지, 이놈아.”
로슈아의 철없는 발언을 들은 도프니는 그의 뒤통수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이에 로슈아는 툴툴거림을 멈추지 않으며 주방의 다른 곳을 향해 갔다.
에시엘은 두 남자를 번갈아 보며 남은 스콘을 마저 먹고 있었다. 갓 짜낸 신선한 우유와 함께 먹으니 더욱 금상첨화였다.
마지막 남은 조각까지 모두 먹어 치우고 포크를 내려놓았을 땐, 자신을 기다려 주고 있는 도프니가 보였다. 역시나 왕성에서는 경험해 본 적 없는 대우에 에시엘은 기분이 이상했다.
“맛있게 먹어서 다행이구나.”
“도프니. 기, 기다려 줘서 고마워.”
도프니는 빈 접시와 식기를 치우려는 듯 간이 테이블을 정리했다. 그것을 빤히 보던 에시엘이 괜스레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어색하게 고마움을 전하자 그는 그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순간 잊고 있던 걸 떠올린 에시엘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도프니, 생각났어. 나 오늘부터 배우고 싶어!”
“뭐를 말이냐……?”
“제과 제빵!”
에시엘은 기대감에 부푼 목소리로 말했다. 머지않아 주방 곳곳에 뽀얀 밀가루가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