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에시엘은 해가 다 떨어졌을 무렵에서야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고단한 몸은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게 얼른 휴식을 취하라며 아우성쳤다. 그뿐만 아니라 옷이며 머리며 하얀 밀가루가 묻어 본래의 온전한 색을 띠는 곳이 드물었다.
아무렴 난생처음 해 보는 제과 제빵이 쉬울 리 없었다. 하지만 재미는 있었기에 도프니에게 틈틈이 배우겠다는 약속까지 하고 돌아왔다.
‘씻을, 에이, 아니, 아니야.’
에시엘은 걸음을 멈추고 오도카니 제 모습을 바라보다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몰래 복도를 거닐다 롬포드를 마주친 그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차갑기 그지없는 적안을 머릿속에 그리기만 해도 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내 그녀는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야! 어디 갔다 오, 뭐야. 너 완전 거지꼴이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에시엘보다 먼저 방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순간 전혀 달갑지 않은 인물 중 하나였다.
페루딘은 의자에 늘어지게 앉아 있다가 몸을 번뜩 일으켰다. 몹시 반가워하는 기색으로 슬몃 미소 지으며 에시엘을 맞았다. 마치 제 방인 양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꽤 오래 앉아 있던 모양인지 페루딘의 뒷머리가 잔뜩 눌려 군데군데 삐쭉 솟아 있었다.
‘설마 놀자고 온 건 아니겠지? 이 시간에?!’
에시엘은 저도 모르게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제빵을 배우며 모든 걸 쏟아부은 탓에 남아 있는 체력이 없었다. 페루딘이 놀자고 보채면 냅다 도망이라도 가야 할 판이었다.
“푸핫! 못생긴 게 더 못생겨졌어. 근데 안 들어오고 뭐 해?”
페루딘은 에시엘의 행색을 비웃다가도 멀뚱히 서 있는 모습을 갸웃하며 쳐다봤다. 이내 페루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며, 그의 눈빛에 에시엘의 더럽혀진 차림새와 더불어 가만히 있기만 한 모습을 걱정하는 듯한 기색이 깃들었다.
곧이어 그는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점차 걸음을 움직였다.
“너 왜 그래?”
페루딘은 멀뚱히 서 있던 에시엘의 손목을 붙잡고 방 안으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새빨간 눈으로 에시엘을 힐끔거리며 그녀의 낯을 살폈다.
“으응? 뭐가?”
“괴롭힘이라도 당한 거야?”
“괴롭힘?”
에시엘은 되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뜬금없이 괴롭힘이라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니야? 그럼 돼, 됐어!”
이에 페루딘이 대뜸 소리쳤다. 찡그려져 있던 미간이 풀어지며 그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인지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페루딘은 에시엘을 이끌고 테이블 가까이 다가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무언가를 찾는 듯한 그의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에이 씨, 어디 있는 거야.”
짜증스럽게 중얼거린 페루딘이 주머니에서 꺼내 든 검은색 물체의 한 부분을 눌렀다. 그러자 작았던 형태가 점점 커져 본래의 모양을 찾은 그것은 새총이었다. 변형이 가능한 것으로 보아 마법이 깃든 새총인 듯했다.
에시엘은 옆에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페루딘이 내팽개치듯 던져둔 똑같은 새총이 두 개 있었다.
‘새총? 장난감으로 저런 걸 사 준 거야? 진짜 살벌한 가문이야.’
소름이 돋는 느낌에 에시엘은 속으로 몸서리를 쳤다. 이런 곳에 볼모로 잡혀 온 자신의 처지가 새삼 실감이 났다. 그러다 들려오는 페루딘의 목소리에 약한 도리질을 치며 번뜩 정신을 차렸다.
“볼모 주제에 어디를 돌아다닌 거야? 쳇, 벌써 저녁이 됐잖아!”
페루딘은 입술을 빼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자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아 심통 난 마음이 입술이 내밀어진 정도와 비례하는 듯했다.
“헤헤……. 너어, 오래 기다렸구나!”
어색하게 웃은 에시엘은 일부러 더욱 밝은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집게손가락으로 페루딘의 눈부신 금발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눌린 채 삐죽 솟아 있는 뒤쪽 머리칼이었다.
“어? 아, 아니거든! 네가 잘못 본 거야!”
일찍이 찾아와 기다렸다는 사실을 들켜 쑥스러운지 변명하는 페루딘의 낯이 희미하게나마 발그레해졌다. 그는 곧 서툰 손길로 연신 뒷머리를 매만졌다. 그런데도 정리가 되지 않는 탓에 결국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트렸다.
“이걸로 같이 놀려고 했구나?”
“흥! 너랑은 이거 안 해.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도 모르고, 이 멍청이가.”
테이블에 놓인 새총 두 개를 놓고 하는 말이었다.
마법 장난감은 분명 가격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대륙에서 신력만큼이나 귀한 능력으로 간주되는 것이 바로 마력을 운용하는 마법이었다. 그런데 그런 마법이 깃든 장난감이라니, 확실하진 않아도 분명 말 한 마리 값을 웃돌 터였다.
“미안해……. 다음에 이거 가지고 같이 놀자! 응?”
“……뭐, 네가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에시엘이 어깨를 한껏 늘어트리며 말하자 페루딘은 그제야 정말 어쩔 수 없다는 투로 으스댔다. 그런 모습이 의외로 얄밉지 않아 에시엘은 속으로 웃음을 감췄다.
페루딘은 방을 휘휘 둘러보더니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앉았다. 어쩐지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있잖아, 여기가 내 방인 건 어떻게 알았어?”
에시엘은 페루딘의 맞은편에 앉으며 넌지시 물었다. 이미 고단한 몸인지라 다른 놀이라도 하자며 물고 늘어지는 상황은 최대한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 몸이 모르는 건 없어! 근데 여기 방 넓네. 아버지는 왜 이런 방을…….”
몸을 팽그르르 돌린 페루딘이 소파에 몸을 뉘었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볼모 따위에게 왜 이런 방을 주었는지 궁금해하면서도 내심 방이 부러운 눈치인 듯했다.
에시엘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물조물 중얼거리는 입술은 연신 서러움을 토해 내는 것 같았다.
“으음. 그럼 너 여기 써! 나는 괜찮아.”
“뭐?! 됐거든? 내 방이 더 넓어.”
그런 연유가 아니라면 대체 무슨 까닭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의아해진 에시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대신 나 여기 자주 올래.”
“응?”
“이제 에시엘, 네 방에서 놀래. 왜냐면, 음…….”
페루딘은 말을 제멋대로 내뱉은 모양인지 이유를 꽤나 곰곰이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도 그 이유를 정확히 꼬집을 수 없었다. 페루딘이 고민에 빠진 사이 에시엘도 가만히 생각했다.
‘날 괴롭히려는 게 목적이 아닌가? 뭘 고민하는 거지?’
“왜냐면! 내 방이 어지럽혀지는 건 싫으니까.”
대답을 마친 페루딘은 어쩌다 떠올린 ‘어지럽혀지는 게 싫다’라는 이유를 그럴싸하다고 여길 뿐이었다. 꽤 만족스러운 이유에 페루딘의 입매가 매끄럽게 올라가려는 찰나, 이어지는 에시엘의 반문에 그가 표정을 지워 냈다.
“청소는 다른 사람이 해 주잖아?”
“마, 많이 어지럽히면 혼날지도 모르거든?”
더는 대꾸가 들리지 않았다. 페루딘은 에시엘을 향해 슬쩍 고개를 돌려서 힐끔 쳐다보려 했으나 돌연 눈이 마주쳤다. 에시엘은 의아함이 생긴 듯 고개를 약간 갸우스름히 기울인 채 페루딘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깜짝 놀란 그가 되레 소리쳤다.
“이……. 바보야! 그냥 그렇다면 그런 거야!”
에시엘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앞으로 제 방이 조용하지 못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어 페루딘은 몸을 일으켜 앉으며 문 쪽을 가리켰다.
“야! 괴롭힘당한 것도 아니라며. 계속 거지꼴로 있을 거야?”
“어? 으응, 알겠어.”
* * *
날이 좋은 오후. 에시엘은 창틀에 기대어 살짝 열어 놓은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쐬고 있었다. 살결을 간지럽히는 바람이 몹시도 포근하게 느껴지는 날씨였다.
살며시 눈까지 감고 있노라면 싱그러운 풀 냄새에 모든 걱정을 잊을 만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은 당연지사건만.
돌연 풋풋한 풀 내음을 뒤덮고도 남을 만큼 달콤한 냄새가 진하게 풍겨 왔다.
“맛있는 냄새! 어디서 나는 거지?”
에시엘은 냄새를 맡기 위해 작지만 오뚝한 코를 열심히 킁킁거렸다. 어쩐지 그 냄새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에시엘의 방과 가까운 곳에서 나는 것이 분명했다.
“끄응.”
그녀는 앓는 소리와 함께 감았던 눈을 떴다. 앙다문 입술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음식을 탐하는 어린아이의 본성은 아무래도 제어하기 힘든 것이었다. 배가 고프지도 않았건만 달콤한 냄새를 맡으면 맡을수록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탓에 더는 참기 어려웠다.
에시엘은 홀린 듯 방문을 열었다. 향긋한 냄새는 복도에도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녹음 가득한 눈을 총명이 빛낸 에시엘은 천천히 방을 나섰다.
그녀의 발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움직이고 있었다. 머릿속엔 멈춰야 한다는 생각보다 실체를 직접 보고야 말겠다는 다짐이 강하게 들었다.
냄새를 쫓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긴 복도 곳곳에 닫혀 있는 방문 몇 개를 지나지 않아, 누군가 채 닫지 않아 살짝 열려 있는 문이 나타났다.
에시엘은 그 문 앞에 서서 틈새로 코를 가져다 대곤 조금 전 자신의 방에서처럼 냄새를 맡았다.
‘여기다!’
확실했다. 이 방에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었다. 에시엘은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머뭇거릴 겨를이 없었다.
가장 먼저 시야에 보인 것은 침대였다. 무척이나 큰 침대는 족히 열 바퀴는 구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옆으로 시선을 옮기자 살짝 열린 창을 가린 채 나부끼는 검은색 커튼과 방의 가운데에 놓인 테이블이 보였다. 이외에도 작은 협탁이나 러그 등이 자리한 방은 전체적으로 깔끔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그녀가 그토록 찾던 달콤한 냄새의 원인이 있었다.
팬케이크였다. 딸기, 블루베리, 키위를 토핑으로 얹은 그 위엔 시럽이 듬뿍 뿌려져 있었다. 캐러멜시럽보다 더욱 달큼한 향을 풍기는 무언가였다.
에시엘은 여전히 홀린 듯 테이블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더욱 진하게 느껴지는 향을 맡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먹고 싶다…….”
그녀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실체를 직접 마주하자 ‘얼마나 맛있을까?’ 같은 궁금증이 강하게 일었다. 왕성에서는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멍하니 바라보던 먹음직스러운 팬케이크 옆으로 가지런히 놓인 포크와 나이프가 눈에 들어왔다. 어린아이의 본능은 한시라도 빨리 맛보기를 원하고 있었다. 에시엘은 그것을 향해 찬찬히 손을 뻗었다.